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20화
이렇게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테라노스를 두고 J&H와 KV 그룹이 자웅을 겨루게 된다.
나는 일단 투자 신청서를 테라노스 측에 넣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리는 중이다.
“회장님.”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권오준 대표가 서류를 들고 회장실을 찾았다.
“어떻게 됐습니까?”
“총 5개의 국내 투자사들이 테라노스에 손을 건넸습니다. 저희까지 합치면 6개가 되겠군요.”
“아마 KV 그룹 쪽이 우세하겠죠?”
“예. KV 그룹이 투자를 하겠다는 돈의 규모 자체가 다릅니다. 무려 1조 원을 투자금으로 내놓았다는군요.”
나는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어느 기업을 인수하는 것도 아닌데, KV 그룹이 1조 원이나 투입을 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KV 그룹을 뿌리부터 흔들려고 한다면 1조 원보다 더 많은 돈을 쓰게 해야 한다.
“그럼 우린 1조 3천억 정도로 가 볼까요?”
“진심으로 투자를 하시려는 겁니까?”
“아니요. KV 그룹 오 회장님이 어디까지 승부욕이 있는지 한번 보려고요. 전 테라노스에 투자할 생각 없습니다.”
“아직 조사 중에 있지만, 에디슨 키트가 정말 존재한다는 증거들만 나오고 있습니다. 테라노스의 기술력은 진짜일지도 모릅니다, 회장님.”
나도 안다. 그래서 똥줄이 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어디에다 돈을 걸지 결정을 끝낸 상태다.
난 테라노스가 사기라는 것에 칩을 던졌다.
“저도 한번 큰 도박을 해 보렵니다. 우리 쪽에서 1조 3천억을 불렀다는 정보를 KV 그룹 쪽에 흘리세요. 오 회장이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자고요.”
“회장님은 최대한 판돈을 키우고 싶으신 거군요. 잘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패를 흔들어 보죠. 만약 오 회장이 콜을 외치면 더 가격을 올릴 생각이십니까?”
“예. 그 양반 성질을 살살 긁으면서 판돈을 올려 보려고요. 제가 들어보니, 테라노스가 무식하게 증자를 해서 규모를 늘리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를 투자하든 전부 받아들인다는 뜻이죠.”
내가 이처럼 테라노스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건 바로 그들이 보여 주는 행동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홈즈라는 여자는 여러 방송에 나와 테라노스를 홍보하며 에디슨 키트라는 놀라운 발명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회사에 투자할 것을 적극 권유했는데, 문제는 한도 없이 투자금을 계속해서 받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이런 회사들은 일정 비율이 되면 투자금을 받지 않고 창구를 닫아 버린다. 그래야 자신의 지분과 경영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홈즈의 행동을 보면 마치 자신의 경영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보였다.
에디슨 키트라는 대박 아이템이 있는데 무식하게 투자를 받기만 한다?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행동이었다. 그것이 내 마음을 굳어지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도 보는 걸,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 * *
“KV 그룹까지 합해서 총 6군데의 기업이 투자 의향을 밝혔습니다.”
“그중 4곳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거겠지?”
“예. 그런데 문제는 J&H가 작정하고 가격을 세게 불렀다는 점입니다.”
“얼만데?”
“1조 3천억입니다.”
순간 오대현 회장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새끼 아주 제대로 해 보자는 거구먼.”
“예. 1조 3천억을 불렀다는 건 결국 돈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뜻 아닙니까? 우리 KV 그룹과 한번 싸워 보겠다는 도발이죠.”
“아니. 그 새끼는 왜 내가 뭐만 하려고 하면 싸우려고 안달이 난 거야? 이 정도면 의도적인 거 아니냐?”
그 말에 누구 하나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미 한번 J&H에 패배한 경험이 있는 임원들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내가 그놈한테 지면 전경련에 다시는 못 나간다. 공식 석상에 얼굴도 못 비출걸? 내가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한테 두 번이나 당했다고 다 손가락질할 테니까.”
