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19화
“아이고-! 이게 누구야?”
오대현 회장은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우리 이 회장이 여기까지 다 와 주고, 내가 몸둘 바를 모르겠네?”
“초대를 해 주셨으니, 당연히 와야죠.”
“우리 사돈이란 양반은 내가 오라고 전화까지 했는데도 씹었어. 요즘 그 양반이랑 친하게 지낸다며?”
사돈이라 함은 현광의 정영준 회장을 말하는 것이다.
“최근에 일 때문에 몇 번 만나 뵙기는 했죠. 저한테 시간 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흐흐. 그 정도면 시간 많이 낸 거야. 그 양반도 나이가 들어서 슬슬 외로운 게지. 아무튼, 그런 괴팍한 영감탱이 얘기는 뒤로하고, 이쪽으로 와 보시게.”
오 회장은 나를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더니, 누군가를 불러들였다.
그러자 어떤 여자가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내 딸이야. 이제 27살. 어때? 예쁘지? 다행히 날 안 닮고 지 애미를 닮아서 얼굴도 고와. 공부도 잘해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을 나왔고.”
오대현 회장의 딸이라면 재벌계 내에서도 꽤 유명한 거로 알고 있다.
매번 사고나 치고 다니는 다른 재벌집 자식들과는 다르게 착실히 공부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그룹 경영에도 조금씩 참여를 한다고 말이다.
또한 얼굴도 반반해서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안녕하세요. 오희진이라고 해요.”
“아, 예. 반갑습니다.”
오희진의 두 뺨이 붉게 물들며 내가 건네는 손을 맞잡았다.
“둘이 친구뻘인데, 서로 번호도 교환하고 한번 따로 만나 보기라도 해. 둘이 아주 선남선녀야.”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이긴 한데, 나는 그냥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불편한 만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버지.”
저기서 누군가가 여자를 끼고 다가오는 게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둘째 오현중이었다.
그 옆에는 백수진이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묘한 우리들의 관계를 오 회장은 아는지 모르는지 소개부터 해 주었다.
“아. 둘은 구면이지? 내 둘째 아들이야. 그리고 그 옆은······ 여자친구라고 했나?”
“제가 수진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아버지. 그리고 여기 두 사람 대학 동기예요.”
“응? 그래? 허허. 신기한 인연일세. 내가 그렇지 않아도 우리 희진이를 소개해 주고 있었거든?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냐?”
“하하. 그러네요, 아버지.”
오 회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무리에 끼어야만 했다.
백수진은 자꾸 나를 힐끔거렸고, 나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무시했다. 이미 수진이에 대한 미련은 사라진 지 오래고, 별로 말을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 샴페인을 가볍게 한 잔 들이켠 오현중이 내게 슬쩍 말을 걸었다.
“요즘 어딜 가나 J&H 얘기밖에 없습니다. 성장세가 무시무시하니까요. 최근에 한라 그룹을 인수하고 나서 현광에 계열사 몇 개를 아주 비싼 값에 팔지 않으셨습니까? 다음에는 또 뭘 준비하고 계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이놈과 나눌 얘기는 없었지만, 먼저 저렇게 화두를 던져 주니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요즘은 해외 쪽을 많이 바라보는 편입니다. J&H는 원래 국내보다 해외에 있는 기업들이 더 높은 수익을 올릴 거라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회사 하나가 있지 않습니까? 아마 아실지 모르겠네요. 테라노스라고 말입니다.”
테라노스라는 말에 오현중과 오 회장, 두 사람의 표정이 일순 바뀌었다.
다른 이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있던 오 회장은 귀신같이 우리들 얘기를 들었는지 얼른 다가와 말했다.
“방금 테라노스라고 했나?”
“예. 에디슨 키트라는 것을 발명해 현재 투자금을 끌어모으고 있는 곳 말입니다. 그 에디슨 키트라는 거, 참 대단하더군요. 피 한 방울로 250가지의 질병을 알아낼 수 있다니. 만약 그곳과 계약하여 유통권을 챙길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돈방석 아닙니까?”
