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11화
“자리를 계속 지키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러려고 했는데, 권 대표님과 상의할 게 있어서요.”
권오준 대표도 이강철 회장과 내가 중요한 대화를 나눈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 거기에 모여 있던 임원들도 대충 눈치는 깠을 것이다.
“이 회장님 일입니까?”
“예. 그분이 이런 걸 주셨어요.”
내가 건넨 서류를 권 대표가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한라 그룹 지배 구조와 지분들이 어디에 섞여 있는지 보여 주는 거네요.”
“어떤 투자자가 한라 그룹에 우호적인지도 자세히 나와 있어요.”
“그런데 이걸 왜······.”
“이 회장님이 쓰러지시기 전에 우호 지분을 들고 있는 투자자들을 따로 만나 설득하셨더군요. 만약 제가 한라 그룹 경영권을 빼앗으려 하면 절 도우라고 말입니다.”
권 대표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나도 이 회장의 말을 들었을 때 딱 저런 반응이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회사가 통째로 넘어가는 건데요?”
“예. 정말입니다.”
“아니. 한라 그룹에 애정이 크신 분이 어떻게 그런 결정을······. 저희 쪽에 한라 그룹이 넘어오면 어쩔 수 없이 J&H로 이름이 바뀔 텐데요?”
“한라 그룹을 정말 걱정하시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 아닐까요? 이상현 부회장을 못 믿으시겠답니다. 회사가 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새롭게 뿌리를 내리겠다는 거죠.”
권 대표는 얼이 빠졌는지 짧은 기함을 터트렸다.
“허-. 이 회장님도 참 대단하시네요.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렇죠? 하지만 아무리 이 회장님의 부탁이라고 해도 확인할 건 제대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요.”
“우리가 한라 그룹을 삼켰을 때 나올 후폭풍을 미리 예상해 보라는 뜻이시죠?”
“예. 만약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안 되는 일이면 이건 없었던 일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음······. 우리가 인수를 철회하면 이 회장님이 많이 섭섭해하시겠습니다.”
“이해해 주실 겁니다. 회사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는 걸 잘 아시는 분이니까요.”
이강철 회장의 마지막 유언을 지켜 주고 싶지만, 이건 회사와 관련된 일이다.
회사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수만 명이 넘는 직원들과 수많은 투자자들이 돈을 맡겨 둔 곳이지 않은가?
무리한 인수로 휘청거리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회사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욕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만큼 멍청한 게 또 없다.
“철저하게 파헤쳐 주세요. 그리고 정말 인수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우리가 들고 있는 지분으로 상 한번 엎어 보죠.”
“상을 엎어요?”
“예. 대주주의 권리로 감사를 실시하는 겁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자는 거죠. 한라 그룹에 묻은 먼지를 한꺼번에 털어 내고 깨끗한 상태로 회사를 가져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상현 부회장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회사 내부 전체를 갈아엎을 수도 있어요. 기존에 있던 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지는 거죠.”
지분을 3%만 들고 있어도 대주주의 권한으로 회사 내부를 감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대다수 대주주들이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이유는, 자칫 잘못하면 회사 전체가 흔들려 복구 못 할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권 대표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그거다.
가뜩이나 불이 붙은 회사에 기름을 끼얹어 싹 태워 버릴 수도 있다.
“뭐, 저도 덮을 수 있는 건 덮고 싶지만, 한라 그룹 꼴을 보세요. 제가 인수한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전환점을 맞이할 순 없어요. 아예 새거로 만들지 않는 한.”
“완전한 점령을 원하시는군요. 내부의 시스템까지 없애 버릴 만큼.”
“예. 전혀 다른 회사가 되길 원하고, 한라 그룹의 흔적이 철저히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이강철 회장에게는 매우 잔인한 일이다. 그가 남긴 업적과 흔적을 전부 다 없애 버리는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그런 작업을 할 때쯤이면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일 것이다.
내게 도로 지분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는 일. 죽은 자는 원래 말이 없는 법이지 않은가?
