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43화
신화 중공업 김도원 사장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몇 주 전부터 J&H가 방산 산업에 뛰어든다는 찌라시가 떠돌았다. 그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무시했지만, J&H가 기어코 R&B를 인수해 버렸다.
R&B가 어디인가?
비록 예전만큼의 명성은 없지만, 미국 방산 산업에서 잔뼈가 굵은 놈들이다.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대한민국은 미제 무기를 따라갈 수가 없다.
그들이 3~5년 전에 만들어 놓은 걸 지금에서야 간신히 따라가는 수준이니까.
이건 단순히 물 위에 떠다니는 배를 만드는 게 아니다.
군사적 활용이 가능한, 그것도 섬 하나를 통째로 초토화시킬 수 있는 함선을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조선 사업을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J&H가 함부로 뛰어들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건데······.
“김 사장.”
“아, 예. 회장님.”
“나이가 많이 들어서 그런가, 내가 요즘 자꾸 이상한 소리를 들어.”
그 이상한 소리가 어떤 건지 듣지 않아도 김도원 사장은 알 것 같았다.
“자네 J&H 알지? 요즘 엄청 잘나가잖아. 게다가 거기 회장이 예전에 우리 신화 금융 직원이었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장이었지. 그 친구랑도 한번 만나 본 적이 있었네. 젊은 나이에 아주 대단하더군. 당연히 그 친구가 크게 될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내 경쟁자가 될 거란 생각은 한 적이 없었어.”
“······.”
“그런데 내가 자꾸 헛소리를 들어. 우리 신화 그룹이 꽉 붙잡고 있는 방산 산업을 J&H가 쑤시고 든다는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거 맞지?”
김도원 사장은 푹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신태일 회장은 뻔히 상대의 마음을 알면서도 핀잔을 주었다.
“아니. 이 사람아. 왜 대답이 없어?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무시하는 겐가? 내가 이렇게 보여도 아직까지 갈비를 쪽쪽 뜯어 먹는다니깐?”
“회장님. 제가 어찌 감히······.”
신 회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잔에 담긴 따뜻한 물을 들이켰다.
“내가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아직 회장 자리를 내려놓은 건 아니야. 그만큼 책임감을 느낀다는 거지. 그래서 감히 누가 내 영토를 침범하면 당장이라도 칼을 뽑고 나갈 수가 있어. 그런데 그거 아나? 성에 너무 오래 틀어박혀 있는 놈이 갑자기 앞에서 나대면 아무도 안 따라 준다는 거. 그때 필요한 게 자극제야. 중임을 맡고 있는 놈의 목을 날려 버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들 우르르 뛰어나와서 내 뒤를 따르게 된다니깐? 참 인간 마음이라는 게 사악하지?”
“회, 회장님.”
김도원 사장은 가슴이 철렁였다.
임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의 목을 날려 버린다는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 성군이네 뭐네 하지만 결국 통치의 기본은 공포야. 이건 불변의 진리지. 자기가 섬기는 주인을 머슴 새끼가 두려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만만하게 본다고 생각해 봐. 나라 꼴이 참 잘도 돌아가겠지? 그래서 묻는 거야. 자네들도 설마 날 만만하게 보는 건가 하고.”
“회장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김도원 사장을 비롯해 임원들은 절대 아니라며 부정했다.
그럴수록 신 회장의 안색은 굳어져만 갔다.
“그런데 왜 일을 그따위로 하는 거지? 내가 지금 거슬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이봐 금융.”
“예, 회장님.”
“J&H가 사상 최대 이익을 보고 있을 때 우리 신화 금융은 뭘 하고 있었지?”
“그, 그건······.”
“그리고 건설. 너희도 할 말은 없지 않냐? 유통은 또 어떻고? 하다하다 이젠 방산 산업까지 내가 신경을 써야 하나?”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김도원 사장만 털고 끝날 줄 알았는데, 불똥이 사방에 튀어 버린 것이다.
신 회장도 여기서 더 하면 그냥 꼰대의 잔소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J&H가 방산 산업에 뛰어드는 건 확실해. 그것도 함선 만드는 쪽으로. 그냥 찌라시가 아니라 확정이 됐다는 거야.”
