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50화
증권맨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천하 그룹 다음으로 그 규모가 크다는 신화 금융이 파산할 수도 있다는 소문.
당연히 허튼 찌라시에 불과하다며 다들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정황들이 포착되고 있었다.
“신화 금융이 뻘짓하다 좆 됐다는 게 사실이야?”
“이번에 미국 신용등급 내려가면서 우리나라 주가도 박살이 났잖아. 그런데 기억나지? 신화 금융이 저번부터 옵션 낀 상품들을 엄청나게 팔아넘긴 거. 그게 지금 되돌아오는 거야.”
“나도 들었어. 지불해야 할 금액만 4조 원이 넘는다고 하던데?”
“어휴. 병신들. 뭘 어떻게 하면 옵션으로 4조 원을 날리냐?”
“거기 사장이 신화 그룹 회장 손주라고 했었나? 내 언젠가 그놈이 사고 칠 줄 알았지.”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화 금융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천하 금융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곳이 신화 금융이지 않던가.
이런 소식은 외부에도 퍼져 뉴스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신화 금융이 파산 위기에 처했습니다. 만약 3일 뒤까지 주가가 회복되지 않으면 신화 금융은 4~5조 원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데요? 이런 소식이 퍼지면서 신화 금융 고객들은 전부 돈을 회수하는 등, 현재 아비규환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신화 금융이 파산하고 뒤이어 신화 그룹까지 흔들리다 쓰러질 수도 있다는 뉴스를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채널들. 당연히 저들은 J&H에서 돈을 받아 신나게 떠들어 대는 것일 게 분명했다.
신화 금융 하나가 무너졌다고 해서 어떻게 신화 그룹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신화 그룹에 큰 타격을 입힌 건 맞으니까.
“씨발! 그 새끼 잡아 오라는 말을 내가 몇 번이나 해야 돼!”
이성을 잃어버린 신재영 사장은 전화기를 비서실장에게 집어 던졌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벌써 집은 깨끗하게 비운 상태고,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정도로 말끔하게 흔적을 지웠다는 건 누군가가 조직적으로 김도형 과장을 도운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넌 뭐 하는 새끼야? 할아버지가 널 나한테 붙였다는 건 일을 똑바로 시키려 한 거 아니었어? 근데 고작 과장 따위 하나 못 찾아서 쩔쩔매?”
“······.”
비서실장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신화 그룹도 이런 일을 대비해 처리조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들의 실력은 당연히 일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도형 과장을 아무리 찾아다녀도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장 나가서 찾아 와! 어디 몇 군데 부러뜨려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오라고!”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이 나가고 나서 신재영 사장의 화살은 이제 임원들에게 향했다.
“다들 해결법은 찾아 왔겠지?”
그들의 표정만 봐도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사장님. 방법이 없습니다. 3일 뒤에 돌아오는 옵션 만기일. 막을 방법이 없어요.”
“당신 나가.”
“예?”
“그따위 말 할 거면 나가라고. 이런 일을 대비해서 당신들을 임원에 앉혀 놓은 거야. 그런데 뭐? 막을 방법이 없어? 그럼 방법을 찾으면 될 거 아니야!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야, 당신들은!”
막무가내로 방법을 찾아 오라고 소리치는 신재영의 발악은 얼마 못 가 멈췄다.
“이런 한심한 새끼.”
“아, 아버지?”
“모두 나가. 이 병신이랑 단둘이 얘기할 게 있으니까.”
임원들은 신용일 부회장의 등장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나가자 신용일은 애써 참고 있던 화를 폭발시켰다.
그는 냅다 재떨이를 던졌는데, 신재영이 반사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머리를 크게 다쳤을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 난 너 같은 병신을 아들로 둔 적이 없다!”
“······.”
“다른 거 할 생각 하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라고 했지? 그럼 알아서 신화 그룹이 네 손에 들어올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넌 대체 대가리에 뭐가 들었기에 되지도 않는 일만 벌이고 있어?!”