오 회장은 이진석을 자기 딸과 이어 주려고 했다. 그만큼 능력 있는 놈이니까.
그 젊은 나이에 벌써 금융 그룹과 건설 그룹을 이끌고 있지 않은가? 보면 볼수록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적인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
놈은 악당이다.
오대현 회장,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 드는 천하의 악당!
그리고 악당이라면 당연히 사뿐히 지르밟아 줘야 하지 않겠는가.
“네 생각은 어떠냐?”
회장의 시선이 향한 곳은 큰아들 오현수였다.
그룹을 승계받기 위해 차근차근 올라와 지금은 한 계열사를 맡고 있는 사장이 되었다.
보통은 그룹 승계 과정 때마다 여러 말들이 많은데, 오현수는 일 처리 능력도 높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당연히 임원들 사이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다.
그리고 그는 항상 사태를 냉정하게 살피는 장점이 있었다.
“유치한 가격 경쟁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테라노스에 1조 원을 투자하는 것도 사실 불안합니다.”
“넌 테라노스를 믿지 못하는 거냐?”
“그만한 가치를 아직 보여 준 적이 없으니까요. 실험 결과야 마음만 먹는다면 조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테라노스는 여지껏 확실한 퍼포먼스를 보여 준 적이 없어요. 그냥 말만 번지르르할 뿐이죠.”
“우리 쪽 전문가들의 생각은 많이 다르던데? 골드만삭스가 그걸 모르고 테라노스에 돈을 욱여넣었을까?”
“저는 그저······.”
“됐다. 넌 그냥 싸워 보기도 전에 도망치자는 거구나.”
오대현 회장은 인상을 쓰며 이번에는 둘째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도 말해 봐.”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현중이 떠들어 댔다.
“이건 명백한 도발입니다.”
“도발?”
“예. 예전 LK 금융 때도 있겠다, J&H가 지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콧대를 높이 세우는 거죠. 우리를 아주 우습게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여기서 물러나신다면 사람들이 우리 KV 그룹을 비웃게 될 겁니다. 제대로 한판 붙어 보시죠. KV를 만만하게 보면 어떻게 되는지 따끔한 가르침을 주셔야 합니다.”
싸움꾼 기질이 다분한 둘째의 대답은 아주 시원시원했다.
오대현 회장은 조금이나마 속에 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크하하-! 그래. 역시, 우리 둘째는 참 호쾌하구나. 네가 난세에 태어났다면 호기롭게 들고 일어나 이름을 남겼을 게다.”
그러면서 못마땅한 첫째에게 핀잔을 주었다.
“너도 저런 건 좀 배워. 방구석에 틀어박혀 생각만 한다고 뭐가 나와? 무서워서 피하기보다는 당당히 부딪혀 봐야지. 그렇게 배우는 거다.”
“하지만 회사의 사활을 걸면서까지 싸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첫째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자 오 회장은 기분이 더욱 상해 버렸다.
“이놈이 끝까지 말대꾸야! 애비가 하는 말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거냐? 내가 이 회사를 어떻게 이끌었는지 몰라서 그래?!”
“······죄송합니다.”
결국 오현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오 회장의 화를 조금이나마 풀리게 했다.
오 회장은 화를 누그러뜨린 뒤 임원들에게 패를 넘겼다.
“자. 이제 자네들이 말해 봐. 우리가 최대한 자금을 끌어모으면 어느 정도 돼?”
오 회장의 말에 임원 몇몇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여기서 더 판돈을 올리시면 재정적으로 KV 그룹이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예. 이런 도발에 넘어가시기보다는, 차라리 테라노스와 협상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우리 KV 그룹은 유통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으니, 더욱 원활하게 협력을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오 회장의 귀에 저런 말들이 들어올 리 없었다.
그는 오히려 호통을 치며 임원들을 다그쳤다.
“이 사람들이 벌써부터 줄 서는 거야, 뭐야! 현수가 지금 회장인 줄 알아?! 아직 나 정정해!”
