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15화
“그래. 쇼부는 봤고?”
“예. 깨끗하게 백기 들고 항복하더군요. 교도소만큼은 가지 않게 해 주겠다고 하니,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일을 마치고 나서 나는 정영준 회장에게 승전보를 알렸다.
그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덤덤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경영권은 언제 가져오는 거지?”
“내일 이 회장이 자진 사퇴를 할 겁니다. 그때 맞춰 회장님도 검찰에 언질을 주세요.”
“어차피 그놈들도 이번 수사에 별 관심이 없었어. 빨리 끝내 줬으면 할 거다.”
정영준 회장의 말대로 검찰은 이런 심부름 노릇을 하며 누군가를 공격하는 게 영 마뜩잖을 것이다. 이들이 진심으로 칼을 뽑아 화풀이를 하기 전에 중재를 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럼 내일 싹 다 가져오는 건가?”
“저한테 회장직을 넘기는 그림으로 그리자고 했으니,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문제는 대주주들을 어떻게 설득하냐죠.”
“무슨 설득?”
“회장님에게 팔아야 할 계열사들이요. 아마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여길 겁니다.”
“흐흐. 단돈 수십억도 안 하는 걸 수천억이나 주고 가져오는데 불만을 가질 놈이 어디 있어? 아마 이게 뭔 상황인가 싶어서 발 빠르게 조사부터 할걸?”
내 예상도 그렇다.
겉으로 보기에는 회사를 장악하자마자 마치 투기꾼처럼 회사를 갈가리 찢어 팔아넘기는 것으로 보일 터. 그러나 그 값이 무려 수천억에 호가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쌍수 들고 환영하게 될 것이다.
“후딱 해치워서 가져와. 그래야 내 돈 가져갈 수 있을 거야.”
“LTE급으로 빠르게 가져올 테니 돈만 준비해 두십시오.”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손해인 거 같단 말이지.”
“그럼 지금이라도 없던 일로 하시든가요.”
“됐어, 이놈아. 네놈이 약속을 깨고 가격이나 안 올리면 다행이지.”
“제가 그런 양아치처럼 보이십니까?”
“뭐, 지금은 누가 봐도 네가 양아치야.”
양아치라고 불려도, 남들이 평생 일해도 가질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만 있다면야 상관없지 않은가?
거기다 이건 J&H의 무궁한 발전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현광 그룹 정영준 회장이 챙겨 주는 2,300억의 돈을 어디다 쓸지 벌써부터 고민이 된다.
* * *
이상현 회장은 약속대로 모든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귀신같이 언론에서 한라 그룹 때리기를 멈추고 이 회장에 대한 수사 내용도 보도하지 않았다.
검찰도 대충 수사를 하는 시늉만 하더니 결국 무혐의로 처리를 했다. 당연히 국민들은 연이어 터지는 연예 기사나 그 외의 것들에 정신이 팔려 이 회장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이 사태를 예의 주시했다.
어떤 세력이 이 모든 걸 설계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중심에는 J&H가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에 오늘 제가 한라 그룹의 선장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며, 절대 여러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주주총회를 통해 대주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각 기관과 금융사에서 파견된 대리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여러 가지로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들이었다.
“회장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그전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한라 그룹은 J&H로 흡수가 되는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희가 들고 있는 지분이 대폭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요.”
“그 말씀은 J&H와 합병이 되는 걸 반대한다?”
“주주들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지분을 전부 지킬 수만 있다면 합병을 한다고 해서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J&H의 브랜드 값어치가 높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지분이 일부 감자가 되고 소각이 된다면 반대할 수밖에 없죠.”
이건 금화 은행이 다른 대주주들을 대표해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분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만약 제가 한라 그룹을 J&H에 합병시키려 한다면 그땐 여러분이 들고 있는 모든 지분을 사들일 겁니다. 그것도 높은 가격에 말이죠. 손해 보는 일은 없으실 거예요. 그러나 당장 한라 그룹을 합병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그런 일은 없을지도 몰라요.”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됐을 것이다.
아직 나는 한라 그룹을 J&H에 흡수시킬 생각이 없다.
만약 그럴 경우 발생할 부작용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시나리오를 몇 개 만들어 놓긴 했지만, 썩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한라 그룹의 새로운 회장이 되었다고 해서 축배를 들고 파티를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을 한자리에 모은 것도 회장으로서 일을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일이라면 어떤······.”
나는 눈짓을 해 직원들로 하여금 각 주주들에게 서류를 전달했다.
“거기 보시면 한라 그룹에 포함되어 있는 몇몇 계열사들을 팔아넘길 생각입니다.”
“예?”
“계열사를 팔아넘긴다고요?”
당연히 주주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 경영권을 강탈하자마자 한다는 짓이 계열사를 파는 것이니 말이다.
그들의 눈빛에 경멸이 일었다.
내가 막대한 자본으로 한라 그룹을 찢어 팔려 한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다들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하시는 행동을 보면 저희가 충분히 오해할 만합니다. 타당한 이유를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그 뜻에 따를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무려 2,300억이 넘는 가격에 파는 건데, 그래도 반대하십니까?”
“······예?”
순간 임원들은 제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뭔가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회장님. 고작 계열사 몇 개를 2,300억에 파신다는······.”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2,300억이 조금 넘는 가격에 계열사 5개를 현광에 넘길 겁니다.”
그들은 얼른 서류를 펼쳐 자세히 글을 읽어 보았다.
이윽고 하나둘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회장님. 정말 현광에서 이것들을 2,300억이나 주고 사 간다고 했습니까?”
