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16화
별 쓸모도 없어 보이는 계열사들을 2,300억이란 거금으로 팔 기회를 얻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내일이면 정식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계열사를 완전히 현광에 넘기려 했다. 그런데 때아닌 밤중에 의외의 손님이 나타났다.
“현광 자동차 부사장, 정태호라고 합니다.”
부사장 정태호라고 한다면 차기 현광 자동차 그룹의 주인이 될 사람이다.
현광 자동차 그룹의 회장, 정주용의 장남이지 않은가?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현광 자동차가 나와 정영준 회장의 딜을 눈치챈 것이다.
“반갑습니다. J&H 회장, 이진석입니다.”
우리 둘은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와 회의 중이었던 권 대표는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차라도 한잔하시겠어요?”
“아무거나 주셔도 됩니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나는 정말 아무거나 가져오라고 비서에게 시켰고, 그동안 정태호는 나를 관찰하는 듯한 눈빛을 띠었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 회장님이 보내신 겁니까?”
“예?”
“현광 자동차 그룹 정주용 회장님이 보내신 거냐고요.”
“아, 예.”
“대충 무슨 내용인지는 예상이 가는군요. 한라 그룹에 있는 계열사들을 현광 건설에 넘기는 것 때문입니까?”
정태호 얼굴에 당황함이 묻어 나왔다.
내가 계속해서 쏘아붙이자 그는 짧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젊으신 분이라 그런지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시는군요.”
“아시다시피 금융계에서는 시간이 금이라서 말입니다.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습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시죠. 정 회장님이 얼마를 제시하셨습니까?”
“······.”
직설적인 말에 놀란 것인지 정태호 부사장은 눈만 껌뻑거렸다.
답답한 양반 같으니.
이래서 정태호 부사장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흔들리던 자동차 그룹을 안정적으로 다듬은 정주용 회장의 능력은 의심할 것이 없다. 하지만 후계자로 정해진 정태호 부사장은 능력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오늘 보니 왜 그런지 알 것도 같다.
어차피 서로가 무슨 의도로 대면을 하게 되었는지 뻔히 아는데, 괜히 가식적으로 말을 숨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뭐랄까. 이 양반은 판단이 느린 것처럼 보였다.
딱히 급할 것은 없었기에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어느새 비서에게 주문한 차가 나오고 정태호 부사장은 조심스레 운을 뗐다.
“회장님은 현광 건설에 넘기는 계열사에 뭐가 있는지 아시는 거겠죠?”
“알고 있으니까 그런 터무니없는 가격에 계열사를 넘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걸 잘 알고 있으신 분이 현광 건설과 거래를 하기 전에 저희에게 언질을 줘도 괜찮았을 텐데요?”
“뭐, 양측을 저울질하며 가격 경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런데 그건 제가 직접 찾아가는 고생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보세요. 현광 자동차가 직접 사람을 보냈잖아요.”
“그건 그렇군요.”
정태호 부사장은 차를 살짝 음미한 다음 말을 이었다.
“2,500억이면 받으시겠습니까?”
쪼잔하게 고작 2,500억이라니.
2,300억보다 높은 금액이기는 하나, 2,500억을 받기 위해서는 현광 건설과의 거래를 깨야 한다. 그것은 곧 신뢰를 저버린다는 뜻이 되는데, 이건 차후에 문제가 된다.
재벌들 사이에는 소문이 무척 빠르다. 그리고 한번 신뢰를 잃어버린 놈과 손을 잡는 재벌은 없을 것이다.
즉, 그 정도의 손해를 입어도 괜찮을 정도의 값을 제시해야 하는 게 옳은 일이다.
충격을 줄 만큼의 가격 제시였다면 고민을 해 봤을 텐데, 이건 기본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부사장님. 그 2,500억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숫자입니까?”
“예?”
“2,300억에서 고작 200억을 올린 금액? 이건 신뢰에 대한 문제입니다. VVIP들과의 신뢰는 절대적이고요. 그것을 깨트리는 가격이 고작 200억? 지금 장난하십니까?”