“하지만 청와대의 재가가 떨어지지 않으면······.”
“이진석이 자네들처럼 덜떨어진 놈인 줄 알아? 청와대와 이미 쇼부가 끝났으니까 R&B를 인수한 거겠지. 여기서 우리가 알아봐야 할 것은 무엇이냐, 이진석 그놈이 어떻게 청와대를 구워삶았는지야.”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배 하나 뒤집혀서 나라가 온통 슬픔에 잠겨 있어. 그런데 이 시국에 그 썩을 놈이 뒤에서 장난질을 하고 있는 거야. 이게 말이 된다고 보나? 슬퍼하는 척을 해도 모자랄 판에 청탁 비리로 혈세를 뜯어내려 하다니. 에잉.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신 회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회의를 마치기 전 임원들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명심해. 내가 원하는 대로 교통정리가 안 되면 그땐 자네들이 날 만만하게 보는 걸로 알고 칼을 뽑을 거야. 자네들이 싫어서, 나를 위해서 뽑는다는 게 아니라 이 회사를 위해서 그런다는 거지. 다들 알아들었나?”
“예, 회장님!”
마치 군대의 그것과 같은 대답이었다.
임원들은 신 회장의 손짓에 따라 모두 후다닥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 회장은 짧게 혀를 찼다.
“쯧쯧. 모자란 놈들 같으니.”
그러고는 애꿎은 제 아들에게 잔소리를 퍼붓는다.
“넌 일을 어떻게 하면 임원들 꼴이 저러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런데 이번 일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거라 다들 눈 뜨고 당한 것 같습니다.”
“이놈아. 내가 항상 그랬지? 무심한 곳이 없게 잘 살피라고 말이다. 네가 그렇게 물러 터졌으니까 셋째 놈이 널 쌈 싸 먹으려 한 거잖아. 그때 이진석이 널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네가 그 자리를 지킬 수나 있었겠어?”
신용일 부회장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으나, 별다른 말대꾸를 하진 못했다.
노친네가 나이를 하도 먹어서 그런지 틈만 나면 똑같은 소리를 한다.
몇 년 전에 신용일 부회장의 동생인 신용권이 회사를 차지하기 위해 수작을 부리지 않았던가? 그때 이진석이 내부 고발을 통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저희 회사와 딱히 앙금도 없을 텐데, 갑자기 왜 그랬을까요? 대한민국 기업인이라면 한국 방산 산업을 꽉 붙잡고 있는 게 우리 신화라는 걸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천하 그룹도 그것만큼은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욕심이 생긴 게지.”
“예?”
“흐흐. 그놈도 결국 똥통에 들어왔다는 뜻이지.”
신용일 부회장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그런 게 있다. 내가 예전에 이진석 그놈을 따로 만났을 때 나눈 얘기지. 그놈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자신했지만, 결국 자신이 혐오하던 재벌 물이 확 들어 버린 거야.”
“그렇습니까?”
“그놈이 내 얼굴을 보고 그날 나눴던 얘기를 꺼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나. 아니지. 아예 철면피를 깔아서 뻔뻔하게 나오려나?”
임원들에게 보였던 표정과는 다르게 신 회장은 아주 신이 나 보였다.
신용일은 지금 신 회장이 즐기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임원들에게 일을 맡기실 게 아니라 직접 나서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러다 정말 J&H가 청와대에 빨대를 꽂아 버리면 저희의 이권이 나뉘는 겁니다.”
“이놈아. 언제까지 다 늙은 네 애비 찾아다닐래? 그런 거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거라면 지금이라도 때려치워.”
고약한 영감.
항상 저런 식이다. 하지만 그가 눈을 감기 전까지는 철저히 복종해야 한다.
아직 신화 그룹 회장 자리는 건재하니까.
항상 다 물려준다는 말만 하지, 아예 관속에 자신이 가진 모든 걸 가지고 들어가려는 것만 같았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추하게 보이면서도 저 자리에 얼른 앉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드는 신용일이었다.