“예. 정영준 회장님과 이미 얘기가 끝난 겁니다. 정확한 가격은 2,320억이죠.”
2,300억은 지분을 넘기는 값. 나머지 20억은 계열사들에 싸게 가격을 매긴 값이다.
정영준 회장이 20억을 기어코 뜯어 간다며 투덜대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뭔가 이상합니까?”
“당연히 이상하죠. 230억이라면 모를까, 2,300억이란 가치를 해 주는 계열사들이 아닙니다. 그중 2개는 거의 버려져 있던 거라······.”
“정 회장님도 다 뜻이 있는 거겠지요. 그리고 이건 우리에게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자금적으로 힘들어하던 한라 그룹에 2,300억이란 목돈이 생겼으니까요.”
그 말에 주주들이 힐끗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회장님의 재력이 대단하다는 건 저희들 모두 알고 있습니다. J&H에 비하면 2,300억은 거의 푼돈처럼 느껴지실 텐데요?”
그 말에 나는 안색을 굳혔다.
누가 저런 개소리를 하나 봤더니, 국민연금공단에서 임원이랍시고 나온 놈이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여기서 왜 J&H가 나옵니까? 한라 그룹과 J&H는 엄연히 다른 회사입니다. 그런데 J&H에서 돈을 끌어와 한라 그룹을 위해 사용한다? 그걸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 그건······.”
“바로 횡령입니다. 이번에 이상현 전 회장님이 왜 옷을 벗고 나갔는지는 다들 아시겠죠? 회사 자금을 자기 마음대로 썼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J&H가 한라 그룹에 투자를 하면 어떠하겠냐는······.”
“제가 한라 그룹을 맡는 것 자체를 J&H의 투자자들께서는 매우 못마땅하게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투자 명목으로 돈을 쏟아붓는 걸 가만히 보고만 계실까요?”
“······.”
물론 J&H에 묶여 있는 돈은 내 마음대로 쓸 수가 있다. 내가 그곳의 최대 주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가 확실하지 않은 곳에 돈을 투자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큰손 고객들은 그런 내 잘못된 판단력을 보고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
“J&H에서 돈이 펑펑 쏟아져 나올 거라는 생각은 접으세요. 한라 그룹의 자금 문제는 한라 그룹 내부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뛰어다니면서 계열사들을 몇 개 팔아 돈을 마련하려는 것이고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2,300억은 대체 어디서 나온 가격인지······.”
“글쎄요. 저도 그건 모릅니다. 아무튼, 여기서 결정을 내려 주시죠. 계열사를 매각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물리시겠습니까?”
이걸 물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당연히 전원 찬성으로 결정이 났다.
“첫 단추부터 아주 잘 맞는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앞으로도 좋은 활약으로 주주님들의 니즈를 잘 충족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주들의 의견이 모였으니, 나는 총회를 끝내 버렸다.
이제 저들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 * *
“여보세요? 그래. 나야. 지금 당장 하는 일 다 때려치우고 내가 조사하라는 것부터 알아봐! 어서!”
총회가 끝나고 이진석이 밖을 나가기 무섭게 각 금융사 임원들은 전화기를 들고 소리를 쳐 댔다.
이번 주주총회는 새로운 회장을 취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이강철 회장의 유언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오늘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듣게 됐다.
“이게 말이 됩니까? 현광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요.”
“2,300억에 그 쓸모도 없는 회사들을 인수하다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저 계열사들에 있을 겁니다.”
정영준 회장이 일부러 계열사 5개를 사들인 건 남들이 그의 의도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각 계열사에 섞여 있는 지분을 조사하는 건 생각보다 시일이 걸린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개의 회사를 전부 조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수밖에 없다.
즉, 현광 자동차를 노리고 있는 정영준 회장의 의도를 단기간에 파악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금융사들은 그 숨겨진 퍼즐을 찾기 위해 바삐 움직였고, 그 외 사람들은 그리 급하게 움직이진 않았다.
“참 대단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한라 그룹을 강탈하기 위해 아주 뻔뻔하게 설계까지 해 놓고, 기다렸다는 듯이 2,300억이란 거금을 벌어 왔으니 말입니다.”
“예. 이상현 전 회장이 검찰에 소환되는 것을 보고 이진석 회장의 작품이구나 생각은 했어요. 돌아가신 이강철 회장님이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니었네요. 취임 첫날부터 이런 성과를 올리다니 말이에요.”
“솔직히 전 좀 무섭습니다. J&H가 LK 금융을 집어삼키자마자 무섭게 여러 회사들을 하나씩 장악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라 중공업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한라 그룹 전체를 손아귀에 넣었어요. 저는 이제부터가 시작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드는군요.”
J&H는 역사상 전례 없는 성장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중심에는 전부 이진석이 있었고, 이건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투자마다 큰 성공을 거두어 여러 회사들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세간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
한라를 삼킨 다음에는 과연 어디를 또 집어삼킬지 말이다.
“우리야 선만 잘 지키면 되는 거 아닙니까?”
“예. 지금이라도 확실한 동아줄 잡아서 줄타기해야죠. 곧 있으면 우리도 은퇴를 해야 되고, 대기업 고문 자리라도 꿰차려면 줄 잘 서야 합니다.”
국가 기관 임원들은 퇴직을 하고 나면 여러 기업에서 러브콜을 받게 된다. 하지만 한번 대기업과 삐끗한 전적이 있는 임원은 그 어느 곳에서도 불러 주지 않는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항시 눈치를 살피며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국가 기관이 들고 있는 지분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