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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계 천재가 되었다-122화 (122/200)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22화

“뭐, 뭐라고? 이진석이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오 회장은 며칠 동안 심신의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도 뒤로 한 채 장남인 오현수를 병실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쓰러져 있는 동안 발생한 모든 일을 남김없이 보고받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진석이 있었다.

“예. J&H가 언론사를 움직여 KV 그룹에 대한 안 좋은 뉴스들만 연이어 내보내고 있습니다.”

“그 새끼가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냐? 내가 테라노스 투자 경쟁 때 아주 박살을 냈다고 이러는 거야? 그놈 그렇게 안 봤는데, 졸렬하기 짝이 없구나.”

오 회장은 이진석이 앙심을 품고 언론사를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테라노스와의 투자 경쟁에서 밀린 J&H는 몇몇 언론사들을 통해 조롱 섞인 기사를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건 앙심을 통한 복수가 아니다.

“회장님. 아니. 아버지. 이건 처음부터 함정이었습니다.”

“함정이라니?”

“우리가 테라노스에 투자를 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진석이 함정을 파 놓은 겁니다. 일부러 가격을 맥시멈으로 올리게 해서 회사 전체를 흔들리게 만든 것이 바로 이진석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오 회장은 믿기 힘들다는 눈빛으로 제 아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 새끼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거냐?”

“테라노스의 에디슨 키트가 사기라는 사실이 퍼지기 전부터 J&H가 KV 그룹 우호 지분을 들고 있는 은행과 금융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서 협조를 받아 우리의 지분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꿰뚫어 보기 위해서죠. 그와 더불어 그들을 설득해 그 지분들을 J&H 쪽으로 돌리려 한 겁니다.”

“화, 확실한 얘기냐?”

“한라 그룹 때와 패턴이 너무 똑같아요.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우호 지분들이 J&H의 손을 들어 줄지도 모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양반들이 지금까지 나한테 받은 돈이 얼마나 되는데!? 우호 지분이라는 게 왜 우호 지분인 줄 알아? 국가 기관의 간부들과 은행의 장이라는 놈들이 우리 똥구녕에서 나오는 돈을 받아 처먹었기 때문이야!”

대기업의 우호 지분은 은행, 금융사, 국가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국가 기관인데, 이는 정부가 대기업을 통제하에 두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무조건 정부의 말대로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 우호 지분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책임자들이 대기업으로부터 받는 돈으로 최대한 그들의 뒤를 봐주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돌아선다면 그동안 받아 낸 돈을 전부 토해 내야 하고 그 값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냥 돈만 받고 가만히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한라 그룹은 통째로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한라 그룹 회장이 멍청하게도 그놈에게 열쇠를 쥐여 줬으니까 그런 거고. 이진석 그놈이 아무리 날뛰어도 내가 세운 회사를 빼앗지는 못해. 은행장들도 멍청하지 않은 놈들이야. 내가 그놈들 아가리에 돈을 처넣을 때마다 장부를 쓰지 않았을까? 그놈들도 다 알 거다.”

오대현 회장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 오 회장을 보니, 오현수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제 아버지 말대로 이진석은 허튼짓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의 치부를 전부 드러내어도 KV 그룹이 피해 보는 건 없을 터.

하지만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진석이지 않은가.

“방심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도 안다. 이진석 그놈은 보통이 아니긴 하지. 네 말대로 이게 처음부터 함정이었다면 솔직히 상대하기 두렵구나.”

그래서 믿지 않으려 했다.

이진석이 시작부터 이 모든 걸 계획해 KV 그룹을 엎어지게 만든 거라면 도저히 그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테라노스는 어떻게 됐어?”

“사방에서 곡소리가 들리는 중입니다. 이미 J&H가 언론을 이용해 기사를 뿌린 뒤라 막을 방법이 없었어요.”

“우리 주가가 곤두박질을 쳤겠네?”

“예. 심각하죠.”

“하지만 이것도 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돼. 당장 지급해야 될 돈은?”

“꽤 있습니다. 제가 일단 시간을 벌어 보겠습니다.”

“그래. 은행장들부터 쫙 만나. 나도 여기서 회복을 하는 대로 움직이마.”

“예, 아버지.”

오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할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런 그의 뒤통수에 대고 오대현 회장이 말했다.

“현수야.”

“예?”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회장 자리는 네 거다. 이 회사도 전부 다 네 거가 될 거야. 그러니 꼭 지켜라.”

잠시 동안 오현수의 얼굴에 표정 변화가 있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밖을 나갔다.

병실 밖에는 동생인 오희진이 있었다.

안에서 아버지랑 나눈 얘기를 다 들은 것일까?

오희진의 표정도 조금 굳어 있었으나, 그녀는 곧 얼굴을 풀고 말했다.

“오빠. 아빠는 괜찮으셔?”

“아, 응. 얼른 들어가 봐.”

지금 여동생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오현수는 빠르게 병원을 나섰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오희진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러다 체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군요.”

NY 은행장은 괜한 엄살을 부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이렇게 만나 뵙는 건 처음이긴 하지만, NY와 저희 J&H가 여러모로 협력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 그래도 급이 다르지 않습니까. 저야 봉급쟁이이지만, 회장님께서는 종을 부리는 주인이시니까요.”

“저런. 은행장님을 어떻게 한낱 봉급쟁이 취급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 한 잔 받으십시오.”

그는 내가 주는 잔을 받은 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왜 만나자고 하셨는지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술이 들어가기 전에 확실히 매듭을 짓고 싶군요. 안 그러면 술맛이 술맛처럼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요.”

“오늘 술맛은 달았으면 좋겠군요.”

