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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계 천재가 되었다-110화 (110/200)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10화

이강철 회장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을 땐 이미 그는 수술을 끝내고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헤매고 있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다들 오시는 겁니까?”

이상현 부회장은 나와 건설 임원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회사를 홀라당 가져가고 나니 이제야 속이 시원해요? 거기다 당신들도 그렇게 사는 거 아닙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배신할 수가 있습니까!”

이강철 회장이 제 아들 때문에 고민이 컸던 이유를 알겠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철딱서니가 없어서야.

“부회장님.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시죠. 지금은 회장님의 건강이······.”

“회장님의 건강? 지금 그게 누구 때문에 나빠졌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까?”

내가 현광 건설의 독주를 막고 한라 그룹을 구해 냈다는 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이상현 부회장은 되지도 않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자 보다 못한 한영호 사장이 나섰다.

“부회장님. 일단 진정하시죠. 여기서 그런 얘기를 하면 뭐합니까?”

하지만 부회장은 막무가내로 자기 할 말만 했다.

“한 사장님한테도 참 섭섭해요. 저희 아버지와는 거의 지기와 다름없으신 분이 벌써 한라라는 이름을 잊으신 겁니까?”

그러자 한 사장도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더 이상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상현아. 거기까지 해. 그룹의 부회장이라는 애가 아직도 이렇게 철이 없어서 어떻게 그룹을 이끌어 가려고!”

“뭐, 뭐라고요?!”

“이건 모두 회장님께서 원하셨던 일이다. 굳이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네가 능력만 됐다면 한라 중공업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지금 말 다 했습니까!”

이러다가는 병문안은 고사하고 경찰들이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나는 고성이 더 높아지기 전에 중재에 나섰다.

“일단 잘 알겠습니다. 부회장님과는 다음에 다시 얘기를 나누도록 하죠. 그때 속 시원하게 다 털어놓으세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전 이강철 회장님을 뵈러 온 거니까요.”

나는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연신 씩씩거리고 있는 부회장을 뒤로하고 담당의를 찾아갔다.

“아마 하루 이틀을 넘기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

“정확한 병명이 뭡니까?”

“병 때문에 돌아가시는 게 아닙니다. 그냥 단순 노환이죠. 신장 기능이 전부 떨어져 회생이 불가능합니다.”

담당의도 이미 포기한 듯했다.

길어야 하루 이틀이라······.

“정신이 들긴 하시겠죠?”

“글쎄요. 그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거라 깨어나신다고 해도 제대로 말을 하실 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의료진 예상으로는 깨어나시지 않을 확률이 더 큽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하루 이틀 내에 숨을 거두시곤 합니다.”

이강철 회장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어쩌면 그럴 기회도 이제 사라진 듯 보였다. 담당의의 절망적인 보고를 들은 임원들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회장님. 먼저 들어가서 쉬십시오. 저희들은 여기 남아 있겠습니다.”

임원들은 밤을 새워서라도 이강철 회장의 임종을 지키려고 했다. 비록 내가 잔인하게 그들을 한라 그룹에서 빠져 나오도록 만들긴 했지만, 최소한의 예우는 지키게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저도 같이 있어 보겠습니다. 이 회장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은 꼭 지켜드리고 싶군요.”

이상현 부회장은 길길이 날뛰며 얼른 썩 꺼지라고 난리를 쳤지만, 나와 임원들은 그냥 무시하고 자리를 지켰다. 결국 제풀에 지친 이상현 부회장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멀리서 눈치만 보던 이한별이 내게 다가왔다.

“진석 씨.”

하루 종일 울기만 했는지 이한별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은 차마 숨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우리 둘은 병원 안에 있는 카페로 내려가 오랜만에 단둘이 차를 마시게 됐다.

“그동안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오늘 보셨다시피 아빠가 우리 둘이 만나는 걸 반대하셔서······.”

“예.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반감이 크시더군요.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도 아니긴 했다.

마음이 가는 여자인 건 맞지만, 이대로 끝을 맺는 게 어쩌면 옳은 일이다.