* * *
권오준 대표가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해 보며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동안, 나는 이틀 동안 병원과 회사를 들락날락거렸다.
건설 그룹 임원들에게도 편의를 봐 주어 며칠 동안은 전체 휴가를 내주었다.
할 일이 태산처럼 쌓인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들이 마지막 도리를 지키게 해 주는 것이 이강철 회장을 향한 내 호의였다.
그리고 이 회장이 쓰러진 지 4일째 되는 날.
마침내 대한민국 재벌계의 거목이 쓰러지고 말았다.
“잠이 드셨을 때 숨을 거두셨다고 합니다.”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한 것이 아닌, 편하게 생을 마감한 이강철 회장이었다.
“장례식은 어떻게 치른다고 합니까?”
“이 회장님 정도의 위치라면 장례식 규모가 꽤 클 거 같은데, 가족들은 소란이 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장으로 결정이 되었다는군요.”
가족장이라면 그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진 않을 것이다.
초청을 받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것이 가족장이니, 아마 나는 후보에서도 제외될 것 같았다.
“이상현 부회장이 저를 끔찍하게 싫어하니, 장례식장은 못 가겠네요.”
씁쓸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족장을 주도하는 건 장남일 테니까.
그래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권오준 대표가 의외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회장님도 꼭 장례식장에 참석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한라 그룹에서요?”
“예. 이상현 부회장이 회장님을 명단에 직접 넣은 것 같던데요?”
내가 절대 장례식장에 얼굴을 못 내밀도록 만들 줄 알았는데,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길을 섭섭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감정을 내려놓은 건가?
그게 정말이라면 이 부회장을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지금 당장 가죠.”
“예, 회장님. 모시겠습니다.”
아마 재벌계 총수들은 대다수 참석을 한다고 봐야 한다.
비록 가족장이기는 해도 재계와 정계의 거물들이 속속 찾아오게 될 테니, 기자들도 진을 치고 있을 것이다.
과연 내가 도착했을 땐 수백 명의 기자들이 연신 플래시를 터트리고 있었고, 경호원들은 그런 그들을 다루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진석 회장이다!”
“빨리 찍어!”
“이 회장님! 잠시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이강철 회장님과 각별한 사이라는 게 사실입니까?”
“지금 심경이 어떠십니까?”
내가 차에서 내리자 기자들이 몰려왔고, 나는 형식적인 대답을 해 주었다.
“이강철 회장님은 제 오랜 멘토이며, 그분께서 지금의 저를 만드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자 재계의 거목이신 분이 떠나신 게 그저 원통할 따름입니다.”
그 말을 남기고 나서도 질문이 이어졌지만, 나는 전부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끄러운 바깥과는 달리 안은 비교적 조용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건설 임원들은 내가 온다는 소식에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예. 다들 밤늦게까지 고생이 많으셨어요. 저도 마지막 자리를 지켜 드렸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회장님. 얼른 안으로 드시지요.”
나는 이강철 회장의 영정 사진 앞에 서서 조용히 묵념했다.
그와 첫 인연은 신화 금융에서 일할 때였다.
그가 내 가치를 알아봐 주었고, 처음으로 기백 억의 돈을 투자해 준 인물이었다.
또한 한라중공업을 인수할 때도 많은 도움을 주어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게 해 주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할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푹 숙어졌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나는 이상현 부회장과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그는 저번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날 대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예. 아버지께서도 이 회장님이 찾아와 주신 걸 매우 기뻐하고 계실 겁니다.”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지?
주변 시선 때문에 그런 건가?
나는 이상현 부회장과 인사를 나누고 그 옆에 있는 사람들과도 하나씩 인사를 나눴다. 마지막에는 이한별과도 눈을 마주쳤다.
여러 문제 때문에 지금은 서로 서먹해진 사이이긴 하나, 나도 그렇고 그녀도 당장 인연을 끊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회장님. 여기입니다.”
