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47화
청담동에 있는 이 일식집은 오픈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오픈을 해도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면 들어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여긴 신화 그룹 회장이 사치로 만들어 낸 식당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초대한 손님과 조용히 술을 마시며 평소 좋아하는 일식을 먹으려고 하는 건데, 굳이 땅값 비싼 청담동에 만들었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손자와 한바탕 했다는 얘기는 들었네.”
“그래서 손주 대신에 절 혼내 주려고 부르신 겁니까?”
“하하. 내가 혼낸다고 해서 자네가 들은 척이라도 하겠나? 거기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애들 뒤치다꺼리는 이제 못 해. 뭐, 지 애비가 알아서 하겠지.”
회장 본인이 나서지는 않겠지만, 부회장은 나설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자꾸 우리랑 척을 져서 좋을 게 뭐가 있누? 그냥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면 될 것을.”
신화 그룹 회장이 나선다면 솔직히 큰 부담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자기는 나설 일이 없다고 선언을 해 줬으니 나는 작은 보답으로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저도 척을 질 생각은 없습니다. 신화 그룹은 제게 고향 같은 곳이니까요. 그저 서로 오해하며 충돌한 게 문제인 거죠. 제가 좀 경솔했습니다.”
“허허.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신 회장은 잔을 깨끗하게 비워 내며 또 내게 내밀었다.
80을 넘긴 나이인데도 이 정도 술은 간에 기별도 안 온다는 듯한 얼굴이다.
겉으로 봐도 아주 정정해 보이는 양반이다.
“그런데 현광 자동차 주식은 갑자기 왜 내놓으라고 하는 거야?”
“꼭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흐흐. 뻔하지. 정영준 그놈이 도와달라고 했겠지.”
“눈치채고 계셨군요.”
“현광 건설이랑 네가 전부터 손발 맞추고 있다는 건 진작 알았지. 프로젝트 협력하는 것도 많잖아.”
“예. 맞습니다.”
“그래서 널 끌어들인 거겠지. 현광 그룹의 옛 영광을 되살리겠다고 말이야.”
신 회장은 짧게 혀를 찼다.
“쯧쯧. 정 회장 그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나이도 처먹을 대로 처먹은 놈이 말이야.”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닙니다.”
“오. 위대하신 투자자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또 내가 할 말이 없지.”
“현광 자동차 주식, 넘겨주실 겁니까? 값은 후하게 치겠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달라고 난리야? 금융 애들한테 달라고 해.”
“회장님이 곧 신화 그룹이지 않습니까.”
그는 곱게 넘어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예 줄 수 없다고 못까지 박아 버린다.
“안 돼. 그건 못 넘겨.”
“의리 때문입니까?”
“의리? 현광 핏줄이랑 내가 의리를 가질 게 뭐가 있나?”
“그럼 대체 무슨 이유로 현광 자동차 지분을······. 단순히 수익률 때문에 가지고 있으실 리는 없잖아요.”
“자네 말이 맞아. 돈 몇 푼도 안 나오는 그깟 지분을 내가 뭐 하러 가지고 있겠어? 이게 다 자존심 때문이지.”
“손자분과 있었던 일 때문이라면 제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지분을 안 넘기는 줄 아나? 좀 더 넓게 보시게.”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하면 될 것을.
답답한 양반 같으니.
나이가 들면 다 저렇게 말 돌리는 걸 좋아하게 되는 건가?
나는 잠깐 생각을 하다 이내 대답했다.
“회장님께서는 현광 그룹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으시는군요.”
“허허. 이제야 봤구먼.”
“현광 그룹이 합쳐진다고 해서 신화 그룹에게 피해를 끼칠 일은 없을 텐데요?”
“뭐, 어차피 노는 시장이 다르니까 딱히 피해 보는 건 없어. 다만 딱 한 가지. 그게 뭔지 아나?”
설마 이 양반이 그것 때문에?
“재계 순위가 밀리는 거요?”
