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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계 천재가 되었다-113화 (113/200)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13화

현광 홀딩스는 현광 건설 그룹의 지주 회사격으로, 25년 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회사다.

당연히 상장된 적이 없는 곳인데, 현광 그룹이 왕자의 난으로 쪼개지면서 현광 홀딩스는 현광 자동차 그룹의 지주 회사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참 절묘하게도 현광 홀딩스가 지주 회사로 변하기 전에 한라 그룹이 그쪽 지분을 몇 프로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운기칠삼이라고 했던가.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 운이 따르고 있음을 말이다.

“젊은 사람이 대업을 앞에 두고 뭘 그리 쫄고만 있나? 후딱 처리해 버리면 될 것을.”

“제가 쫄고 있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그새를 못 참고 자기 집인 것처럼 회사를 찾아온 정 회장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내 모습에 작게 탄식을 터트렸다.

“젠장. 눈치챘구먼.”

“저한테 힌트를 너무 많이 주셨어요.”

“내가? 언제?”

“회장님이 흥분하면서 저를 푸시할 때부터요. 너무 티를 많이 내셨습니다.”

“흐흐. 내가 티를 낸 게 아니라 네가 눈치가 빠른 거겠지.”

그러나 정영준 회장은 함부로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나섰다.

“그래서? 그 지분이 섞여 있는 걸 알고 있으니, 가격을 세게 부르겠다는 건가?”

“글쎄요. 아직 결정을 못 내렸습니다. 당장 한라 그룹을 집어삼킬 것도 아니니까요.”

“쯧-. 그만 간 보고 얼른 처리해. 내가 인내심 많은 놈처럼 보이나?”

“이 지분의 가치를 알고 있으니까 그렇죠. 그런데 현광 자동차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놈들이 알았으면 진작 한라 그룹을 압박해 왔겠지. 그러니까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내가 가져오려는 거야.”

예상대로 현광 자동차는 이 지분의 정체를 전혀 알지 못한다.

분명 다른 기관에 섞여 들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놈들이 방심할 때 찔러야 돼. 그래서 그 지분이 필요한 거고.”

“만약 제가 도와 드린다면 전 뭘 얻게 되는 겁니까?”

“재벌이 돈 말고 또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값을 치러야지.”

“입에 금덩이를 쑤셔 넣어도 가질 수 없는 게 현광 그룹의 지분이라는 건 회장님도 잘 아실 텐데요?”

“감히 내 앞에서 비가격 요소를 말하는 건가?”

“싫으시면 말고요. 저도 그냥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내가 슬쩍 튕기는 모습을 보여 주자 입을 앙다문 정영준 회장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능구렁이 같은 놈이라니깐.”

“그냥 돈만 받고 드리기에는 아까운 지분이잖아요.”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입 꾹 다물고 기다려 보는 건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정 회장은 내 눈치를 살피다 가격부터 내놓았다.

“500억 정도면 되겠나?”

“그냥 돈으로 하시려고요? 그럼 2,300억 불러 보겠습니다.”

“이, 이런 날강도 같은 놈!!”

“전 딱 적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2,300억.

말도 안 되는 가격이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이 지분이 가지는 가치를 생각했을 때, 2,300억은 적당한 가격이 될 수도 있다.

정말로 절실하게 현광 자동차가 갖고 싶다면 정 회장은 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니, 뭔가 애매하다는 표정이다.

2.3%밖에 되지 않는 지분을 가지려고 2,300억이나 쓴다?

현광 자동차와 제대로 전쟁을 치르려면 총알을 많이 구비해 두어야 할 터.

2,300억은 큰 손실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걸 무를 순 없지 않은가.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나다.

이제까지 어떤 가격도 단 한 푼 깎지 않은 게 내 신조라는 걸 잘 아는 양반이다.

“진심이냐? 기어코 2,300억으로 그 지분을 넘겨야겠어?”

