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62화
“잘 만나고 왔어?”
집에 들어오니 오희진이 늦게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 술 마셨어?”
“어. 갑자기 장 회장이 술을 권하더라고.”
“이야. 우리 자기. 출세했네? 장연욱 회장이랑도 술을 다 마시고.”
“그러게. 아주 영광이었지.”
장 회장, 그렇게 안 봤는데 주량이 어마어마해 보였다.
나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지만, 장 회장과 정말 작정하고 마셨다면 먼저 쓰러졌을 것 같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했기에 술까지 다 마셨어?”
“천하 그룹이 현광 자동차 이곳저곳을 건드려 놨잖아. 이왕 건들 거 한 번 더 건드려 달라고 했지.”
“진짜 그렇게 말했어?”
“응.”
“장 회장도 어이없었겠다.”
“오히려 재밌어하더라고. 그러니까 술까지 먹이면서 내 얘기를 끝까지 다 들었지.”
장연욱 회장은 정말 입도 벙긋하지 않고 내 말을 경청했다.
보통 남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는 앉은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참 대단한 양반이라고 해야 할까.
그와 나눈 술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대화는 잘 끝났고?”
“장연욱 회장이 알겠다고 하더라.”
“의외네.”
“현광 자동차가 정영준 회장 손에 들어가는 게 차라리 낫다고 판단한 거 같아. 그래야 현광 자동차를 제치고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서로 윈윈하자는 거지.”
장 회장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현광 자동차를 갈라칠 기회는 지금뿐이지 않던가.
현광 그룹이 다시 본래의 모습을 찾아간다는 것이 조금 불안할지는 몰라도, 지금은 자동차 산업부터 우뚝 서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따라잡지 못할 테니까.
“문제는 현광 자동차 인수가 끝난 뒤지.”
“장 회장이 자기랑 회사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했었지?”
“응. 나랑 헤어질 때도 그 얘기를 또 하더라. 현광 자동차 일이 다 끝나면 아주 재밌어질 거라고.”
“하여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야. 그런데 그 정도로 해 줬으면 나머지는 정영준 회장이 알아서 하겠지?”
“맞아. 내 일은 끝났어. 지분만 넘겨주면 돼.”
“다른 바쁜 일은 없고?”
“딱히?”
“잘됐다. 그럼 나랑 내일 어머니 모시고 백화점 같이 가자. 식사도 같이 하고.”
그러고 보니 요즘 일이 바빠 어머니를 신경 쓰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면 쓰러져 자기 일쑤라 미래 커뮤니티 센터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할 정도였다.
오희진 말대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간만에 휴가를 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자. 어머니도 내가 신경을 못 써 드렸네.”
“걱정 마. 내가 매일 안부 전화 드리고 있으니까.”
“고마워. 너밖에 없다.”
전에는 참 무서운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같이 살아 보니 정말 꼼꼼하게 주변을 챙길 줄 아는 여자였다.
그녀는 내 어깨를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그럼 오랜만에 같이 샤워할까?”
갑자기 취기가 싹 날아가는 기분이다.
* * *
“이렇게 다 같이 나오니까 너무 좋구나.”
들은 얘기로는 오희진이 틈만 나면 어머니와 함께 여러 백화점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어머니의 패션은 전보다 훨씬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오래된 옷들을 입고 다니셨는데 지금은 한 벌당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들을 위아래로 치장하고 계셨다.
“이 어미는 아직도 옷 입는 법을 모르겠더라. 다 희진이가 맞춰 준 세트들이야.”
“너무 잘 어울려요, 어머니.”
“예. 돈 아끼지 말고 펑펑 쓰세요.”
“맞아요. 우리 진석 씨가 무려 대한민국 1등 금융 그룹 회장이잖아요.”
“어휴. 말도 마라. 나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TV만 켜면 진석이 얼굴이 나오는 거 아니겠니? 거기다 하도 주변 사람들이 전화를 해 대서 핸드폰도 벌써 3번 바꿨어.”
아들이 잘나가니 어머니에게 붙는 파리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런 일 있으면 경호원들한테 말하세요. 알아서 다 해결해 줄 거예요.”
“난 그 경호원들도 무섭더라. 괜히 말 걸기가 꺼려져. 그냥 엄마 혼자 잘 다닐 수 있는데, 괜히 붙인 거 아니니?”
“안 돼요.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요. 그리고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시면 꼭 말하세요. 의사들이 24시간 어머니를 위해 대기 중이니까요.”
“그거 돈 너무 많이 드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그 정도는 바닷물 한 바가지 푸는 수준밖에 안 되니까.”
오희진은 항상 그렇듯 직접 앞장을 서서 말했다.
“그동안 밀린 쇼핑 오늘 여기서 다 해요.”
우리는 그녀의 뒤를 따라 다니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고민하지 않고 바로 구매했다.
그렇게 20분쯤 흘렀을 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우리 앞에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진석 회장님 아니십니까?”
그는 정중히 인사를 올리며 내게 명함을 건넸다.
“S 백화점 사장 김문석이라고 합니다, 회장님.”
이 백화점 사장이 내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신화 그룹 소속 백화점이었지?
거기다 경호원 3명이 우리 주위에 붙어 있고 나머지 7명은 거리를 두고 우리를 따라오는 중이라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제가 소란을 일으킨 거라면 미안합니다.”
“아휴. 아닙니다. 저희 백화점을 찾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VVIP이신 만큼 최고의 서비스로 모시겠습니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엄청난 기회일 것이다.
나와 명함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길이 열릴 가능성이 높으니까.
나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분한 서비스를 받으며 VVIP 행세를 제대로 했다.