이한별의 집안사람들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데, 굳이 연인 관계로 발전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할아버지께서는 우리 두 사람이 계속 만났으면 하고 바라셨어요. 그리고 저도 진석 씨와 이런 식으로 관계가 끊어지는 걸 원치 않아요.”

“많이 힘들 텐데요? 부모님이 반대하는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줄 뿐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남들을 의식하지 말고 제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라고 하셨어요.”

이한별도 내게 마음이 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현실 자각을 시켜 주긴 해야 한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한라 그룹과의 관계가 계속 나빠지면 저는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도 있어요. 즉, 한라 그룹 자체가 J&H로 넘어올 수 있다는 거고, 그렇게 되면 이상현 부회장님은 영영 제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할 겁니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제가 잘 처신을 하긴 하겠지만······.”

“괜찮아요. 지금은 제가 진석 씨를 많이 좋아하니까요. 저도 그 외의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싶어요.”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올 줄은 몰랐다.

나도 모르게 조금 당황을 해서 답을 하고 있지 않던 사이, 우리 두 사람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내게 전화를 건 것은 권오준 대표였다.

“회장님! 이강철 회장님이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정말요? 알겠어요. 지금 바로 올라갈게요.”

이한별도 같은 전화를 받았는지, 우린 서둘러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중환자실에 도착했을 땐 이상현 부회장의 고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내가 아들인데, 어떻게 아들보다 다른 놈을 먼저 들여보내라고 하실 수가 있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회장님의 뜻이 완고하셔서······.”

“하! 나 참. 진짜 누가 누구 자식인지 원.”

이상현 부회장은 신경질을 내며 사라졌고, 나는 의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회장님. 오셨군요. 방금 이강철 회장님께서 깨어나셨는데, 회장님이 여기 오신 걸 알고는 다른 사람은 일절 들이지 말고 회장님만 안으로 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상현 부회장이 저렇게 화를 내고 간 거였구나.

충분히 이해는 한다.

큰아들이 아니라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나를 먼저 들여 보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럼, 전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예. 얼른 들어가시죠.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리시긴 했지만, 언제 다시 또 정신을 잃으실지 모릅니다.”

그만큼 이강철 회장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예상외로 이 회장은 아주 정정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아이고. 바쁜 사람의 시간을 이 늙은이가 다 잡아먹고 있구먼.”

“회장님. 누워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허허. 아닐세. 어차피 곧 누워서 저 세상 떠날 텐데, 조금이라도 앉을 힘이 있을 때 실컷 앉아 봐야지. 음료라도 좀 들겠는가?”

“아닙니다, 회장님.”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앉아. 고개 아파.”

나는 이강철 회장이 가리키는 곳에 앉으며 말했다.

“저를 먼저 만나 보시는 것보다는 아드님을 부르시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내가 당장 죽을 것도 아니잖나. 나도 내가 언제 떠날지 잘 알고 있어. 지금은 안 죽어. 조금 더 버티긴 할 걸세. 그동안 실컷 보면 돼.”

“저한테 달리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많지. 하지만 바쁜 사람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진 않네. 그러니 내 최대한 짧게 말하지. 그전에 먼저 이것부터 묻겠네.”

“말씀하십시오.”

이 회장은 목을 가다듬으며 내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손녀딸과는 아예 만나지 않을 생각이신가?”

“이상현 부회장이 저희 둘 사이를 반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별 씨도 많이 부담스러워하더군요. 저도 구태여 집안이 반대하는 인연을 이어 가고 싶진 않습니다.”

“음······. 그래?”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모르는 거지 않습니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을 해도 마음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가 많죠. 그래서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 잘 모르겠다라-. 그 정도면 충분한 답이 되었네. 젊은 친구들의 일이니, 이제 다 죽어 가는 늙은이가 걱정해서 뭘 하겠나? 그저 만약 두 사람이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자네가 우리 손녀를 잘 대해 주길 바랄 뿐이야.”

“한별 씨는 훌륭한 사람이고, 그에 따른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 고맙네.”