“한 가지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가격으로 흥정하긴 했지만, 한라 그룹은 아직 제 손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냥 전화 몇 통만 돌리면 네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거 여의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오바 떨지 마.”

“그럼 2,300억에 사시렵니까?”

“······.”

정 회장은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금연 구역이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어차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에 그냥 놔뒀다.

그렇게 절반 정도 피우고 나서는 푸념하듯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내가 병적으로 현광 자동차에 집착하는 거 같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죠. 집착이 너무 심하십니다.”

“흐흐. 그런데 어쩌겠어? 그게 내 전부였는데. 넌 모르겠지만, 나는 현광 그룹이 재계 1위일 때의 영광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천하 그룹은 깜냥도 안 될 수준이었지.”

지금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중견 기업 취급까지 받고 있는 게 현광이다.

하지만 하나로 다시 뭉친다면 천하 그룹을 금방 따라잡을 정도로 뿔뿔이 흩어진 그 규모가 대단하긴 하다.

유통부터 자동차, 건설, 제철, 조선 등등.

현광이 간섭하지 않는 분야가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정영준 회장이었어도 그날의 영광을 잊지 못했을 것 같다.

“이제 나도 언제 픽 쓰러져서 갈지 모르는 나이야. 그 와중에 내 자식들은 뻘짓이나 하고 다니면서 그저 이 생활에 안주하고 있어.”

“그게 가장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시대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바뀌긴 뭐가 바뀌어? 약자는 강자의 발에 짓밟히는 게 이 세상의 진리야. 그 어떤 것도 이 룰을 어긴 적이 없어. 단지 그것을 망각했을 뿐. 대기업이라고 해서 언제 고꾸라질지 몰라. 두 번 다시 이 나라에 IMF 때의 위기가 오지 않는다고 지껄이는 놈들은 다 사기꾼들이야.”

약육강식의 세계.

그리고 그 진리는 망각한 세대.

정영준 회장은 제아무리 튼튼한 대기업이라고 해도 언젠간 쓰러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도 참 무심하시지. 차라리 나한테 모든 걸 넘겼으면 천하 그룹이 감히 우리 머리 위로 올라설 수 있었겠어? 그런데 그놈의 정이 뭔지, 아버지는 아예 다 찢어 버리셨어. 그리고 그 결과를 봐. 현광 자동차가 요즘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자네도 알지?”

현광 자동차는 이번에 내놓은 TF 시리즈에서 최악의 결함을 발견해 결국 전면 리콜을 결정해야만 했다. 이는 단순히 국내뿐만이 아니라 해외에도 영향을 끼쳐 여러모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은 1위가 현광, 2위가 KIG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는데, KIG는 현광 자동차 그룹에 소속되어 있는 자동차 회사다. 즉, 둘 다 똑같은 지주 회사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3위가 KS, 4위가 대용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광과 KIG가 각각 1, 2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대한민국 자동차는 현광 자동차가 독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리콜 사태로 인해 점점 사람들은 가격이 내려가고 있는 외제 차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특히 이번에 KS가 내놓은 소형 자동차가 히트를 치면서 현광 자동차의 위기설이 조금씩 감돌고 있었다.

“현광 자동차가 요즘 휘청거리긴 해도, 망한다고 볼 순 없지 않습니까?”

“망하진 않겠지. 대용 자동차도 아직까지 대가리 드밀고 있는데, 현광이 쉽게 망하겠냐? 하지만 그만큼 발전이 더딜 거야. 아버지는 현광 자동차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길 원하셨어. 그리고 난 그걸 그 정도로 발전시킬 자신감이 있었지.”

“자신감은 있으셨지만, 선택은 못 받으셨군요.”

“아버지도 내 능력을 알고 계셨던 거야. 그래서 무너져 가는 건설을 살리라고 나한테 넘긴 거고. 자동차는 엉뚱한 놈한테 흘러갔지.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쌓인 게 많긴 많은가 보다.