믿고 싶지 않지만 신 회장 표정을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우리 신화 그룹은 항상 천하 그룹 때문에 밀려서 2위, 혹은 3위를 왔다 갔다 하지. 천하 그룹 놈들을 도저히 넘을 수가 없더라고. 그런데 여기서 나락으로 떨어졌던 현광이 다시 힘을 합치면 어떻게 되겠나?”
“단숨에 재계 순위가 올라가겠죠. 하지만 신화 그룹의 자리를 위협할까요?”
“이미 우리 쪽에선 예전에 계산 끝냈어. 지금 현광이 그룹을 합치게 되면 곧바로 2위까지 올라와. 안 그래도 2위에만 머무르던 게 억울했는데 그놈들 때문에 3위에서 4위까지 추락하겠지.”
고작 그딴 이유로 현광 자동차 주식을 내놓을 수 없다고?
그러나 신 회장은 이제 일선에서 물러난 사람이다.
돈보다는 명예를 더 따질 나이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람은 돈보다 명예를 찾게 되어 있어. 정 회장 그놈도 제 명예 때문에 그 지랄을 떠는 거고.”
“결국 회장님도 명예 때문에 넘겨주실 수 없다는 것이군요.”
“방해는 하지 않겠네. 내가 지분을 절대 넘기지 말라고 따로 지시를 내려놓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서서 지분을 넘기진 않아. 이 정도면 되겠나?”
신 회장은 이번 일에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금융 쪽 실무진과 씨름을 하라는 건데, 그럼 또 신재영 그놈과 마주쳐야 한다.
“절대 쉽게 허락해 주진 않으시네요.”
“그럼 재미없잖아. 나도 보는 맛이 있어야지. 요즘 즐길 거리가 없는 참에 자네 같은 사람이 나와서 재롱을 떨어 주니 얼마나 좋던지.”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허허. 그럼 나야 땡큐지. 이상하게 자네랑 마시는 술은 참 맛있는 거 같거든. 그리고 기대도 돼.”
“어떤 기대요?”
“자네가 현광 주식을 우리한테서 어떻게 뺏어갈지 말이야.”
신 회장은 이 상황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 * *
회사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권 대표는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됐습니까?”
“안 준답니다. 금융 쪽 애들이랑 말해 보라고 하더군요. 자기는 뒤에 빠져 있을 테니까.”
“미묘한 대답이군요. 정말 참견 안 한다고 했습니까?”
“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어요. 그런데 신 회장이 나서지 않으면 신 부회장이 나설 겁니다. 신재영 사장도 순순히 현광 자동차 주식을 줄 거 같지 않고요.”
“신씨 집안이 여러모로 회장님을 괴롭히네요.”
“이 정도면 악연이죠. 그래도 한번 찔러는 봐야 하지 않습니까? 신화 금융 쪽에 연락 넣어 보세요.”
“알겠습니다.”
권 대표는 내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잠시 나갔다 들어왔다.
빨리 들어온 것을 보니 벌써 대답을 듣고 온 모양이다.
“협상할 생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절대 줄 수 없다는 대답이 왔습니다.”
“그럼 뺏어야겠네요.”
“예?”
“저쪽에서 안 주겠다고 하니, 뺏어야죠. 더 나은 방법이 있습니까?”
내 말을 알아들은 권 대표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안 준다면 뺏어 오는 게 우리 J&H의 경영 방식 아닙니까?”
* * *
“계속 확보하고 있는 거지?”
“예. 저쪽에서 눈치 못 채게 천천히 사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아무래도 J&H가 우리랑 똑같은 타이밍에 움직이고 있는 듯합니다.”
골드 트리먼의 대표, 로널드 웨인은 아침부터 인상을 써야만 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블랙 커피가 쓰기 때문이 아니다. J&H라는 이름이 그를 거슬리게 만든 것이다.
“뭔 소리야? 우리랑 똑같은 타이밍이라니.”
“우리가 옵션을 사들이기 시작하자마자 J&H도 갑자기 옵션을 긁어모으고 있습니다.”
실내에서 흡연을 하면 안 되지만, 로널드 웨인은 담배를 얼른 물었다.
“자세히 말해 봐.”
