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123화 (123/200)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23화

절묘한 타이밍에 오희진이 내게 접근했다.

단순히 이성 간의 호감을 쌓기 위한 만남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분명 그룹 일로 나를 만나고자 하는 것일 터.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재벌집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오랫동안 연인 관계를 유지하다 결혼할 수 없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고요.”

만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뜬금없이 결혼 얘기다.

헛소리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일단 가만히 듣기만 해 주었다.

“그런데 딱히 상관은 없었어요.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이제까지 하나도 없었거든요. 진석 씨 빼고요.”

“영광이군요. 희진 씨처럼 아름답고 현명하신 분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시다니.”

“괜한 겸손 떨 필요 없어요. 아마 대한민국 여자들 중에서 진석 씨 싫어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녀는 앞에 놓인 블랙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으며 숨을 골랐다.

“제가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해서 당황스러우시죠?”

“아니라면 거짓말이겠군요. 오 회장님과 제가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걸 희진 씨도 잘 아실 텐데요. 우린 서로 사적인 만남을 갖지 못합니다.”

“저도 알아요. 그래서 진석 씨와 거래를 하려고 여기에 온 거예요.”

“거래요?”

그녀는 날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저랑 결혼해 주세요.”

“···예?”

하마터면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현명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어쩌면 그냥 미친 여자일 수도?

“대신 진석 씨가 가장 원하는 걸 드릴게요.”

“제가 원하는 거요?”

“지금 아버지 회사를 공격적으로 인수하려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호 지분을 들고 있는 영감들이 손을 들어주지 않고 있죠?”

“잘 아시네요.”

“아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회사가 쓰러져도 그 영감들이 배신할 일 없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고 있죠. 하지만 만약 아버지가 검찰에 끌려가고 핵심 간부들도 하나둘 소환을 당해 회사가 국민들에게 질타를 받게 된다면?”

“정부가 이사회를 소집해 경영권을 박탈해 버릴 가능성이 있죠.”

그녀가 거래 물목으로 무엇을 들고 나왔는지 대충 예상이 갔다.

오 회장을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는 무기가 저 여자 손에 있는 것이다.

“어떤 걸 들고 계신 건지 제가 잠깐 봐도 될까요?”

“아버지를 징역살이까지 시킬 수 있는 파일이라는 건 알려 드리죠. 그리고 보여 드리기 전에 약속부터 해 주세요.”

“괜찮으시겠어요? 이 일 이후로 그쪽 아버님과 저는 철천지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둘이 부부가 될 수 있죠? 거기다 저는 희진 씨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요.”

“어차피 재벌집 애들이야 선 한 번 보고 그다음 날 상견례부터 하잖아요. 같은 집에 살다 보면 정이 들 수밖에 없다고 타이르면서 말이죠. 저희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안 되는데요?”

“그럼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일단 진석 씨가 매우 마음에 들어요. 대한민국에서 진석 씨 같은 남자를 찾기 힘들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그런 말을 면전에서 하니 뭔가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물론 이유가 그것만 있는 건 아니에요.”

“두 번째 이유는 뭡니까?”

“KV 그룹을 갖고 싶어서요.”

“KV 그룹을 갖고 싶다?”

“진석 씨에게 KV 그룹을 넘겨주고 부부가 된다면 저도 KV 그룹을 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제가 직접 경영을 할 순 없어도 조금이나마 참여는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어차피 회사 경영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방금 전엔 KV 그룹을 갖고 싶다고······.”

“갖고 싶은 것과 경영을 하는 건 다른 거잖아요. 저는 진석 씨가 KV 그룹을 소유하고 경영해 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아내로서 의무를 다하며 KV 그룹을 진석 씨와 같이 소유하는 거죠.”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난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런 내 속마음을 알아챘는지, 오희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돌은 년처럼 보이죠?”

“아, 아니요.”

“괜찮아요. 이미 얼굴에 다 써 있네.”

그러고는 물을 벌컥 들이켠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다른 쪽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여기까지 달려왔죠. 그리고 저 스스로가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걸 여러 번 보여 줬어요. 회사 일을 맡기면 그들보다 훨씬 잘해 낼 거라는 것도 말이에요. 그런데 아버지는 제가 여자라는 이유로 후보에서 완전히 제해 버리셨어요.”

우리나라 재벌집을 보면 어떤 여자도 모든 걸 물려받지 못한다. 항상 장남에게 모든 것이 돌아가고, 장남이 없다면 막내아들에게라도 모든 걸 물려준다.

남녀 차별이 심하다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은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가 시집을 가게 되면 거기서 낳은 자식들은 남자의 성씨를 따르게 되기 때문. 그럼 대가 끊기게 되는 것이라고 봤다.

“여자는 결국 바닥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만 물려받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제 능력을 보여 주면 아빠의 생각이 달라질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아니었군요.”

“예. 아빠는 오직 자기 큰아들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전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고요. 그냥 정략결혼으로 이익을 얻게 만드는 도구 정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거예요.”

“그럴 리가요. 오 회장님이 따님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데.”

“위로랍시고 한 말이라면 집어치워요. 오늘 아버지가 장남에게 회사를 다 물려주겠다고 한 말을 제 귀로 똑똑히 들었으니까요.”

그런 건가.

오 회장이 결국 장남에게 회사를 다 물려주기로 결심한 건가.

어쩌면 이번 일로 오 회장도 자신이 물러날 때가 되었음을 느낀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트리거가 되어 오희진을 자극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한테 거래를 요청할 줄은 몰랐다.