“제가 속은 겁니다, 아버지. 저는 정말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속은 것뿐입니다! 거기다 임원들이 일을 너무 못하니까 이런 일을 당한 거예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장남을 보고 처음으로 살의를 느낀 신용일이었다.
만약 옆에 골프채가 있었다면 저 멍청한 놈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을 것이다.
“됐다. 내가 너 같은 놈이랑 무슨 말을 섞겠냐? 당장 나가.”
“예?”
“이제 넌 신화 금융 사장 아니야. 아니. 넌 신화 그룹의 일원이 아니다. 당장 나가서 집안에 처박혀 있어!”
“아버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전 그냥 열심히 하려고 했을 뿐인데······.”
“입 닥쳐! 넌 집안 말아먹을 새끼야. 네 발로 안 나가면 끌고 나가게 해 주마.”
신용일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목청을 높였다.
“사장실로 들어와서 이 병신 새끼 데려가! 집에 가둬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해!”
그러자 경호원들이 우르르 들어와 신재영의 양팔을 붙잡았다.
“이, 이거 놔! 내가 누군지 알고! 당장 안 놔?”
신용일은 그런 아들 녀석의 뺨을 후려갈기며 소리쳤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조용히 끌려 나가기나 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뺨을 맞아 본 신재영은 큰 충격에 조용히 끌려 나갔다.
신용일은 사장실에 있는 위스키를 벌컥 들이켠 뒤 화를 천천히 삭였다. 그러고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임원들 전부 사장실로 모이라고 해.”
신용일 부회장이 술잔을 앞에 두고 잠잠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임원들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두 앉아.”
“예, 부회장님.”
곧 있으면 차기 회장이 될 사람이다.
임원들은 바짝 긴장한 채 각자 자리에 앉았다.
“이거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부회장의 물음에 누구도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왜 다들 말이 없어?”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저희도 도저히······.”
“후-. 씨발. 완전히 제대로 말아먹었네.”
그는 잔을 한 번 더 술로 채운 뒤 말했다.
“내 아들놈이 멍청한 놈이긴 하지만, 갑자기 그 많은 옵션 상품을 만들어서 팔아 버리면 막아야 하는 게 임원들의 도리 아닌가?”
“아이고. 부회장님. 말도 마십시오. 저희가 절대 안 된다며 막아 봤지만, 신재영 사장이 끝까지 밀고 갔습니다.”
임원들이 죽는소리를 하자 신 부회장은 술잔으로 상을 내리쳤다.
“그럼 나한테라도 보고를 했어야지! 솔직하게 말해 봐. 우리 아들이 좆 되는 거 사실 보고 싶었던 거 아니야?”
“절대 아닙니다!”
“저희들이 뼈를 묻은 회사입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꾸밀 수 있겠습니까?”
신 부회장은 임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누가 부채질을 한 거야? 재영이 그놈이 혼자 이딴 생각을 했을 리가 없잖아. 누구야?”
임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김 과장의 이름을 말했다.
“김도형 과장입니다.”
“과장? 고작 과장 따위가 불을 붙였다고?”
“저희도 자세한 정황은 알지 못합니다. 김도형 과장이 처음 이 프로젝트를 제의했고, 신재영 사장이 그걸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대체 왜?”
“아시다시피 회사에서 곧 사장 자리를 교체한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습니까? 신재영 사장은 단기간에 수익을 확 올려 입지를 다지고 싶었던 거죠.”
사정을 알게 된 신 부회장의 한숨이 더욱 커졌다.
“그 김도형이란 새끼는 지금 어디 있어?”
“사건 터지기 하루 전날 갑자기 사표를 내고 잠적했습니다.”
“뭐? 사건 터지기 하루 전날?”
“예. 미국 신용등급이 떨어지기 하루 전날에 갑자기 사표를 내고 사라졌다는군요. 신재영 사장이 김도형 과장을 잡으려고 이 잡듯이 뒤졌는데, 아직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신 부회장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비서실장을 불러들였다.
