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57화
J&H 본사를 나온 황원호 국장은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마음껏 누리던 평화로운 일상이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놈의 돈이 뭔지.
독사의 속삭임인지도 모른 채 홀라당 넘어가 버려 결국 여기까지 일이 번지고 말았다.
뉴스를 통해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와이프는 이혼 소송을 걸었고, 양육권까지 전부 다 빼앗아 갈 작정이었다. 또한 양육비로 엄청난 돈을 요구할 게 뻔했기 때문에 그는 머리가 띵하게 아파 왔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건가······.”
한쪽은 아예 선을 잘라 버렸고, 다른 한쪽은 그나마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겠노라 말했다.
둘 다 모두 신뢰 못 할 놈들이기는 하나, 황 국장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제길. 그냥 은퇴할 때까지 조용히 살았어야 했는데······!”
후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는 결국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 * *
[황원호 국장 모든 잘못 시인.]
[신화 그룹의 직접적인 개입 있었다!]
[황원호 국장 억대 뇌물 인정. 하지만 그것 때문에 수사를 안 한 것이 아니다?]
[또다시 열리는 신화 그룹 게이트?]
해맑은 아침부터 터져 나오는 속보에 신용일 부회장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기, 김 비서. 저거 대체 어디서 나온 뉴스야?”
“검찰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뉴스라고 합니다. 황원호 국장이 어제 오후 비밀 계좌를 들고 자수를 했답니다.”
“뭐야?! 경호원들한테 그 새끼 감시 똑바로 하라는 얘기 안 해 놨어? 저놈이 검찰청으로 가는 걸 막았어야 할 거 아니야!”
신용일 부회장은 다급하게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언론에다 뿌려! 신화 그룹은 이번 일과 아무 일도 없다고 기사 내라고 해! 그리고 검찰에도 압력 넣어! 이 사건 크게 만들지 말고 조용히 처리하라고!”
하지만 전화를 넣는다고 해서 과연 검찰이 가만있으려 할까.
황원호 국장이 비밀 계좌를 들고 갔다는 건 신화 그룹이 송금해 준 내역이 있다는 뜻인데, 그건 빼도 박도 못 하는 증거물이라 수습이 불가능할 것이다.
“하-. 이 개새끼가 다 같이 죽자고 검찰청에 달려갈 줄이야.”
그런 놈을 믿고 돈을 준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지금 난리 피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회, 회장님.”
“앉아라.”
“부르셨으면 제가 바로 달려갔을 텐데요.”
“앉으라고.”
갑작스러운 신 회장의 방문에 놀란 신용일은 얼른 착석을 했다.
저렇게 제 아버지가 차분한 목소리를 낼 때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무서웠다.
“뉴스는 봤지?”
“예······.”
“내가 잘 타이르라고 했던 황 국장 그놈이 자숙하기는커녕 아예 우리 등에다 칼을 꽂았다. 어떻게 생각하냐?”
“죄송합니다.”
“넌 할 줄 아는 말이 죄송하다는 것밖에 없냐?”
신 회장은 담배를 입에 물고 말없이 피우기만 했다.
한가롭게 담배 피울 시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담배 두 개피를 다 피우고 나서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졌다.”
“예?”
“우리가 이진석, 그놈한테 졌다고. 완전히 외통수야. 내가 검찰 쪽에 알아보니, 황 국장이 가져온 계좌가 우리 쪽 라인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더구나. 이건 검찰총장한테 압력 넣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야. 더군다나 황 국장 그 새끼는 자긴 이 돈을 한 푼도 쓴 적이 없고 신화 그룹이 협박을 하면서 돈을 넘겼기 때문에 자수를 한 거라고 밝혔다더구나.”
“아니. 그런 거짓말을 대체 누가 믿는다고······!”
“누가 믿는 게 중요하냐? 결국 그놈이 자수를 했다는 게 중요한 거야. 조만간 검찰에서 압수수색을 시작할 게다. 신화 금융은 영업 정지 수순을 밟게 될 거고.”
신 회장이 두 손을 들었다는 건 정말 막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너 감옥 들어가기 싫지?”