그만큼 우리가 백화점 매출을 많이 올려 주기도 했다.
벌써 카드로 긁은 금액만 3억이 넘어갔다.
“다음에 또 찾아 주십시오. 언제든 연락 주시면 됩니다.”
“그래요. 오늘 고마웠습니다.”
김문석 사장은 마지막까지 배웅을 해 주었다.
어머니는 오늘 쇼핑이 매우 만족스러웠는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내가 아들 하나는 잘 두었구나. 내 평생 이런 쇼핑도 다 해 보고.”
“다음에는 외국이라도 같이 나가시죠, 어머니.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우리 회사 차원에서 전세기 새로 장만할 생각이거든요. 그거 타고 여행 다니면 아주 편하고 좋아요.”
“그래. 꼭 그렇게 하자꾸나. 그런데 너희들은 대체 언제 결혼할 거니?”
“예?”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어머니 덕분에 나는 순간 말을 더듬었다.
“진석아. 여자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만들면 안 돼. 우리 희진이가 얼마나 예쁘고 완벽하니? 이런 신붓감 구하기 힘들다.”
“어머니. 전 괜찮아요. 진석 씨가 좀 바쁜 사람이에요?”
“너도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그러다가 다른 여자가 확 채 가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진석이 너도 어서 정신 차리고 희진이 꽉 잡아. 이런 여자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
어머니가 오희진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미 우리 둘은 계약을 맺은 상태라 난 절대 딴 여자랑 살 수가 없다. 뭐, 계약이 아니더라도 오희진 말고 다른 사람을 곁에 둘 생각은 없지만.
“오늘은 이렇게 끝내지만, 또 얘기 나오게 하면 알아서들 해.”
결혼이라.
너무 미뤄 두긴 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이미 확인한 상태에서 굳이 더 미뤄 둘 필요가 있을까?
그전에 불편한 걸 먼저 해결해야겠다.
* * *
신화, KV, 그리고 J&H를 합친 거대 금융 그룹이 완성되면서 자연스레 KV 그룹 계열사들 모두 J&H로 합병되었다.
즉, 더 이상 이 땅에 KV 이름을 가진 회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대현 회장은 여전히 이 저택의 주인이었다.
비록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해도 그 명예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차에서 내려 그 저택 입구의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수행원들이 밖으로 나와 나를 안으로 인도했다.
과연 오 회장은 나를 어떤 모습으로 반길까?
“하하하-! 이게 누구야? 우리 이 회장 아니신가?”
오 회장은 껄껄 웃으며 아주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이미 그는 내가 오희진과 진지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곳에 내가 직접 찾아온 이유도 분명히 알고 있을 터.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회장이라니. 내가 자네한테 회장 자리 뺏긴 지가 언젠데. 자. 어서 앉게.”
오 회장 말고는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집사람도 데려올까 싶었는데, 일단 단둘이 얘기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 희진이 때문에 온 거지?”
“예. 알고 계셨군요.”
“자네와 희진이가 진지한 사이라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지. 이거야말로 로미오와 줄리엣 아닌가?”
“그런 셈이네요.”
오 회장의 눈을 보니 벌써부터 음흉함이 가득 묻어 있다.
자기 딸을 이용해 어떻게 이익을 챙겨야 할지 열심히 계산하는 듯 보였다.
“나는······.”
난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회장님. 저는 희진 씨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합니다.”
“으응?”
“그리고 회장님이 어떤 요구를 하시든 들어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뭐, 뭐야?”
“회사와는 별개의 일이라는 겁니다. 희진 씨와 결혼을 하기 때문에 앞으로 정중히 장인어른으로 모실 겁니다. 하지만 그 이상을 바라시면 안 됩니다.”
오 회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갔다.
결국 그는 상을 탕 치며 일어나 소리를 질러댔다.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지금······! 내가 딸을 이용해 자네 회사를 해 처먹을 인사로 보이나?”
“꼭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글러 먹었어. 대뜸 그런 소리부터 하면 내가 아이구 알겠습니다, 하고 숙일 줄 알았나? 아무래도 안 되겠네. 자넨 절대 희진이와 결혼할 수 없어!”
“반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설득은 하려 하겠지만, 끝까지 반대하신다면 저희 둘이 조촐하게 식을 올릴 겁니다.”
오 회장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하는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희진이는 내 딸이야!”
“딸이라고 해서 꼭 부모의 말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희진 씨도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인격체니까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오늘은 아무래도 날이 좋지 않은 듯하군요.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인사를 하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이 울려 댔다.
다름 아닌 오희진이었다.
-자기! 나한테 말도 없이 평창동으로 간 거야?
“응? 어떻게 알았어?”
-거기 일하는 아줌마들이 나한테 전화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저러다 누구 하나 피 볼 거 같다면서 말이야. 아빠랑 크게 싸우기라도 한 거야?
“그냥 의견이 좀 안 맞았어. 우리한테 원하시는 게 좀 많으신가 봐.”
뭐, 자극을 한 건 내 쪽이긴 하지만, 직접 나서지 않았어도 결말은 이렇게 될 게 뻔했다.
“아마 우리가 결혼하려면 양가의 허락을 받기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무슨 소리야? 설마 구질구질하게 단둘이서 결혼식 하겠다는 유치한 발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응?”
가끔 보면 아예 내 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웃겨. 난 그런 싸구려 결혼식은 사절이야. 대한민국 최고로 빛나게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아아. 그, 그래.”
-아빠는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처리? 누구를 처리해? 여보세요. 희진아?”
오희진은 그 말만 남기고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갑자기 문득 오한이 들었다.
오희진이 한번 화나면 엄청나게 무서운데······.
대체 뭘 하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