그러자 오 회장의 이마에 핏줄이 올라왔다.
그는 크게 헛기침을 뱉으며 주변부터 물렸다.
“내가 우리 이 회장과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너희들이 손님들을 대신 좀 맞이해 주거라. 이 회장은 잠깐 나랑 조용한 곳으로 갈까?”
KV 그룹은 이번 테라노스 회사에 큰 투자금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시, 오 회장도 그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우리 둘은 따로 방에 들어가 각자 자리에 앉았다.
“일부러 날 도발하려고 그런 얘기를 꺼낸 건가?”
“도발이라니요?”
“모른 척하지 마. 내가 테라노스에 크게 한탕 하려 한다는 거 이 회장도 알고 있잖아.”
나는 살짝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설마, 상도덕 같은 걸 따지시려는 건 아니겠죠?”
“상도덕? 하하. 이 친구가 지금 또 내가 침 발라 놓은 걸 빼앗으려 드네? LK 금융 때도 그러더니, 또다시 내 뒤통수를 치려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섭섭합니다. 저는 그저 회사의 이익만 보고 움직일 뿐이에요.”
“진심이야? 나랑 한판 싸워 보겠다고? 저번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을 텐데?”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선택이야 테라노스에서 하지 않겠어요? 누가 더 많은 돈을 들이미느냐에 따라 선택지를 고르겠죠.”
오 회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였지만,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참아 냈다.
“뜬금없이 왜 여기에 나타났나 했더니, 내 성질 긁으려고 온 거였네.”
“그럴 리가요. 저는 진심으로 회장님의 생신을 축하드리러 온 겁니다.”
“좋아. 그럼 생일 선물 주는 셈 치고 테라노스 건은 손 털어.”
“선물은 제가 다른 거로 드리죠. 테라노스 경쟁에 저도 한번 참여해 보렵니다. 오랜만에 제대로 싸워 보고 싶지 않으세요?”
“좋아. 어디 한번 해 봐. 저번에는 졌지만, 이번에는 절대 안 져. 아예 내가 짓밟아 버릴 거야. 알겠어?!”
크게 성질을 내면서 오 회장은 먼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무래도 단단히 각오를 한 거 같은데, 나한테는 큰 이득이다.
이제 볼일은 다 봤으니, 나도 그만 돌아가 볼까?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을 나가려고 하는데, 오 회장의 셋째 딸, 오희진이 조심스레 내게 다가왔다.
“아까 제가 명함을 드리지 않은 것 같아서요.”
그녀도 명함이 있었다.
오희진이 마케팅 팀장으로 있는 줄은 몰랐다.
나도 그녀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내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혀 있는 아주 간단한 명함.
그녀는 내게 다이렉트로 전화를 할 수 있는 번호를 갖게 됐다.
“혹시 제가 다음에 연락하면······ 받아 주실까요?”
“방금 오 회장님이 저 방에서 극대노하며 나오는 걸 보셨을 텐데요. 저와 연락하는 걸 꺼리실지도 모릅니다.”
“원래 사업하는 사람들끼리는 어제 싸우다가도 다음 날이 되면 웃으면서 악수를 하잖아요.”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받으시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
생각보다 시원시원한 면이 있는 여자다.
한라 그룹을 강제로 빼앗고 나서 이한별과는 연락이 완전 끊겼다.
그도 그럴 게, 내가 듣기로 이상현 회장이 술만 먹는 폐인이 되어 망가졌다고 들었다. 그런 제 아비를 보고 차마 나와 연락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희진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아주 거한 한 방을 KV 그룹에 먹여 줄 생각이기 때문이다.
* * *
“잘 만나고 오셨습니까?”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던 권 대표는 허기진 나를 위해 미리 음식까지 준비해 놓았다.
파티에 갔는데 정작 아무것도 먹고 오지 않았다.
“예. 아주 정정하시더군요.”
“테라노스에 대한 얘기는······.”