순간 오싹함을 느낀 신용일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회장님. 아니.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감옥은······.”
“돈 준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그럼, 이 늙은 애비가 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게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언제 재벌 일가가 감옥에 직접 들어간 적이 있습니까? 대부분 머슴들이 주인을 대신해 들어갔죠.”
머슴은 주인을 대신해 감옥에 들어갔다가 한 번에 정산을 받는다.
누가 감옥 가는 걸 좋아할까?
하지만 2년 동안 감옥을 가는 대가로 적게는 수십억, 많게는 수백억까지 벌어들일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나도 대타를 뽑으려 했다. 그런데 계좌의 출처가 너무 명확해. 완전히 네 쪽으로 라인이 잡혀 있어.”
“그럼 제가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겁니까?”
“뭐, 집행 유예로 풀려나겠지. 장사 하루 이틀 하냐? 그런데 대타로 마무리시키기에는 사안이 좀 심각해. 청와대에서도 못을 박았다. 남에게 폭탄 돌릴 생각 하지 말라고. 황 국장 그놈이 네 이름을 거론했어. 네가 준 돈이라고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황 국장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그놈이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신용일은 꼼짝없이 재판을 받고 구속을 당해야 할지 모른다.
“세상이 옛날만큼 허술하지 않아. TV에 나오는 얘기만 듣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거다. 몇 년 전만 해도 국민들은 TV만 보고 미국이랑 FTA 맺으면 다 뒤지는 줄 알고 지랄 발광을 했어. 그런데 지금은 어떠냐? 더는 국민들이 멍청하지 않아. 그들도 듣는 귀가 생겼고, 넓게 보는 눈을 가지게 됐다. 우리가 억지로 숨긴다고 해서 숨겨질 일이 아니라는 거지.”
신 회장의 통찰력은 날카로웠다.
인터넷과 핸드폰의 발전으로 세상은 더 이상 TV 속에 나오는 뉴스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점점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예전처럼 재벌들이 언론 플레이로 법망을 피해 가는 건 어려워지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이진석이랑 쇼부를 보는 수밖에.”
“이진석이랑요?”
“황 국장이 비밀 계좌 들고 검찰청 뛰어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이진석이랑 대화 끝났으니까 그런 거야. 네가 황 국장한테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진석이 분명 그놈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줬을 거다. 그러니까 바로 통장부터 바치지 않냐?”
신용일은 자신의 명백한 실수임을 깨달았다.
자기를 제발 살려 달라고 빌러 온 황 국장을 꾸짖고 내쫓을 게 아니라 적당히 다독여 주었다면 지금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게 너와 이진석의 차이지.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냐? 너와 그놈은 그릇부터가 달라. 태생은 중요하지 않다. 장군이 될 놈은 천민으로 태어나도 장군이 되는 거고, 뭣도 안 될 놈은 왕의 자식으로 태어나도 그냥 별 볼 일 없는 놈이 되는 거야.”
신용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신 회장의 어투가 꼭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놈으로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진석이랑 쇼부를 봐라. 차라리 재영이를 그놈한테 던져 줘.”
재영이?
갑자기 아들 녀석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걸까?
“이진석이 재영이 그놈이랑 원한 진 게 있지 않냐. 네가 정 감옥 가기 싫거든 이진석이랑 쇼부를 봐. 너 대신 재영이를 감옥 보내겠다고.”
“아버지. 재영이는 아버지의 손주입니다!”
“그딴 놈이 내 손주라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내가 총이 있었으면 그놈 대가리에 쏴 버렸을 거야. 그놈은 내 손주가 아니다. 그리고 너도 잘 생각해. 네가 다 뒤집어쓰고 가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하지만 재판 질질 끌면서 몇 년 허비하겠지? 그동안 회사 일은 뒷전일 테고. 난 그 꼴 못 봐.”
“그 말씀은 절 쫓아내시겠다는 겁니까?”
“회사를 위한 일이다. 둘째를 불러서 그 자리에 앉힐 생각이다. 그리고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어렵사리 동생에게서 지켜 낸 회사가 다시 넘어가게 생겼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지독한 영감이다.