* * *
청와대는 형식적인 입찰 경쟁을 벌였다.
이번에 추가로 만들려 하는 전투 함선에 대한 입찰이었는데, 당연히 제조사는 R&B를 인수한 우리 J&H로 선정되었다.
“이거, 오랜만에 보네? 아니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화가 참 많이 났을 텐데 오기 전부터 멘탈 관리를 한 건지 신용일 부회장은 웃으며 내게 악수를 건넸다. 나도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띠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런데 말씀은 낮춰 주십시오. 제가 많이 불편합니다.”
“하하. 그럴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원시원한 건 똑같아.”
청와대에서 열리는 만찬 모임에 참석한 신용일 부회장은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그리고 설마하니 교황을 끌어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 정도 미끼면 청와대가 물지 않고 버틸 수가 있겠어?”
신화 그룹이 압박을 계속 넣다가 왜 중간에 멈췄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청와대에 넣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아주 공정한 경쟁이지 않았나요? 기술적인 면에서도 저희가 앞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술이야 그렇지. 그런데 미국에서 뒹굴던 놈들이 한국 와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근본부터가 다르니까.”
“그건 차차 적응하면 될 겁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신용일 부회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건가?”
난 모른 척하며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른 척하는 거라면 거기까지 해. 우리 신화 그룹은 재계 순위 2, 3위를 다투는 곳이야. 그런 곳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있나?”
“척을 지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런데 방산은 왜 건드려? 그 잘난 천하 그룹도 거기까지 선을 넘진 않았어.”
“그거야 거긴 워낙 전자 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니까요. 제가 알기로 무기 납품을 할 때 천하 그룹에서 만든 부품들을 쓴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이거와는 많이 다르지.”
“글쎄요. 고작 함선 몇 대 만드는 거 가지고 너무 겁을 주시는데요?”
“고작?”
표정과 더불어 목소리도 거칠어졌다.
“수조 원이 드는 사업인데 이걸 고작이란 표현을 쓰나?”
“1조 원이 겨우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1조 원이 나중에는 몇조 원으로 불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야? 그리고 1조 원이 어디 집 개 이름도 아니잖아. 자네가 R&B 인수할 때 1조 원도 안 들었어.”
“순이익을 따지면 별거 남지도 않잖습니까. 신화 그룹의 전체 규모를 따진다면 미미한 수준이죠.”
신용일 부회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은 계속 우리랑 부딪혀 보겠다는 거네?”
“저도 웬만하면 부딪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후배를 위해서 길을 좀 터 주십시오.”
“하하. 후배?”
“제가 신화 금융에서 잠깐 몸담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부회장님을 미래를 위해 나름 일을 해 드렸다고 생각하는데요?”
“여기서 동생 일을 걸고넘어지는 건 아니지. 고작 그거 하나로 내가 계속 양보를 해 준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고작이라······. 부회장님에게는 그게 그저 고작이었군요. 제가 없었다면 회사를 통째로 빼앗기셨을 텐데 말이죠.”
슬슬 열이 뻗친 신 부회장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이 회장. 그만 까불어. J&H가 급성장을 하긴 했어도 아직 내 눈에는 그냥 하룻강아지로밖에 안 보이니까.”
“신화 그룹같이 거대한 대기업 앞에서는 J&H가 많이 부족하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저한테 콧대를 높이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고개를 숙이더군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KV 그룹처럼 신화 그룹도 삼켜 보겠다는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병원 가 봐. 그거 망상이 너무 심해.”
“누구나 그런 망상 한 번쯤은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꿈은 현실이 된다,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 꿈은 이뤄질 수 있지. 그런데 망상은 병원을 가야 돼.”
주변 시선도 있기 때문에 신 부회장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다.
“아무튼, 오늘 반가웠어. 그리고 자네 마음도 잘 알았네. 앞으로 이렇게 웃으며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다른 자리로 떠나는 신 부회장을 보며 나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일찍 발톱을 드러낸 건가.
하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서 영원한 적이라는 건 없다.
서로가 필요한 날이 오면 그땐 웃으며 다시 손을 맞잡게 되는 곳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