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161화 (161/200)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61화

“젠장. 이걸 안 할 수도 없고.”

“장연욱 회장 때문에 마음에 걸리십니까?”

“기분 더럽잖아. 꼭 그놈이 짠 판에 내가 놀아나는 것처럼 보이니까.”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일까?

“그리고 네 말대로 천하 그룹이 자동차 산업에 거금을 투자한다면 결코 무시 못 할 거야. 내가 저번에 그랬지? 내가 처음으로 형님이라 불렀던 놈이 장연욱이라고. 자존심 상하지만, 천하 그룹과 현광 그룹의 차이는 너무 벌어졌어.”

“그런데 자동차까지 밀리면 과거의 영광을 되살릴 수 없다는 거군요.”

“이건 현광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야. 돌아가신 아버지가 있을 때만 하더라도 천하 그룹은 감히 현광 그룹을 내려다보지 못했단 말이다. 예전처럼 천하 그룹을 발아래 두는 건 어렵겠지만, 적어도 밀리는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지.”

자존심이 걸린 일이다, 이건가?

“그리고 자동차까지 순위를 빼앗기는 건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다. 내가 천하 그룹을 싫어하는 이유는 따로 있어. 그놈들이 정부를 이용해서 얼마나 우리 그룹을 공격했는지 아냐? 우리 아버지가 징역살이를 하도록 몰고 간 놈들이 바로 천하 그룹이야.”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천하 그룹은 현광 그룹을 무너뜨리기 위해 군부 정권에 줄을 댔다. 그 결과 현광 그룹은 여러 공격을 받으며 추락했고, 왕좌의 자리를 천하 그룹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앙금이 남아 있어 정영준 회장이 천하 그룹을 좋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내가 장연욱이 짜 놓은 판에서 놀아나야 한다? 자존심이 쉽게 허락하지 않는군.”

그럴 만도 하다.

자기 아버지가 천하 그룹에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데, 그놈들 손에 놀아나는 걸 허락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이건 자존심을 내세울 문제가 아니다.

“숙인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이 패배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응?”

“자세를 낮추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군자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자존심이 상하고 속이 들끓을지도 모르나, 훗날을 기약한다면 지금 이 순간이 피가 되고 살이 될 겁니다.”

“군자 타령은. 네가 중공 빨갱이냐? 여기서 공자를 논하게?”

“중국 사람들은 문화 혁명으로 공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문화 대혁명으로 공자는 반동분자로 찍혀 그를 모시는 사당이 모택동에 의해 전부 철폐된 일이 있다. 그래서 공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중국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 할 정도였다.

“됐다. 네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잘 알아.”

“회장님이 결단을 안 내려 주시면 저도 붕 뜨는 겁니다. 돈 되는 곳에 확 팔아 버릴 수도 있어요.”

“지금 협박하냐?”

“예. 신화 금융까지 삼켰으면 이제 좀 개겨도 되지 않습니까?”

내 당돌한 대답에 정영준 회장은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야. 지나가는 개새끼가 비웃겠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 똑바로 뜨고 개긴 놈이 이제 와서 뭐?”

“그럴 리가요. 제가 얼마나 회장님에게 말조심을 했는데요.”

“에라. 그때 내가 녹음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뻔뻔한 새끼.”

반응은 저래도 내 말이 통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때를 기다리란 말이지······.”

“상대가 무려 천하 그룹입니다. 지금 당장 거길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도 좀 쫄린 상태고요.”

“왜? 장연욱 그 새끼 만나고 오니까 아랫도리가 쪼그라들기라도 했어?”

“아주 대놓고 저희 회사를 짓밟아 버리겠다고 경고하는데 어떻게 안 쫄겠습니까? 천하 그룹이잖아요. 거기서 작정하고 털면 솔직히 없는 먼지도 나오게 되어 있죠.”

내가 외국에서 회사 차리고 한국은 쳐다보지도 않았더라면 천하 그룹이 별로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장연욱 회장이 내게 뭐라고 해도 그냥 개 짖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터. 그러나 대한민국은 천하 그룹의 홈구장이고, 난 그 홈구장에서 조금씩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다.

당장 현광 그룹도 조심하는 마당에 이제 막 금융업을 먹기 시작한 내가 천하 그룹과 싸운다? 애초에 페더급과 헤비급의 싸움이라 싸워 보기도 전에 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처럼 저도 가능성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너 종교가 뭐냐? 왜 짬뽕으로 자꾸 미담이 처나와?”

“중요한 건 차곡차곡 쌓아 나가다 보면 언젠가 천하 그룹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겁니다.”

내 끈질긴 설득에 결국 정영준 회장도 두 손을 들었다.

“좋아. 한번 해 보자. 어차피 계속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정영준 회장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현광 자동차는 잠재력이 풍부한 곳이다. 지금은 휘청거릴지 몰라도 금방 다시 회복하고 일어날 게 뻔했다. 그러기 전에 공격을 해야 승산이 있다.

어쩌면 장연욱 회장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리를 도와주려고 여러 빈틈을 만들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신호 주면 그때 다 넘겨.”

“어디로 넘길까요?”

“현광 건설 지주 회사에 넘기면 돼.”

“어떻게 할 계획이신데요?”

“그냥 지켜만 봐라. 현광 자동차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다 내 손바닥 위에 있어. 그놈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게 두들겨 팰 생각이다. 너도 지켜보면 알 거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구태여 말하게 할 생각은 없다.

“좋습니다. 대신, 현광 자동차 지분은 후한 값에 가져가실 거죠?”

“날강도 같은 놈. 저번에 얘기 다 끝낸 거잖아.”

“예. 아주 비싼 값에 지분을 넘기고 현광 자동차 인수하실 때 떨어지는 콩고물을 좀 먹는다고 했죠.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다른 방법?”

