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60화
“오신다는 언질을 주셨으면 미리 준비를 했을 텐데요.”
“내가 원래 조용히 움직이는 걸 좋아해서 말이오. 민폐를 끼쳤다면 사과드리겠소.”
“아닙니다, 회장님.”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보니 장연욱은 아주 정정해 보인다. 과연 그가 무슨 의도로 여기까지 나타난 것일까.
“J&H. 범상치 않은 기업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 정도로 발전을 이뤄 낼 줄은 몰랐소. 다시 한번 축하드리오.”
“감사합니다.”
“내가 그 나이 때는 아버지 밑에 들어가 일을 배우고 있었지. 딱히 큰 성과를 낸 적도 없고. 만약 이 회장이 우리 천하 그룹의 후계자였다면 세계 초일류 기업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르오.”
훈훈한 분위기의 연속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J&H는 곧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게 될 겁니다.”
“그 말은 우리 천하 그룹도 뛰어 넘겠다는 건가?”
날 바라보는 장연욱 회장의 눈동자가 매서워졌다.
하지만 난 지지 않고 받아쳤다.
“예. 언젠가 천하 그룹도 뛰어넘는 기업을 만들어 낼 겁니다.”
“당돌하군. 그게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건방진 소리인지 아시는가?”
눈동자와 더불어 목소리도 한껏 날카로워졌다.
예전이었으면 모를까, 지금은 저런다고 겁먹지 않는다.
“회장님이 천하 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셨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회장님을 두고 손가락질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내세우신 비전은 결코 이뤄질 수 없다고 욕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걸 해내시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도 그런 회장님의 길을 본받아 J&H의 비전을 이뤄 낼 겁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 그때와 지금은 시대가 달라. 환경도 다르고. 이미 세계는 벌써 초일류 기업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어!”
“과연 그럴까요? 회장님께서는 매번 임원들에게 위기를 강조하지 않으십니까? 천하 그룹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항상 깨워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회장님도 잘 알고 계시다는 거겠죠.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아무리 초일류 기업이라도 실수 한 번에 무너지고 경쟁자들에 의해 모든 걸 빼앗긴다는 것을요.”
사람들은 대기업이 영원할 거라 믿는다. 그러나 세상은 빠른 변화를 보여 주고 있고, 그 변화에 반응하지 못하면 도태되어 사라지고 만다.
점점 세상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기업들이 탄생하고 있으며, 그 기업들의 성장 속도는 예전 기업들보다 훨씬 더 빠르다.
“J&H를 보십시오. 이 짧은 시간에 어마어마한 성장을 이뤄 냈습니다. 미국의 스타트업 기업들도 단기간에 큰 성장을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기업이라고 해서 그들을 넘어설 수 없다는 법은 없습니다.”
장연욱 회장은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땐 호탕한 웃음소리가 함께 터져 나왔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나는 그저 이 회장이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있나 궁금해서 한번 떠본 것이오. 역시, 내 예상대로 엄청난 패기를 가졌구려. 젊음이 좋긴 좋소. 새로운 것을 꿈꿀 수 있다니.”
“회장님도 아직 한창이지 않으십니까?”
“나? 당장 내일 안 죽는 게 다행스러울 정도지. 겉으로는 내가 정정해 보여도, 이미 늙을 대로 늙은 몸. 아무리 돈이 많아도 건강을 살 순 없더군.”
그냥 던져 본 말인가, 아니면 진심인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진짜 겉으로 보면 장 회장은 아주 정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기업인일수록 항상 직원들에게 충격을 줄 만큼의 목표가 있어야 하오. 난 그 철학을 지금까지 지켜왔소. 그런데 오늘 보니, 이 회장이 나보다 더한 사람 같구려.”
“감히 회장님과 절 어떻게 비교하겠습니까.”
“후후. 겸손은 됐소.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경청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 회장이 날고 기어도 천하 그룹을 넘는 일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게 진짜 장 회장의 본심인가.
“신화 금융을 삼킨 방법은 매우 기발했소. 그러나 똑같은 수법으로 천하 그룹을 공략할 순 없을 것이오.”
“정말 그럴까요?”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천하 그룹은 이 나라를 지배할 것이고, 모든 국내 기업들은 그 밑에 거할 수밖에 없소.”
그의 입에서 이 나라를 천하 그룹이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장 회장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기업이 한 나라를 지배한다라.
아무리 천하 그룹이라도 이 나라 전체를 지배하는 건 아니다.
“회장님의 말씀을 뼈에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틀렸다는 걸 꼭 보여 드리죠. 가능하다면 회장님이 살아 계실 때 말입니다.”
천하 그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천하 전자는 연간 70조 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인다.
전문가들은 이대로 천하 전자가 발전을 거듭하면 100조 원이 훌쩍 넘는 돈을 벌어들일 거라고 예측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는 천하 전자이지 않던가.
하지만 난 그것마저도 금융업이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것이다.
장연욱 회장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지독한 놈인지 보게 되시겠구려. 난 천하 그룹의 아성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있으면 절대 가만 놔두지 않거든.”
“아까 회장에서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고 느꼈습니다. 벌써 행동에 나서셨다는 것을요.”
“오-. 대처법은 생각해 두었고?”
“지금부터 열심히 생각해 봐야죠. 시시한 상대가 되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하하! 정말 보면 볼수록 이 회장은 참 마음에 드는구려. 나중에 제발 봐달라고 빌지나 마시오.”
싱겁다면 싱거운 만남이었다고 해야 할까.
장 회장은 볼일을 다 봤다는 듯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왠지 오늘은 서로를 염탐하기 위해 만난 자리 같았다.