“글쎄요. 보통 술은 쓴맛이 나지 않습니까? 오늘도 그럴 겁니다.”

시작부터 거절이다.

은행장 3명을 만났는데 3명 모두 내 편을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

“이미 갑판에 구멍이 나고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언제 침몰할지 몰라요. 그걸 감수하시겠다는 겁니까?”

구멍 난 배는 바로 KV 그룹이다.

2조 5천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투기에 꼬라박았고, 그것을 모두 잃었다.

하지만 그 배를 만드는 데에 돈을 쓴 이들은 그저 덤덤할 뿐이다.

“뭐,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겠죠.”

“은행장님은 아니십니까?”

“저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피눈물을 흘리는 척이라도 할 순 있겠죠. 하지만 진짜 흘리는 건 아닙니다.”

“청와대에서 칼춤을 추려 할 텐데요?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테니까요.”

“어쩌겠습니까. 책임을 지고 나가는 수밖에.”

“불명예스러울 겁니다.”

“초가를 다 태워 먹는 것보단 났겠지요.”

은행장의 말을 난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들이 KV 그룹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오 회장이 들고 있는 무언가 때문이다.

답을 알고 나니, 생각하기 편해졌다.

“불명예를 피할 명분이 필요하시겠습니다.”

“역시, 듣던 대로 눈치가 빠르시군요. 아무리 은행장에, 국가 기관을 움직이는 책임자라고 해도 결국 다 나라의 것입니다. 정부가 다스리는 것이죠. 우린 그저 봉급만 받고 일할 뿐. 그리고 봉급은 항상 짜게 나옵니다. 누구나 노후를 대비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거기다 딸린 식구가 많다면 더더욱 그럴 테고요.”

이들이 원하는 건 명확하다.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여겨진다면 그때 내 손을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오대현 회장이 작정하고 장부를 들고 와 폭로전을 시작한다면 이들 모두 징역살이를 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자니, KV 그룹이라는 배가 좌초되어 그 책임을 지고 불명예 퇴직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그 두 가지 선택지를 없애고 싶다면 내가 내린 동아줄을 잡는 것이다. 하지만 잘못 잡았다가는 더 험한 꼴을 봐야 할 것이다.

“매우 현명하고 명석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젊은 나이에 그만한 회사를 이뤄낼 수 있었겠지요. 이번에도 역시 그러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절 시험에 들게 하시는군요.”

“항상 잘 헤쳐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뻔뻔한 인간들 같으니.

자기가 지금껏 받아 낸 돈은 토해 내기 싫고, 이대로 명예롭게 퇴직을 하고 싶다는 뜻 아닌가? 구역질이 나긴 했지만, 이들의 도움이 없다면 난 KV 그룹을 품을 수가 없다.

어렵다. 어려워.

함정은 매우 잘 팠으나, 이렇게 KV 그룹을 놓치는 건가?

“전혀 미동조차 없습니까?”

회사에 돌아온 내 표정을 보고는, 대충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권 대표가 눈치를 챈 듯했다.

“예. 그 영감탱이들, 끝까지 깨끗한 채로 나가고 싶답니다. 불명예스럽게 옷을 벗는 건 싫다는군요.”

“어차피 저희들 손을 들지 않아도 옷 벗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요?”

“적어도 감옥은 안 가니까요. 그래도 여지는 주더군요. 자신들을 명예롭게 해 줄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야 순순히 우리의 손을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방법이라는 게 뭘까요?”

“음-. 어렵네요.”

“아뇨. 사실은 쉽습니다. 오대현 회장의 치부를 드러내 골로 보내 버리는 거죠. 도덕적으로 먼저 질타를 한 다음에 이번 투자 실패 건을 한곳에 묶어 버리면 그의 경영 철학에 흠집이 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이 알아서 손을 주겠네요?”

“예. 정부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저들의 경영권을 박탈해 위기에 빠진 KV 그룹을 구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제가 짜잔 하고 등장하는 거죠.”

말은 쉽다.

하지만 오대현 회장을 도덕적으로 질타할 근거가 없다.

당연히 그는 이제까지 수많은 법을 어기면서 비자금을 조성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회사를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묻은 먼지들을 털어내 한곳에 모아 둘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을 터.

그러나 이미 여러 번 그의 뒤를 조사하고 회사를 파헤쳐 봤으나, 심각하게 문제를 삼을 만한 거리가 없었다.

“만약 여기서 브레이크를 밟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회사 인수를 위해 사 두었던 지분을 전부 팔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격이 워낙 떨어져서 손해는 좀 클 것 같습니다.”

“되레 제가 함정에 빠진 꼴이 되었네요.”

“아직 포기하지 않으시는 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실 수 있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 회장이 튼튼하게 블록을 하게 되면 결국 이 일도 흐지부지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주가도 정상을 되찾겠죠. 당장 그룹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이번 건은 아무래도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짓 하지 말고 그냥 여기서 멈추는 게 옳다.

“권 대표님. 내일이라도 당장 KV 그룹 지분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다시 원상복구를 시키려 할 때였다.

주머니 속에서 시끄럽게 울어 대는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오희진이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요?”

조금 묘한 인물이다.

첫째 오현수가 전화를 한 거였다면 오대현 회장의 전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후계자 순위에 한참 밀려나 있는 오희진이 전화를 걸었다.

지금 내가 제 아비랑 피 터지게 싸우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여자가 뜬금없이 이 시간에 전화를 건다?

단순히 내게 호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오대현 회장이 시켜서 전화를 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전화를 했다는 건데?

도대체 왜?

오희진은 멍청한 여자가 아니다.

재벌가 자식들 중에서도 가장 똑똑하다는 평을 받는 여자 아닌가?

“어쩌면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나는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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