“그것도 하고 왔죠. 저희가 테라노스 투자에 참여한다 하니까 아주 대노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한판 제대로 싸워 보자고 도발까지 했어요. 오 회장, 오랜만에 아랫도리가 불끈했을 걸요? 반응 보니까 단단히 각오를 한 거 같더라고요.”
나는 허겁지겁 음식부터 입에 넣었다.
그러는 동안 권오준 대표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J&H는 참 하루가 멀다 하고 다른 기업과 싸우는 것 같아요. 이러다 다리라도 삐끗하는 건 아닌지 매번 노심초사입니다.”
나는 열심히 놀리던 젓가락을 멈췄다.
권 대표가 걱정하는 바를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의 스타일이잖아요. 싸워서 갖고 싶은 걸 뺏는다. 리스크가 큰 만큼 리턴도 큽니다. 이번에도 그럴 예정이고요.”
“정말 KV 그룹과 크게 싸워 볼 생각이십니까?”
“아뇨. 진심으로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대신, 싸우는 척은 해야겠어요. 그것도 정말 혼신을 다해서 싸울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권 대표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뭔가 다른 의도가 있으신 거 같은데.”
“KV 그룹이 이번 베팅에 큰 실패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손실한 금액이 크다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겠죠.”
“KV 그룹이 휘청거리면서 내부부터 분열될 조짐을 보인다면, 그것을 보고 은행이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다면?”
“그렇게 되면 회사가 파산한다는 건데······ 설마 회장님께서는 지금 KV 그룹을 노리고 계신 겁니까?”
“그 거대한 회사를 씹어 삼키려면 잘게 부숴 놓아야겠죠? 저는 테라노스가 망치 역할을 할 거라고 봅니다.”
그는 내 말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회장님께서는 테라노스가 사기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그 정도의 기술력이 뜬금없이 나타났어요. 뭔가 개발 초기부터 말이 나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런 기술을 개발하려면 보통 몇 년은 걸리는 게 정상 아닙니까?”
테라노스의 행보는 이상하리만치 수상하다.
역대급이라는 그 기술력이 개발되기 전, 어떠한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는 미리 냄새를 맡고 그 기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을 텐데, 그런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대형 투자사들이 대거 투자에 참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엘리자베스 홈즈라는 여인이 그만큼 PR을 잘 하고 있다는 거겠죠. 영상 보셨어요? 이쁘장한 얼굴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군중을 휘어잡더군요. 현장에 있었다면 저도 홀딱 넘어가 돈을 던져 줬을지 몰라요.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를 후원하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 봅니다.”
테라노스와 그 기술력이 호평을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있어 그녀는 각종 TV에 출연하고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밀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배후에 대형 투자사 못지않은 세력이 있을 것 같아요. 아! 물론, 제 개인적인 직감이긴 합니다. 만약 제 직감이 틀렸다면 전 병신 짓을 하고 있었던 거고, KV 그룹은 남 부럽지 않게 돈을 벌어들이겠죠.”
이번에는 미래 커뮤니티 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최근까지 본 미래에 의하면 여전히 테라노스는 잘나간다.
즉, 내 결정이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직감을 따르고 싶었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말이다.
“전 회장님을 믿습니다. 이제까지 항상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가셔서 성공했으니까요. 이번에도 분명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불안합니다. 제가 틀렸을 가능성이 높아서요.”
“그래도 저희가 크게 손해 보는 건 없지 않습니까?”
“KV 그룹이 돈방석에 앉는 꼴을 보면 매일 배가 아플 것 같은데요?”
“하하. 우리가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벌면 되겠죠. 일단 회장님 말씀대로 테라노스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를 해 보겠습니다. 정말 배후에 누군가가 없는지, 에디슨 키트라는 게 정말 존재하긴 하는지 말입니다.”
항상 이럴 때면 권 대표가 참 큰 힘이 된다.
누군가를 이렇게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건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날 믿고 따라와 준다.
그런 그의 기대에 나는 크게 부응을 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