“재영이가 김도형 과장을 붙잡아 오라고 시켰다며? 근데 왜 아직도 못 잡았어?”
“저희도 백방으로 알아봤습니다만, 완전히 흔적을 지우고 사라졌습니다. 외국으로 떠난 건 아닌데, 사표를 내고 난 뒤에 행방이 묘연합니다. 살던 집도 싹 비웠고요.”
“친인척들은?”
“다 조사를 해 봤는데, 다들 연락 안 한 지 오래돼서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 부회장은 신화 그룹 경호팀 실력을 잘 알고 있다.
누굴 잡아 오라면 외국에 있는 놈도 며칠 안에 잡아 오는 팀이지 않은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너희들 실력이 녹슨 건 아닐 테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계획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빠르게 잠적을 할 순 없습니다.”
신 부회장은 그때 느낌이 왔다.
이 모든 게 누군가의 계략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작전이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도 대충 예상이 갔다.
“혹시 우리 옵션 쓸어 담은 놈이 J&H야?”
“맞습니다. J&H가 가장 많이 쓸어갔죠. 이대로 만기일이 오면 J&H에게 2~3조 원은 줘야 할 겁니다. 개미들도 꽤 많이 쓸어가긴 했는데, J&H가 공격적으로 쓸어 간 건 사실입니다. 신재영 사장 말로는 가짜 정보를 뿌려 J&H를 속였다고 했는데, 가짜인 줄 알았던 정보가 사실은 진짜였던 거죠.”
신용일 부회장은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들 녀석을 옆에서 잘 지켜보는 건데.
사실 그도 신 회장 때문에 최근 아들과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신 회장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다. 자신의 아버지이기는 하나, 언제든 부회장 자리를 갈아 치울 수 있을 만큼 냉혹하기도 하다.
신재영이 이진석과 충돌했을 때 괜히 아들 때문에 앞길 망치지 말라며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임원들이 소집되어 신재영 사장직 박탈이라는 내용이 오고 갔을 때도 모른 척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다니.
이 모든 게 이진석의 함정이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놈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금융계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화 금융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무너뜨릴 수 있을까?
“신화 금융이 그 정도로 많은 돈을 지불할 능력은 되나?”
“언론에서 신화 금융이 당장 내일이라도 망할 것처럼 떠들어 대는 바람에 고객들이 돈을 전부 다 회수해 가고 있습니다. 금융사의 자본으로는 지불이 불가능합니다.”
“보험은?”
“보험도 결국 신화 금융 계열사에 있는 보험이라서 사실상 큰 도움이 되지 못 합니다. 어차피 자회사 보험이라는 건 그룹의 도움을 받기 위한 장치이지 않습니까?”
“씨발. 그러니까 뭐야? 그룹이 나서서 해결을 해야 한다는 소리잖아?”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오늘따라 끊었던 담배가 그리운 신용일이었다.
그룹이 나서야 한다는 건 신 회장이 나서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신 회장도 분명 이 사태의 진상을 알아봤을 터.
신재영은 두 번 다시 그룹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고 신용일 또한 그 처우를 기다려야만 했다.
“일단 알겠어. 다들 어떻게든 주가를 올리려고 노력해 봐. 3일 안에 코스피 주가가 폭등하면 우리는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만, 미국 신용등급이 내려간 게 너무나도 커서······.”
“그럼 다들 여기서 옷 벗고 나가든지. 그 옵션 못 막으면 당신들 목이 무사할 것 같아? 당장 나조차도 부회장 명패가 날아가게 생겼어. 그러니까 어떻게든 생각을 해 보라고.”
“예, 부회장님.”
임원들은 그리 대답하고 모두 사장실 밖을 나갔다. 그들의 어깨가 모두 축 처져 있었다.
이미 폭락할 대로 폭락한 코스피 주가를 갑자기 어떻게 올린단 말인가.
신 부회장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는 재촉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자식새끼 하나 잘못 키워서 이런 새끼한테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니.”
신 부회장은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이진석의 번호를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