죽는 날까지도 저 늙은이는 회사를 갖고 협박을 해 댈 게 뻔했다.
“결정은 네 몫이다. 난 더 이상 참견 안 하련다. 회사를 이진석한테 넘겨줄지, 아니면 끝까지 개길지, 네가 선택해라.”
신 회장이 나가고 나자 신용일은 홀로 남게 되었다.
그는 벌벌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어쩌면 제 아들을 희생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 * *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보면 몰라?”
황 국장이 검찰에 가서 다 불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나한테 전화를 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신용일 부회장은 며칠을 버티다 내게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못 본 사이에 참 많이 수척해진 듯하다. 그리고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닌지 술과 가벼운 안주가 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내가 신화 그룹의 장남으로 태어나면서 단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어.”
“어떤 기분을 말씀하시는 거죠?”
“무력감.”
“그건 보통 사람들이 종종 느끼는 거 아닙니까.”
“그래. 평민들이야 그렇겠지. 그런데 물고 태어난 수저가 다이아인 새끼들은 그런 걸 느껴 볼 새가 있기나 하겠냐? 돈 펑펑 쓰느라 바쁘지.”
이런 얘기를 하려고 온 건 아닐 것이다.
나는 이 불편한 자리를 오래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용건을 말씀하시죠, 부회장님.”
“줄게.”
“어떤 것을요?”
“뭔지 다 알면서 뭘 물어봐? 신화 금융이 갖고 싶은 거 아니야? 그거 준다고.”
주먹을 꽉 쥐고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내색하지 않았다.
“그게 전부입니까?”
“대신 황 국장 입 좀 닫게 해 줘라.”
“부회장님 이름이 나온 걸 알고 계시는군요. 그걸 제가 무슨 수로 막습니까? 이미 검찰에 다 증언까지 했는데.”
“네가 컨트롤하고 있다는 거 다 안다. 황 국장이 지금이라도 진술 번복하면 돼. 내가 이 나이 돼서 감옥에 가야겠냐? 부탁한다.”
“저도 그렇게 해 드리고 싶지만,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야당이 키를 잡고 있다는 거. 국민 여론이 너무 뜨거워서 여당과 청와대도 못을 박은 것으로 아는데요?”
“알아. 근데 그게 꼭 나일 필요는 없지.”
재벌들의 못된 버릇이 여기서 또 나오려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한테 덮어씌우겠다는 겁니까?”
“항상 하던 방법이지.”
“이번에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내 아들이라면 어때?”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누구요?”
“내 아들 재영이. 그놈이 대타로 설 거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 사달이 난 게 다 그놈 탓이잖아. 그러니 죗값을 치러야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런 말을 하다니.
자기 자신을 위해 아들을 팔겠다는 건가?
도대체 이쪽 세계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뭘 그렇게 봐?”
“설마 아들을 내세울 줄은 몰랐거든요.”
“이 정도는 되어야 끗발이 먹힌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임원 하나 갖다 놓는다고 해서 야당이랑 검찰이 가만있으려 하겠냐? 청와대가 저렇게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마당에.”
“하지만······.”
“더는 말하지 마. 그룹 차원에서 결정한 일이니까. 어차피 그놈도 정신 한번 차려 봐야지. 군대도 안 다녀온 놈인데 옥살이는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러니까 이제 받아.”
“안 받으면요?”
“네가 뭐가 아까워서 안 받겠냐? 금융도 내주겠다는데. 네가 싫어하는 재영이도 제물로 바치고. 그쯤 하지? 더 하겠다고 하면 그땐 정말 진흙탕 싸움 되는 거야.”
나도 안다.
이미 게임은 내 승리로 끝났고, 여기서 더 질질 끌어 봤자 좋을 건 없다.
그저 이들이 내린 결정이 참 신선하다고 해야 할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수준이 아니니까요.”
“그래. 세세한 조건 따지려면 시간 좀 걸리겠지. 대신, 협상하기 전에 야당 새끼들 브레이크부터 걸어 놔. 그러다 그 새끼들이 판 엎어 놓는다.”
“그러죠.”
신화 금융이 거의 내 손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