“예. 지분을 넘기지 않고 그냥 제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필요하실 때 제가 손만 들어 드리는 거죠.”

언뜻 보면 아주 좋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정영준 회장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런 음흉한 놈. 지금 누굴 속여 먹으려고? 하다 하다 현광까지 넘보는 거냐?”

“사람 일은 모르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을 땐 불가능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그룹을 맡게 되면 꼭 특이점이 오더라고요.”

“그 지분, 내가 꼭 챙겨야겠네. 아주 가격 올리려고 지랄을 다 해요.”

“제가 시험에 들지 않게 좋은 가격을 책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웃으면서 얘기하고 있지만, 나도 장연욱 회장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천하 그룹처럼 나도 현광 자동차가 얼른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래야 나도 주워 담을 게 많이 생길 테니까.

“회장님과 얘기를 오늘 잘 끝냈으니, 곧바로 장연욱 회장을 만나러 가야겠군요?”

“뭐? 그 자식을 왜?”

“우리 도와주겠다고 나선 사람이잖아요. 이왕 도움받는 거 화끈하게 받을 생각입니다. 회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만, 제가 앉아서 기다리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뭐라도 해야겠습니다.”

“아니. 그게 뭔······.”

“자세한 계약 사항은 회사를 통해 알려 주세요. 그럼, 전 이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나는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영준 회장은 그저 멍하니 내가 나가는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 * *

천하 그룹 본사에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이 세상은 마치 다 자기 거라는 듯 높은 건물 위에 세워져 있는 천하 그룹의 간판은 서울에서 가장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권오준 대표는 우리 회장님 기죽으면 안 된다고 동원 가능한 모든 경호 인력을 투입해 흡사 대통령을 경호하는 듯한 광경을 연출했다.

그렇게 줄줄이 경호 차량들이 VIP 전용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이쪽으로 오시죠, 회장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은 친절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고, 나는 그들의 인도에 따라 본사에 들어갔다.

발을 들였을 때부터 대접받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고 싶었는지, 화려하게 치장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널찍한 공간에 들어가 꼭대기 층으로 이동했다.

곧장 회장실로 향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장연욱 회장이 아니었다.

“이렇게 단둘이 뵙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반갑습니다. 장선욱 부회장입니다.”

분명 만나기로 한 사람은 장연욱인데, 날 기다리고 있는 건 장선욱이라.

무슨 의도일까.

“반갑습니다, 부회장님. 그런데 회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오늘 제가 뵙기로 한 분은 부회장님이 아닐 텐데요?”

장선욱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회장님을 대신한 지 오래됐습니다. 그분께 하실 말씀이 있다면 저한테 하셔도 됩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한 번 더 찔러 봤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부회장님께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표정 변화가 없는 장선욱이었다.

대단하다.

과연 천하 그룹의 후계자는 다르다는 건가?

오히려 그는 인상을 찡그리기보다는 유하게 받아들였다.

“이런. 역시, 저는 아직 급이 안 돼서 두 분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군요.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회장님이 오실 겁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부회장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오늘은 그러지 못하는 걸 이해해 주십시오.”

이 정도면 나름 부드럽게 끝낸 건가?

부회장이 나가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장연욱 회장이 들어왔다.

왜 부회장을 먼저 들여놓은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싸우기도 전에 벌써 무릎 꿇으려고 왔소?”

그는 내가 항복하려고 달려온 줄 아나 보다. 하지만 내 사전에 항복이란 없다.

“아니요. 회장님에게 말씀드릴 것이 있어 귀한 시간을 빼앗게 되었습니다.”

“좋소. 앉으시오.”

“예. 그리고 말씀은 편하게 해 주십시오, 회장님.”

“그럴까? 안 그래도 불편한 참이긴 했지. 허허. 차라도 한 잔 가지고 오라고 할까?”

“아닙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부회장에 대한 이야기는 벌써 저 멀리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회장님. 저와 J&H를 아주 뭉개 버리기 위해 잔뜩 벼르고 계신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 휴전 좀 해 주시죠?”

“후후. 저번에는 백만 대군이 몰려와도 싸울 수 있을 것처럼 말하더니?”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회장님의 적은 제가 아닙니다. 공공의 적이 하나 생겼으니, 그걸 먼저 갈아 치운 다음에 알아서 하시라는 겁니다.”

웃음기가 싹 가시고 장연욱 회장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무슨 뜻이지?”

“현광 자동차 곳곳을 송곳으로 잘 뚫어 놓으셨더군요.”

현광 자동차 이야기에 눈썹을 꿈틀거린다.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뭔지 압니다. 현광 자동차가 내부 분열로 무너지기를 원하시겠죠. 그래야 천하 그룹이 자동차 부문에서 순위권을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잘 아는군.”

“예. 그래서 이왕 송곳으로 찌르신 김에, 아예 드릴로 뚫어 달라고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으응? 드릴?”

내 말이 웃긴 모양인지 장 회장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정 회장이 자넬 보냈나?”

“그 회장님 자존심 하나는 세계 정상급이라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해. 그 영감이 자네를 나한테 보냈을 리 없지. 그런데 갑자기 왜?”

“저와 현광 건설이 손잡고 있다는 건 잘 아실 테고, 저 역시 현광 자동차가 얼른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으면 합니다.”

“정영준 회장 잘되라고 도와주는 건가?”

“정영준 회장이 잘되어야 저도 이익을 많이 볼 테니까요.”

장연욱 회장은 잠시 손을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고 달려온 비서에게 갑자기 술을 시켰다.

“술이랑 가벼운 안주 좀 가져와.”

그러고는 내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진득하게 앉아서 대화 좀 나눠 보자고.”

오늘 일찍 집에 들어가기는 틀린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