“어차피 가지지 못할 거 부숴 버리기나 하자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해요.”

“이번 결정이 감정적이라는 겁니까?”

“감정적인 것도 당연히 있죠. 그래도 충분히 생각해 보고 결정한 일이에요.”

“만약 제가 거절하면요? 저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말요? 설마 유치하게 내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하겠다, 그런 건 아니겠죠? 결혼은 새로운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수단이잖아요.”

이 여자는 사람을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저는 당연히 진석 씨도 정략결혼을 할 줄 알았어요. 그 대가가 KV 그룹이라면 꽤 괜찮은 결혼 아닌가요? 거기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면 이상하지만, 전 얼굴도 예쁘고 성형으로 떡칠한 다른 부잣집 년들과는 달라요. 공부도 할 만큼 했고요. 진석 씨한테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오희진처럼 예쁜 여자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 온다면 누구나 견디기 힘들 것이다. 거기다 그녀 말처럼 다른 부잣집 여자들과는 확실히 다르긴 하다. 내가 이제까지 봐 온 여자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라는 것도 부정 못 할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만난 지 두 번 밖에 안 된 여자와 결혼을?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시간을 좀 주세요.”

“지금 당장 치지 않으면 KV 그룹을 손에 넣는 건 영영 불가능할 텐데요? 지금 언론이 확 달아올라 있을 때 덮쳐야 하지 않아요?”

“아까부터 느끼는 거지만, 표현력이 참 화끈하시네요. 제 뜻은 그게 아닙니다.”

“그럼요?”

“희진 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당장 결혼을 하는 건 힘들어요. 그 시간을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건 저도 이해해요. 전 결혼을 전제로 만나자는 거였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하지만 계약서는 써야겠죠? 진석 씨가 저와의 약속을 어기고 다른 여자랑 놀아날 수도 있잖아요.”

이번에도 할 말 없게 만든다.

그러나 저런 철저함은 마음에 들었다.

“진석 씨가 그룹 회장인 이상, 어디를 가도 접대를 받는다는 것쯤은 알아요. 당연히 옆에 여자가 끼겠죠. 그런 건 이해해 줄게요.”

“정말이지 화끈하시군요.”

“대신 살림을 차린다거나, 애를 낳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 이제까지 누군가에게 성 접대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일 없고요. 제가 그런 쪽에는 거부감이 심해서.”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오희진이 활짝 웃어 보였다.

돈이 많아지고 대외적으로 얼굴이 알려지면서 나는 최대한 조심성을 들여 여자 문제로 이미지가 하락하는 걸 방지해 왔다.

나도 여자는 좋다만, 내 이미지가 한순간에 추락해 버리면 회사도 같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기에 항상 절제하는 것이다.

“계약서는 제가 따로 작성을 해서 드리죠.”

“기다릴게요. 계약서에 도장 찍으면 그때 제가 가진 서류를 넘겨드리죠.”

자기 할 말을 마친 오희진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밖을 나서기 전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직 도장은 찍지 않았지만, 오늘부터 1일 할까요 우리?”

정말이지 화끈한 여자다.

* * *

“어떻게 됐습니까?”

회장실로 돌아온 나를 권 대표가 맞이해 주었다.

그는 조금 넋이 나간 내 얼굴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챈 듯 보였다.

“아무래도 저 결혼하면 쭉 붙잡혀서 살 것 같아요.”

“예? 그게 무슨······.”

나는 권 대표에게 오희진과 무슨 말을 나눴는지 전부 다 알려 주었다.

권 대표도 크게 충격을 먹었는지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한 분이시네요. 하지만 오희진 씨라면 재벌들 사이에서도 아주 좋은 신붓감이라는 말이 많던데요?”

“예. 재벌집 아들들이 눈깔 뒤집혀서 구애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오늘 만나 보니까, 정말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하하. 저는 회장님에게 딱 어울리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감히 회장님을 그렇게 몰아붙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회장님도 딱히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신데요?”

“일단은······ 만나 봐야 알겠죠. 그래서 계약서를 작성할까 합니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건 정말 대단한 파일을 들고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내일까지 만들어 놓겠습니다. 우리 미래의 사모님 말대로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을 때 덮쳐야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테니까요.”

미래의 사모님이라.

순간 공포가 엄습했다.

사람이란 건 잠깐 만나 봐서 모르는 거다.

결혼 전에는 몰랐던 성격이 결혼 후에 튀어나올 때가 많지 않던가. 그래서 성격 차이로 이혼하는 부부들도 많고.

난 그래도 건전하고 평범한 결혼 생활을 하고 싶은데, 이렇게 되면 그런 생활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제가 옳은 일을 하는 걸까요?”

“회장님의 선택이죠. 어차피 회장님 정도의 위치라면 정상적인 결혼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다들 순수한 의도로 회장님에게 접근하지 않을 테니까요. 설사 순수한 의도라고 해도 회장님이 의심하게 될 겁니다. 정상의 자리라는 건 항상 그렇죠.”

권 대표의 말이 맞다.

그룹의 회장이 되어 매번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결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평범한 여자를 만날 수도 없다.

“그래도 선택은 회장님 몫입니다. 전 강요할 생각 없습니다. 그러나 주변 평판을 들어 봤을 때, 오희진 씨라면 회장님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금 할 뿐입니다.”

결국 권 대표는 이 결혼을 찬성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 계약 결혼, 정말 괜찮은 걸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