“200억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닐 텐데요?”
“200억은 저한테 껌값도 안 됩니다. 만약 그런 가격이 정 회장님에게서 나온 거라면 실망이군요. 조금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하실 줄 알았는데”
정태호 부사장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제 아버지까지 거론하며 푹푹 찌르니 성질이 점점 오르고 있는 것이다.
“현광 자동차면 제안을 화끈하게 할 줄 알았더니, 이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요.”
“지금 말 다 하셨습니까?”
“예. 다 했으니까 그만 돌아가십시오. 전 거래를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꼴에 재벌집 아들이라고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인 듯했다.
“이보세요, 이진석 회장님. 내가 누군지 모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잘 압니다. 운 좋게 금수저 물고 태어나신 분이죠. 혹시라도 현광 자동차를 후광으로 삼고 저한테 막말을 하시려는 거라면 그만두세요. 현광이란 이름에 쫄지 않습니다.”
“하-! 아무리 현광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해도 천하 그룹 다음으로 이름값이 먹힌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그래서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말라고 이러는 거 아니오. 왜 남의 집 싸움에 끼어들어서 일을 크게 만들려고 들어?”
“먹음직스러운 두 고래가 실컷 싸워 주겠다고 하는데, 그걸 만류할 상어가 있을까요?”
“뭐, 뭐요?!”
나는 잔뜩 흥분한 정 부사장을 앞에 두고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원래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건 그냥 싸움이 아닙니다. 무려 현광 그룹이라는 거대한 자본을 두고 벌이는 영토 전쟁이에요. 아주 재밌을 거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분을 현광 건설에 넘긴 거다?”
“솔직히 말해서 가격을 좀 충격적으로 제시하셨으면 진짜 고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방금 전 부사장님의 제안을 듣고 보니 현광 자동차의 진심을 알겠더군요. 당신들은 아직 이 전쟁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어요.”
“고작 2.3%의 지분 때문에 흔들릴 현광 자동차가 아니오.”
“글쎄요. 그 2.3%의 지분이 복병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르죠. 지금 그 지분을 갖고 놀고 계신 분이 바로 정영준 회장님이십니다. 그분도 당신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는 걸 알고 있죠. 즉, 이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노장의 마지막 전쟁이라는 겁니다. 모든 걸 한꺼번에 불태울 그 열정을 과연 현광 자동차가 무시만 할 수 있을까요?”
정영준 회장은 자기 아들 대에서는 결코 현광 그룹이 재건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죽기 전에 모든 걸 끝내려 하는 것이다.
그 지독한 집착이 적들에게는 엄청난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걸 아니까 현광 자동차에서도 부사장님을 보낸 거겠죠. 그런데 내거는 조건을 보니, 딱히 위기를 느끼는 것 같진 않군요.”
“당연하지! 다 늙은 그런 영감의 고집에 현광 자동차가 흔들릴 줄 알고? 좋아요. 그럼 딱 까놓고 말해 봅시다. 정확히 얼마를 제시해야 흔들리겠소?”
“보통 사람을 놀라게 하는 데에는 돈지랄만큼 좋은 게 없죠. 최소 10배는 튕겨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 열 배? 2.3% 지분을 2조 3천억에 팔겠다고? 제정신이오?”
“아님 말고요. 전 가격을 정확히 말씀드렸습니다. 2조 3천억이 아니면 안 팝니다.”
2,300억도 상당히 비싼 값이었는데, 그에 10배나 달하는 2조 3천억.
이건 그냥 뭘 줘도 팔지 않겠다고 못을 박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정 부사장도 그것을 알기에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현광 자동차와 등을 돌린 게 얼마나 큰 실수인지 뼈저리게 느낄 거요.”
“제가 이제까지 마주한 분들은 항상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후회할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제가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남에게 져 본 적도 없고요. 오히려 절 적으로 만드는 게 더 후회스러우실 겁니다. 제가 은근 지독한 구석이 있어서요.”