“예. 이틀 전부터 저희가 매입하기 시작한 옵션의 양이 갑자기 줄어들어서 알아보니, 여러 회사에서 옵션을 서서히 흡수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회사들이 전부 J&H 계열사고?”
“예. 미국에 있는 작은 회사 몇 개를 사 놓고 그것들을 이용해 옵션을 빨아들이는 겁니다.”
로널드 웨인은 확신했다.
이진석은 골드 트리먼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젠장. 이거 잘하면 반반 나눠 먹겠네? 근데 J&H에서 우리가 옵션 사들이는 걸 어떻게 안 거야? 골드 트리먼 이름으로 사들인 게 아니잖아.”
“예. 저희도 최대한 조심해서 여러 회사를 이용해 사들인 건데, J&H 감시망이 생각보다 촘촘한 듯합니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그러다간 다 뺏긴다. 풀로 땡겨.”
“빠르게 쓸어 담을까요? 주목을 받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다른 놈한테 내가 먹을 스테이크를 던져 줄 생각은 없어. 싹 다 쓸어 와.”
“예, 사장님.”
지시를 내려놓고도 로널드 웨인은 마음이 차질 않았다.
“이거 보기보다 욕심이 많은 놈이었네. 감히 내가 먹을 걸 건드려?”
그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미국에 있는 J&H 계열사들 전부 리스트 뽑아. 그리고 한번 파헤쳐 보라고 해. 조금이라도 문제가 되는 게 있으면 고발부터 하고.”
전화를 끊은 로널드 웨인은 연신 담배를 피워 댔다.
다 차려 놓은 밥상을 이진석한테 빼앗기는 것 같아 자꾸만 화가 난다.
* * *
“J&H 금융이 또 전화를 했다고?”
“예. 현광 자동차 지분을 넘기겠냐는······.”
“미쳤냐? 절대 안 넘긴다고 해. 몇 번을 전화해도 똑같은 대답만 하라고.”
“알겠습니다, 사장님.”
이진석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 신 회장에게 쪼르르 달려갔다가 오히려 실컷 혼나기만 한 신재영. 그는 자다가도 이진석이란 이름만 들으면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그만큼 이진석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쌓일 대로 쌓여 있었다.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는 싶은데, 이렇다 할 방법이 없어 답답할 따름이다.
거기다 신 회장은 손자인 자신을 금융에서 내쫓으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단기간에 수익을 크게 땡겨야 이 자릴 지킬 텐데.”
점점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던 터라 신재영 사장은 밑의 사람들을 닦달해 가며 실적을 채우도록 했다. 그러다 자신에게 올라온 보고서 중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는 잠깐 보고서를 살펴보다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도형 과장이라고 있지? 사장실로 올라오라고 해.”
금융 2팀 과장이면 좋은 대학에 실력도 나름 갖춘 놈일 것이다. 그리고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놈이 펀드 매니저로 일하면서 회사에 꽤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신 회장도 능력 있는 아랫사람을 두라고 그렇게 구박을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놈은 쓸 만할지도?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아, 그래. 김도형 과장. 잠깐 거기 앉아 봐.”
“예.”
신재영은 김도형이 작성한 보고서를 보여 주며 말했다.
“이거 때문에 불렀어. 보고서 내용만 보면 단기간에 수익을 크게 땡길 수 있는 거 같던데?”
“예. 계획대로만 된다면 회사에 큰 이익이 될 겁니다. 아시다시피 최근 미 정부가 국가 부채 한도를 야당과 협상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알지. 잘 됐다며?”
“네. 의회에서 최종 승인이 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지금 미국 증시는 폭주할 준비만 하고 있고요.”
“우리나라도 그럴 거다?”
“미국 증시가 폭등하면 우리 코스피도 그에 따라 올라갑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린 다른 루트를 타는 겁니다.”
“다른 루트?”
“미국 신용등급이 하락할 거라는 찌라시를 마구 뿌려 대는 거죠. 신화 그룹의 힘을 빌려 언론을 잘 구워삶는다면 대어를 낚을 수 있을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김도형 과장의 말에 신재영 사장은 더욱 솔깃해졌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어쩌면 이번 기회에 자신의 입지를 확실하게 굳힐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