“회장님. 그런 뜻으로 말씀을 드린 게 아니라······.”
“시끄러워! 가격이나 말해. 얼마야? 우리가 최대한 땡길 수 있는 게.”
그러자 기회를 엿보던 임원 하나가 물었다.
“은행을 끼는 것까지 가격에 들어가는 겁니까?”
“그래. 은행까지 낀다면.”
“그럼 2조 5천억 원까지 충분히 마련할 수 있습니다.”
“오호. 그렇단 말이지?”
“예. 그 정도 돈이면 J&H도 움찔할 겁니다.”
그러나 무작정 그 의견에 임원들이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J&H의 자금 사정이 정확히 어떤진 알 수 없으나, 2조 5천억은 그쪽에서도 충분히 준비할 수 있을 겁니다. 절대 머니 게임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회장님.”
“뭐야. 그 말은 우리가 돈으로 J&H한테 밀린다는 거야? 돈은 어떻게든 구하면 될 거 아냐?”
“하지만 요즘 불경기에 그룹 사정이 예전보다 안 좋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걸 아니까 지금 내가 이런 사업을 벌이고 있는 거지! 자네들이 일만 똑바로 했으면 내가 굳이 외국 뽕 맞은 새끼들의 회사에 투자를 하려 했겠냐고!”
오 회장은 애꿎은 임원들 탓을 해 댔다.
하지만 딱 까 놓고 얘기해서 임원들 잘못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계속되는 불황 속에 KV 그룹도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건 사실이고, 그것을 잘 대처하지 못한 임원들의 잘못도 있기 때문.
그래서 이런 한 방을 노려 회사를 일으키려는 오 회장의 마음이었다.
“최대한 돈 끌어모을 수 있을 만큼 끌어와. 그리고 무조건 테라노스한테 사인 받아. 그냥 화끈하게 2조 5천억 부르라는 얘기야. 그 정도 숫자면 그쪽에서 무조건 하겠다고 두 손 들겠지.”
오 회장의 지시가 떨어지면서 임원들도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았다.
한번 정한 마음을 절대 바꾸지 않는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지울 수가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중에서도 오대현의 첫째 아들인 오현수는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음을 알았지만, 흥분감에 폭주하기 시작한 제 아버지를 막을 만한 힘은 없었다.
그저 테라노스가 떠벌린 만큼 값을 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 * *
2조 5천억.
이것이 KV 그룹이 내게 보내는 답이었다.
권오준 대표는 이 정도로 가격이 뛸 줄은 몰랐는지 조금은 넋이 나가 보였다.
“미끼를 던지긴 했습니다만······ 이 정도로 대어를 낚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나도 끽해봐야 1조 5천억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 회장은 노년의 힘이라도 보여 줄 생각인지, 2조 5천억이라는 거금을 베팅에 걸었다.
“테라노스에서 저희한테 가격을 더 올릴 거냐고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누가 봐도 KV 그룹이 전력을 다해 돈을 쥐어 짜낸 금액 아닙니까? 그래서 저희는 생각 없다고 했죠. 그런데 혹시라도 KV 그룹이 투자하려는 돈에서 깎으려 든다면 그땐 저희한테 연락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권 대표는 깔끔하게 마무리까지 해 주었다.
혹시라도 KV 그룹이 우리가 발을 빼는 것을 보고 투자 금액을 낮추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일로 다시 한번 테라노스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1조 원도 아니고 무려 2조 원이 넘는 금액이다.
이미 90억 달러에 가까운 투자금을 모았다고 들었는데, 거기서 2조 원을 더한다는 건 엄청난 욕심이고, 굉장히 어리석은 짓이다.
물론, 그들만의 계산법이 있긴 하겠다만 나는 아무짝 쓸모도 없는 계산법이라 생각한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네요.”
“예. KV가 돈방석에 앉을지, 아니면 저희가 성문을 부수고 진입할지 두고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정확히 언제 결과가 나오는지 알 수 없는 게임이다.
항상 나는 결과를 아는 게임을 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다르기에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