“요즘 돈 좀 벌었다고 기고만장한 거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J&H가 우리나라 4대 대기업 수준에 들어온 건 아니야. 삐끗 발 잘못 놀렸다가는 초가까지 다 태워 먹는다는 거, 명심하시오.”
별로 무섭지도 않은 경고를 남기고 정태호 부사장이 회장실 밖을 나갔다.
현광 자동차에서 사람을 잘못 보낸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뭔가 저들도 준비한 게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이지 않은가.
난 현광 자동차와 현광 건설이 더욱 치고받고 싸웠으면 한다.
두 대기업 모두 망가질 대로 망가져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할 때가 바로 나의 시간이 될 테니까.
* * *
“완전 사리 분별이 되지 않는 놈입니다. 그래도 그 정도의 그룹을 일으켰다기에 조금은 개념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젊은 놈이 운 좋게 성공해서 허영심에 가득 찬 놈이었습니다. 어른을 대하는 싸가지도 없고요.”
장남이 가져온 소식에 정주용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생각을 잘못했다.
이놈을 보낼 게 아니라 그냥 실무진을 보내서 쇼부를 봤어야 했는데 말이다.
이진석이란 놈과 덜떨어진 장남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넌 화만 내고 왔다는 거냐?”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2조 3천억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쯧쯧. 넌 대체 누굴 닮아서 대가리가 그 모양인 게야?”
“예?”
“내가 언제 그놈한테 가서 가격을 제시하고 오라 했어? 대충 그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만 알아 오라고 했잖아. 그리고 최대한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놈이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고 싸가지 없게 몰아붙이기만······.”
“그럼 고개를 숙이고 그놈 기분에 맞춰 줬어야지.”
순간 정 부사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숙이라니?
이제까지 그는 남에게 고개를 숙이며 살아온 적이 없다.
현광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남들과는 다른 왕자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제가 그놈한테 고개를 숙이라고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아니면? 넌 자동차 그룹이 건설 그룹에 넘어가는 꼴을 그냥 지켜만 볼 거냐?!”
“J&H가 없어도 자동차 그룹은 충분히 지킬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우리가 쥐고 있는 지분이 51%라도 되는 줄 알아? 기관과 은행이 건설 그룹 쪽 손 들어주면 그날로 경영권 박탈이야. 이번에 한라 그룹 보고 넌 느껴지는 게 없는 게냐? 대기업은 철옹성이 아니야. 언제든 외적에게 성안을 약탈당할 수 있다는 걸 왜 모르는 거야!”
그제서야 정 부사장도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이진석이 상어의 시점으로 구경하겠다는 고래들의 싸움.
그것이 점점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영준 그 새끼가 얼마나 지독한 놈인데. 그리고 우리 형제들 중에서 가장 머리가 비상한 놈이었어. 그놈이 괜한 고집으로 현광 자동차를 가져가 보겠다고 저러는 줄 알아? 우리가 모르는 꿍꿍이가 있으니까 2,300억이라는 거금을 줘서라도 지분 확보에 들어간 거야.”
정주용 회장은 한심한 제 아들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쯧쯧. 그런데 현광 자동차의 후계자라는 놈이 든든한 우군이 될 수도 있는 놈한테 훈계질을 하는 꼴이라니. 솔직히 말해서 네가 그놈보다 나은 게 뭐냐? 내 아들로 태어났다는 거 빼고 잘난 게 있어?”
“아, 아버지!”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아, 이놈아! 그러니까 임원들 사이에서 네 능력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잖아.”
“가, 감히 누가 그런 얘기를 한답니까?”
“시끄러워! 지금이라도 가서 그놈한테 가서 사과해. 모든 게 다 오해였다고. 그놈과 아군이 될 순 없어도 적으로 만나진 말아야지. 명심해라. 우린 더 이상 과거의 현광이 아니야. 언제든 적의 공격에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다.”
제 아비에게 호통만 듣고 쫓겨난 정 부사장은 얼이 빠진 얼굴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놈한테 다시 돌아가서 고개를 숙이고 오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한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언제든 적의 공격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정 회장의 마지막 말이 자꾸만 머리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