우리 둘이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이강철 회장의 비서실장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가져왔습니다.”

“아, 그래. 고마워.”

“회장님. 최대한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쯧. 이젠 너까지 잔소리냐? 그만 나가 봐. 나 아직 안 죽는다.”

비서실장은 걱정 어린 눈동자로 고개를 숙인 채 병실 밖을 나갔다.

비서가 건네주고 간 서류를 대충 확인해 본 이강철 회장은 그것을 내게 건넸다.

“이걸 한번 봐 보시게.”

이강철 회장이 건네 서류를 확인해 보니, 거기에는 각 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한라 그룹의 지분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그중에서 어떤 지분이 한라 그룹에 우호적인지도 자세히 나와 있었다.

“이걸 갑자기 왜······.”

“내가 쓰러지기 전에 기관들이랑 은행, 그리고 금융사 쪽 지분을 확인해 놓은 거야. 그리고 우호 지분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아 놨지. 그런 다음 내가 그 양반들에게 뭘 부탁한 줄 아나?”

“어떤 부탁을 하셨습니까?”

“만약 자네가 힘을 써 달라고 하면 무조건 J&H 편을 들어 주라고 언질을 줬어.”

“······?”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한 우호 지분을 전부 내 편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건가?

“이렇게 보면 내가 자네에게 회사를 강탈해 달라고 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게 아니야. 이 늙은이가 염치없는 부탁 하나를 하고자 함일세.”

나는 이강철 회장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도 무슨 의도로 이런 얘기를 꺼냈는지 알아차렸다.

“한라 그룹이 어려움에 빠지면 차라리 제가 흡수해 버리라는 말씀이시군요.”

“허허. 자네는 참 눈치가 빨라. 우리 아들이 자네 절반만 따라갔어도 내가 이런 어려운 부탁을 하지 않을 거야.”

“절 믿으십니까? 제가 당장 내일이라도 한라 그룹을 강탈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그걸 모를까? 그런 서류를 준비하지 않아도 자네는 언제든 한라 그룹을 빼앗을 수 있었어. 물론 내가 최대한 방어를 하려고 발악을 해 봤겠지만, 그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네.”

이강철 회장 말대로 지금도 나는 마음만 먹는다면 한라 그룹을 갈가리 찢어 버린 다음 하나씩 흡수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기관과 각 투자사는 이익을 좇는 자들이 아닌가?

지금 휘청거리는 한라 그룹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니,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내 제안을 덥석 받아들여 경영권을 빼앗는 데에 동의했을 것이다.

“내 아들이 조금만 더 명석한 아이였다면 이런 걱정에 붙잡혀 이승을 떠돌진 않았을 걸세. 그냥 편하게 저승사자 따라갔겠지. 그런데 그 미련이라는 게 뭔지, 쓰러지고 나서도 회사 걱정이 돼서 번뜩 눈을 뜨게 되더구먼. 원래 제 명에 그냥 팍 죽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더 오래 사셔야죠.”

“아니야. 사람이 갈 때가 있는 법이지 않나? 하지만 이거는 꼭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 억지로 명줄을 늘린 거야. 자네가 한라 그룹을 잘 지켜봐 주시게. 자네만큼 현명한 사람을 내 이제까지 만나 본 적이 없어. 그러니 회사가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게 되는 것 같다면 지체하지 말고 경영권부터 빼앗아 버려.”

이강철 회장은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그렇게 되면 한라라는 이름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뭐······ 어쩌겠나. 이름이 바뀐다고 해서 그 터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J&H라는 새로운 별에 내가 조금이나마 헌신을 했다고 생각하겠네.”

저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오면서 이강철 회장도 현실을 직시한 것 같았다.

이대로 아들에게 회사를 맡긴다면 분명 그룹이 더욱 휘청거린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상 그는 후임을 아들로 삼은 것이 아니라 나로 정한 것이다.

“회장님의 뜻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이강철 회장은 내가 일단 지켜보기를 원하는 것 같지만,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 회장이 숨을 거두는 순간 곧바로 한라 그룹을 강탈해 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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