나는 임원들이 미리 맡아 놓은 자리에 가서 앉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입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올려 보니,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건 다름 아닌 현광 건설 그룹의 회장, 정영준이었다.
한때 한라 그룹을 통째로 꿀꺽 삼키려 들었던 사람이지만, 이강철 회장과는 가끔씩 만나는 술친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여기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염치 없이 여길 찾아오냐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지만, 정영준 회장도 충분히 이곳에 올 자격이 있다.
경쟁자면서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지금쯤 정영준 회장도 마음 한구석 쓸쓸함이 남아 있을 것이다.
“쯧. 왜들 이렇게 난리법석을 떨어. 일어나지 말고 다들 앉아서 육개장이나 드시게.”
여러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리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영준 회장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이 회장의 영정 사진 앞에서 뭐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가족들과 하나씩 인사를 나눴다.
나도 가만 앉아 있기는 뭐해서 정 회장에게 가볍게 인사라도 올리려 했는데, 그가 오히려 내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회장님. 안녕하십······.”
“자네, 나 좀 따로 보지.”
나와 임원들이 모두 일어나 인사를 올리려는 찰나.
정 회장은 우리의 인사말을 딱 잘랐다.
“예. 그러시죠.”
나는 그런 정 회장의 뒤를 따라 단둘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비서에게 쌍화차 한 잔을 시키고 나서는 입에 담배부터 물었다.
“피워도 되지?”
“안 된다고 해도 피우실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해.”
그는 스스럼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한동안 말없이 연기만 내뿜으며 허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나는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담배도 이제 끊으셔야죠. 건강을 위해서.”
“이 나이에 건강 챙겨서 뭐 한다고. 오히려 난 이거 안 피면 더 병나. 네놈이나 피지 말어.”
“전 담배 안 피웁니다. 술도 가끔 마시고요.”
“쯧. 재미없기는.”
언제는 끊으라고 말했으면서.
정 회장은 그렇게 한 개비를 다 피우고 나서 운을 뗐다.
“내가 이 회장, 저 양반보다 한 7살 어려. 그런데 단 한 번도 형님이라 부른 적이 없어. 아니. 난 살면서 형님이라 부른 사람이 없었어. 아! 딱 한 명 있다. 천하 그룹 장연욱 회장한테는 형님~ 하면서 접근한 적이 있었지. 그놈이 나보다 3살 어린 걸 알면서도 말이야. 허허.”
자기보다 약하거나, 비등한 수준이면 나이가 아무리 높아도 형님 취급을 안 해 준다는 건가? 그 반대로 자신보다 수준이 높으면 어린 나이라도 형님이라 떠받들어 준다라···.
정 회장은 약육강식의 재계 습성을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이상현 부회장이 갑자기 살갑게 대하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 부회장이 널 지독하게 싫어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어. 그런데 최근 들어 태도가 바뀌었을걸?”
정영준 회장 말대로 오늘 보여 준 이 부회장의 태도는 확실히 달랐다.
“알고 계시는 게 있는 겁니까?”
“흐흐. 딱 봐도 모르겠냐? 네 손에 칼자루가 잡혀 있다는 걸 아는 거지. 아직 돌고 있진 않지만, 곧 네가 저 얼빠진 놈을 쫓아내고 한라 그룹을 차지할 거라는 소문이 쫙 퍼질 거다.”
그것 때문이었나?
아직 소문이 퍼지진 않았지만, 이강철 회장이 죽기 전 설득했던 기관과 금융사에서 이상현 부회장에게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귀가 큰 정영준 회장도 그와 같은 정보를 얻었을 터.
역시, 사람이 갑자기 바뀐 데에는 항상 이유가 있다.
그것도 자신의 목을 한 번에 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법. 보통 이런 경우에는 손바닥 뒤집듯 행동을 바꾸는 사람을 경멸해야 하지만, 약육강식의 재벌 생태계가 나는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과연 이 부회장이 어디까지 숙이는지 한번 봐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