다 늙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내 죽기 전 목표는 하나뿐이야. 현광 그룹이 다시 하나가 되는 거.”

“현광 자동차 회장님과 진솔하게 얘기를 나눠 보심이······.”

“그런 꽉 막힌 늙은이와 내가 뭘 얘기를 나누겠냐? 차라리 무력으로 빼앗는 게 훨씬 빠를 거다. 현광 자동차만 손에 넣으면 집 나간 다른 계열사들도 알아서 들어올 테고.”

이강철 회장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느끼는 바가 컸나 보다.

이렇게 서둘러서 전쟁 준비에 돌입한 것을 보면 말이다.

“2,300억이라고 했지? 좋아. 그 돈 줄게.”

“정말이십니까? 그냥 불러 본 거기도 한데.”

“솔직히 그만한 가치는 있으니까. 하지만 조건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J&H가 적극적으로 우릴 도와주는 거야.”

“···예?”

“금융 회사잖아. 돈 부족하면 너한테 대출을 땡기겠다는 거지.”

2,300억에 대한 손해를 대출로 채워 보겠다는 건가?

“저희 캐피탈은 이자가 좀 센데요?”

“그래도 빌려주는 절차가 까다롭진 않겠지? 당장 총알을 퍼부어야 하는데, 괜히 보급에 시일이 걸리면 다 이긴 전쟁도 질 수밖에 없거든.”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께서 콜을 하시면 당장 총알 배송 해 드려야죠.”

“흐흐. 말이 잘 통하는구먼.”

“그런데 회장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직 한라 그룹을 제 손에 넣은 게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인수할 생각도 없고요.”

“인수할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그만한 명분이 없다는 거 아니야?”

한라 그룹을 흡수하면 2,300억이라는 돈이 생긴다. 당연히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한라 그룹의 경영권을 내 쪽으로 가져오고 싶다. 하지만 정 회장 말대로 그럴 만한 명분이 부족하다.

정 회장은 그런 내 마음을 참 잘도 알고 있었다.

“길은 내가 만든다. 너는 신호 떨어지면 쏜살같이 해치우기만 하면 돼.”

“회장님께서 명분을 만들어 주신다고요?”

“그래. 지켜만 봐. 아마 기관과 금융사에서 너한테 후다닥 달려와 회사부터 살려 보자고 빌 거다.”

정영준 회장은 아주 자신 있는 얼굴로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대체 이 영감님이 또 뭘 보여 주려는 걸까?

* * *

“와···. 정 회장님 아직 녹슬지 않으셨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이거 오래전부터 준비한 거 같죠?”

“예. 이강철 회장님이 돌아가시자마자 터트리는 걸 보면, 도끼를 갈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정 회장은 이틀 만에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것도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말이다.

“새롭게 한라 그룹의 선장으로 취임했던 이상현 회장이 오늘 낮 검찰로부터 소환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상현 회장은 부회장일 때부터 투기 목적으로 회삿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그 규모는 300억에 달한다고 합니다.”

무려 300억에 달하는 회사 자금 횡령.

대충 어디에 썼는지는 상상이 간다.

비자금 조성 목적으로 300억을 빼돌린 게 분명할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 300억을 빼돌린 것이 이강철 회장의 지시였는가다.

“300억이면 타격이 크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한라 그룹에 대해 말이 많은데, 300억이란 돈을 빼돌렸으니······.”

“예. 집행 유예로 풀려나긴 하겠지만, 외부적 타격은 무시 못 할 겁니다. 잘도 이런 걸 정 회장님이 준비하고 계셨네요.”

“예전에 저희한테 당한 게 있으시니까요. 아마 J&H에 대해서도 여러 방면으로 조사하고 있을 겁니다.”

“하여튼 무서운 영감님이에요.”

말은 그렇게 해도 지금 내 입은 웃고 있었다.

이강철 회장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나는 이 회사의 경영권을 강탈할 작정이다.

그럴 명분을 정 회장이 던져 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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