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24화
계약서를 건네받은 오희진은 꼼꼼하게 읽어 보며 혹시라도 빠뜨린 부분이 없나 체크했다.
“그렇게 보면 아세요?”
계약서라는 건 변호사들이 최대한 의뢰인이 유리하도록 어려운 단어들을 섞어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계약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제가 법 공부도 꽤 했었거든요. 회사를 못 물려받으면 법조인이라도 돼서 확 복수라도 해 볼까 생각했었죠.”
“······.”
이윽고 그녀는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제 요구사항이 전부 다 들어가 있네요.”
“추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추가하셔도 됩니다.”
“이 정도면 괜찮아요.”
그리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려는 걸 내가 막아세웠다.
난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평생 희진 씨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했죠? 우린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고. 설마 진석 씨도 사랑을 따라 결혼할 생각이셨어요? 꿈 깨세요. 어떤 여자라도 당신의 배경을 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진석 씨 하나만 보고 사랑하는 여자는 아마 없을 거예요.”
“그건 희진 씨도 마찬가지겠죠?”
“그럼요. 진석 씨에게 호감이 있는 건 맞지만,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혹시 모르잖아요? 우리가 계약을 맺고 나서 서로 자주 만나다 보면 다른 감정이 생겨날지.”
망설임 없이 그녀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녀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니, 아주 속이 다 시원하다는 얼굴이다.
“일주일에 2번은 꼭 만나야 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
“안 잊을 겁니다. 누구와 한 계약인데요. 이제 넘겨 주시죠.”
“여기 있어요.”
나는 그녀가 넘긴 서류를 빠르게 훑어 보았다.
서류를 하나씩 넘길 때마다 내 눈은 커져만 갔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모으신 겁니까?”
“제가 또 예쁜 딸이잖아요. 우리 아빠는 저한테 일말의 경계심도 없으세요. 그래서 자주 서재에도 들어가고 이것저것 뒤지고 나오기도 하죠.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하고 예전부터 모아 온 거예요.”
“예전이라면 언제쯤······.”
“대학교 1학년? 그때 우리 큰오빠가 회사 들어가서 계속 승진을 하는 걸 보고 느꼈죠. 내가 다 컸을 때쯤에는 회사가 오빠 손에 들어가겠다는 걸. 아마도 그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런 서류를 모아 왔던 거 같아요.”
대학교 1학년 때면 꽤 오랫동안 모아 왔다는 얘기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숫자를 보게 될 줄 아니까, 그 서류들이 어떤 용도인지 대충 알겠더라고요.”
“이 명부도 가지고 계시네요?”
“예. 지금까지 우리 아빠가 어떤 놈들한테 돈을 먹였는지 알 수 있는 명부예요.”
이런 귀한 것까지 가지고 있다니.
오대현 회장은 자기 딸이 이렇게 위험한 자식인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명부를 공개하는 건 불가능할 수도 있겠네요. 저에게 협력하는 사람들 이름이 들어가 있으니까요.”
“그거야 쓰기 나름이죠. 공개하지는 않아도 협박할 때 쓸 순 있잖아요?”
“그것도 그렇네요. 꼭 이런 걸 많이 해 본 사람처럼 얘기하시니, 제가 좀 무서운데요?”
“그냥 칼을 갈아 왔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진석 씨 앞으로 저한테 잘해 줘야 해요. 안 그러면 이번엔 도끼를 갈 수도 있으니까.”
저 말은 꼭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점심 식사부터 할까요? 첫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당장 회사부터 달려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센스가 있네요?”
“전 뒤통수에 도끼 맞기 싫거든요.”
이제 계약은 맺어졌고, 나는 계약 사항에 충실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 * *
“아이구야······. 오 회장이 이걸 알면 아마 피 토하고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벌한 데이트를 끝내고 나서 나는 서류를 권 대표에게 넘겼다.
“장난 아니죠? 이거면 오 회장 징역살이도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까?”
“예. 자료 관리가 조금 미흡했네요. 자기 딸이 이걸 다 가지고 올 정도면 말입니다.”
“설마 딸이 자기 뒤통수를 때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희진 씨가 직접 그러더군요. 아빠는 자기를 전혀 경계하지 않아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회장 정도 되면 당연히 개인적인 공간이 있다.
특히 그런 곳에는 남들이 알아서는 안 될 자료들을 숨겨 두기 마련.
나 역시도 그런 자료들을 모아 두는 곳이 따로 있을 정도다.
오늘 일을 보고 더욱더 은밀하게 자료를 보관해야 함을 깨달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충분합니까?”
“예, 회장님. 이 정도면 오 회장이 못 버틸 겁니다. 노조 파괴부터 시작해서 가격 동결, 부당 해임, 비자금 조성, 뇌물 수수 등등. 최소 5~10년은 때릴 수 있겠군요.”
“무조건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뜻이군요.”
“집행 유예로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왜냐하면 이걸 소스로 파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나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죠. 노조를 강제로 해산했을 때 동원한 깡패들도 조사하기 시작하면 최악의 경우 살인죄입니다.”
노동자들에게 노조는 당연한 권리이지만,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인들에게는 골치 아픈 단체다. 당연히 노조를 파괴해 골칫덩어리들을 없애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땐 주로 돈이 아니라 힘으로 짓밟는 경우가 많다.
노조원들이 몇몇 실종되는 일도 자주 일어나지 않던가?
당연히 그에 대한 내용은 언론에 단 한 줄도 실리지 않는다.
이것이 국민은 모르는 대기업의 어두운 이면이다.
“그런데 회장님. 이 정도 파일을 넘겨줄 정도면 계약 내용을 착실하게 수행하셔야겠습니다.”