* * *
“잘 만나고 오셨습니까?”
“그래. 아주 젊은 사람이 패기가 넘쳐 나.”
장 회장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천하 그룹의 부회장인 장선욱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아주 건방져.”
“그 정도입니까?”
“감히 천하 그룹을 뛰어넘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큰소리를 치더구나. 그래서 결심이 섰다.”
“어떤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이진석 저 친구를 아예 사장시켜 버려야겠어.”
장연욱 회장의 말에 장선욱은 별로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눈앞에 거슬리면 치워 버리는 것이 천하 그룹의 전통이니까.
“저런 놈은 그냥 놔두면 안 돼. 단순히 건방지기 때문이 아니다. 이진석 저 젊은이는 자기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췄어.”
하지만 장연욱 회장이 말하는 이유가 장선욱을 놀라게 만들었다.
“평가를 높이 하시는군요.”
“그래. 내 생전 저런 놈은 처음 본다. 내가 이제까지 본 놈들 중 저놈만큼 능력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게다.”
다시 한번 놀란 장선욱은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맞는 거겠죠.”
장선욱은 장연욱의 성공 비결을 알고 있다.
미래를 바라보는 통찰력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의 그릇을 가늠하는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 그러한 능력으로 지금의 천하 그룹을 만들지 않았던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저 친구가 우리 천하 그룹을 넘어설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만일 내가 죽고 나서도 J&H가 건재하다면 넌 경각심을 갖고 괜한 짓 하지 말아라.”
“괜한 짓이요?”
“신화 금융이 어떻게 저놈에게 넘어갔는지 보지 않았느냐? 괜히 격차를 벌리겠다고 무리하지 말라는 소리다.”
조언 같아 보였지만, 장선욱은 느낄 수 있었다.
장연욱이 은연중에 자신과 이진석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진석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것이 장선욱 부회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천하 그룹을 위해서라도 J&H는 한번 즈려밟아 줄 필요가 있어. 5년도 안 돼서 금융업 1위 자리를 먹은 놈이다. 만약 다른 쪽까지 눈독을 들이게 된다면 분명 그 분야에서도 큰 성공을 이뤄 내겠지. 저런 황금손을 가진 놈들은 브레이크를 밟아 줄 수 있을 때 밟게 해야 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장선욱은 천하 그룹 차기 회장으로 이미 낙점을 받은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제 아버지가 평생 어떻게 회사를 키워 왔는지 옆에서 지켜봐 왔다.
매번 은둔 생활을 하는 아버지의 성격과는 정반대이기는 하나, 한 가지는 비슷한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장애물이 되는 상대를 거칠고 잔인하게 밟아 버린다는 것이다.
* * *
3개의 금융 기업이 하나로 통합을 하면서 시장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대로 J&H에 의해 대한민국 금융업이 전부 싸 먹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개미들부터 시작해 큰손들까지 하나둘 J&H로 돈을 옮기고 있었다.
또한 J&H의 주가는 쉬지 않고 상한가를 쳤으며, 하루가 멀다고 최고가를 갱신했다. 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고민하지 않고 바로 J&H에 투자를 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각 금융 기업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고객들 때문에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나는 더욱 공격적으로 고객들을 유치할 수 있게 각종 파격적인 혜택들을 마련했다.
그 중점에는 카드사가 있었는데, 만일 J&H 증권의 고객이면 다른 카드사들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을 받게 하여 고객들을 끌어모았고, 자연스레 나는 J&H의 이름을 건 은행을 출범할 준비에 돌입했다.
증권사, 카드사, 그리고 은행까지 J&H가 대다수 점유율을 차지하게 되면 그건 곧 대한민국 경제를 꽉 쥐고 있는 것과 진배없을 것이다.
“아주 다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먼.”
오랜만에 만나는 정영준 회장은 입가에 미소가 만연했다.
약속대로 내가 신화 금융이 갖고 있는 현광 자동차 주식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현광 자동차 주식뿐만이 아니라 신화 금융 전체를 빼앗아 올 줄이야.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네가 내 적이 아닌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양반이었나?
괜히 낯이 뜨거워졌다.
“준비는 다 되셨겠죠?”
“현광 자동차를 다시 품고 새로운 현광 그룹을 탄생시킬 준비만 하고 있다.”
“그 말씀은 확실하다는 것이군요.”
“그래. 생각보다 현광 자동차에 빈틈이 많아.”
“그 빈틈이 왜 생겼는지는 아시고요?”
그 말에 정영준 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저도 들은 얘기입니다. 확실하지 않고요.”
“말해 봐. 뭔데?”
“신화 그룹의 신 회장이 그러더군요. 장연욱 회장이 현광 그룹을 흔들어 놓으려고 일부러 현광 자동차 쪽을 건드려 놨다고요.”
“뭐야?!”
생각 이상으로 정영준 회장은 큰 목소리로 화를 냈다.
“신 회장이 그렇게 말했다고?”
“예. 천하 그룹이 현광 자동차 구석구석을 건드려 놨다고 했습니다.”
“그 새끼들이 갑자기 왜?”
“그야 당연히 자동차 부문에서 현광 자동차를 제치기 위함이죠. 회장님이 이대로 현광 자동차를 공격하면 당분간 시끄럽지 않겠습니까?”
정영준 회장은 입술을 꾹 깨물며 중얼거렸다.
“장연욱 이 개새끼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니야. 신 회장 그 늙은이는 절대 허튼소리 안 해. 그리고 나도 뭔가 이상하긴 했었어. 알고 보니 천하 그룹이 개입되어 있었던 거네.”
정영준 회장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천하 그룹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내 생각이 틀린 모양이다.
두 가문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