“말도 마세요. 비위 맞춰 주려고 이 바쁜 와중에 점심 식사에 영화까지 보고 왔어요.”
“하하. 그래도 괜찮은 데이트였던 것 같군요. 회장님 표정이 썩 나빠 보이지 않아요.”
“뭐, 나쁘진 않았어요. 솔직히 옆에 있으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쁜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거니까요. 거기다 데이트할 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더군요. 유머러스하고, 일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요.”
그건 좀 다른 매력이었다.
데이트를 할 때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니 말이다.
의도적인 건지, 아니면 성격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조금은 무서우면서도 흥미가 있었다.
“연애사는 회장님의 일이니,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두 분이 잘 어울린다는 거에는 변함이 없어요. 아무튼, 이건 언제 터트릴까요?”
“일단 터트리진 마시고, 오 회장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는 엄청난 사건 파일이 뿌려지고 있다는 것만 알리세요.”
“압박을 하시는 겁니까?”
“이거 터트리면 사람 여럿 다쳐요. 정부에서도 곱게 보진 않을 테고요. 몇 개 확인해 보니까, 현 정부의 실권이라는 사람들까지 섞여 들어가 있던데요?”
“음. 신중을 기해야 하겠군요. 일단은 알겠습니다.”
무작정 터트린다고 능사는 아니다.
아주 적합한 시기에 터트려야 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는 법.
그리고 가장 좋은 건 이 무기를 한 번도 쓰지 않고 승리를 얻어내는 것이다.
* * *
“자네 배짱도 좋구먼.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아직도 병실에 계실 줄은 몰랐네요.”
“자네 덕분에 건강 검진을 좀 했지. 늙은 몸이라 안 아픈 곳이 없더군. 그거 치료하려고 있는 거야.”
“그럼 그냥 은퇴하시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심은 어떨까요?”
오 회장은 눈을 부릅떴다.
“은퇴? 어림도 없는 소리! 내가 일선에서 물러날 순 있어도 회사를 넘기는 일은 절대 없어!”
“소문을 못 들으셨나 봅니다.”
“아. 그 소문? 나를 감옥에 보낼 수 있다는?”
“예.”
“그거 자네한테서 나온 소스인가?”
“그런 셈이죠.”
“그 말은 날 날려 버릴 수 있는 자료가 있다는 얘기네?”
날 죽일 듯이 노려보는 오 회장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회장님을 감옥에 보내는 일까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허허. 쥐새끼가 범을 다 걱정할 줄 알고 말이야. 세상 참 많이 좋아졌어?”
“회장님.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나도 농담하는 거 아니야, 이 사람아. 그래. 가지고 있는 서류는 확실한 거고?”
“예. 최소 5년은 감옥에 있으셔야 할 겁니다. 어쩌면 10년 이상이 될지도 모르고요.”
“자네 재벌을 모르나? 정치인들은 영원히 감옥에 썩을 수 있어도 우리 같은 재벌들은 반드시 밖으로 나와. 광복절이다 뭐다 해서 모범 수감으로 빠져나올 때도 많고. 한두 번 해 보나?”
오 회장은 감옥을 가더라도 회사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내가 들고 있는 파일이 뭔지 안다면 이렇게 버틸 순 없을 터.
그는 자신이 집행 유예로 나올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노조 파괴, 일산 건설 프로젝트, 비자금 조성 및 돈세탁. 어디까지 할까요?”
눈썹을 꿈틀거리기는 했으나, 오 회장은 여전히 꼿꼿하게 목을 세우고 있었다.
“말이 많은 걸 보니, 쫄리나 보네.”
“회장님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겁니다. 제 손을 더럽히기도 싫고요.”
“이미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손 아닌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오 회장의 뜻을 알았으니, 나도 더 이상은 말동무를 해 줄 필요가 없었다.
“좋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회장님이 결정한 일이십니다.”
“뻔뻔하기는. 칼 든 놈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칼 든 놈이라고 해서 무조건 상대의 목숨을 빼앗진 않습니다. 전 최소한의 자비를 베풀어 드리려 했고요.”
“마음대로 하시게. 그렇게 악을 쓴다고 해서 KV 그룹이 그쪽 손에 넘어갈 줄 알아? 절대 그럴 일 없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밖을 나섰다. 그런데 나가는 도중에 오 회장의 첫째 아들 오현수와 마주쳤다.
그에게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하려 하는데, 그는 나를 붙잡았다.
“어디까지 갈 생각이십니까? 여기서 그만 끝내시죠.”
나는 피식 웃으며 오현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끝내라고요?”
“한라 그룹으로도 부족한 겁니까? 대체 우리와 무슨 악감정이 있다고 괴롭히는 겁니까?”
“괴롭히다니요.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그저 저는 경영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에요. 그리고 반대로 말해 보죠. 당신은 운 좋게 좋은 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 자리를 포기하라고 하면 포기할 겁니까?”
“예?”
“그런 겁니다. 그 자리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포기한다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옵션이겠죠. 저 역시 그래요. 이렇게 상대를 물어뜯어 기어코 쓰러뜨리는 것이 제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중도에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나는 오현수와 짧은 악수를 나누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도망치세요. 오 회장님을 물어뜯고 나서도 그 자리에 당신이 계속 있다면 당신도 같이 뜯겨 나갈 겁니다. 제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놈이라 사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물어뜯거든요.”
“······.”
오현수는 완전히 얼어붙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그를 놔두고 병원 밖을 나섰다. 그때 오현수 말고도 여러 사람들과 마주쳤는데, 오현중도 그중 하나였다.
그놈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모르는 듯이 보였고, 그 옆에 있던 오희진은 묘한 눈길을 내게 보냈다.
갑과 을이 된 계약자로서, 그리고 이제 연인이 된 사이로서의 눈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