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06화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게······ 조금 의외라서요.”
장기철 사장이 장현욱 부회장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장현욱 부회장이야 그 집안의 차남이라 충분히 반기를 일으킬 순 있다. 그러나 장기철 사장은 조금은 먼 핏줄이 아니던가?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저도 장씨 일가입니다. 당연히 왕좌에 욕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아버지가 다르다고 해서 그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는 게 억울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말이 가족이지, 실상은 하인이나 다름없어요. 충성을 맹세하고 개처럼 발바닥을 핥지 않으면 바로 목을 칠 양반들이죠.”
씁쓸한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 나왔다.
같은 장씨의 성을 가지고 있지만, 왕은 이들을 인간 취급도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처럼 사는 건 딱 제 대에서 끝나야 합니다. 제 자식들에게까지 이런 일을 맡기고 싶지 않군요.”
자식 핑계를 대지만, 결국 자신이 천하 그룹의 왕이 되고 싶은 것일 터.
나는 냉정함을 되찾고 장기철 사장에게 되물었다.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당연히 도움을 바라는 거죠.”
“장현욱 부회장에게도 말했을 텐데요? 남의 집 싸움에 관여할 생각 없습니다.”
“하지만 이 회장님은 욕심이 많으신 분 아닙니까? 천하 그룹 정도라면 충분히 탐이 날 텐데요?”
천하 그룹을 갖는다라.
당연히 천하 그룹을 가질 수 있다면 누가 욕심내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바보가 아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살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천하 그룹을 강탈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진작 누군가가 했겠지요.”
“아. 물론, 천하 그룹 전체를 갖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계열사를 분리시킬 순 있겠지요. 총 50개의 계열사를 절반으로 뚝 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반으로 줄어든 천하 그룹.
그 힘도 절반으로 줄어들게 된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차근차근 준비해서 한 번에 찌른다면 불가능했던 것도 가능하게 됩니다.”
생각보다 앙금이 깊어 보였다.
선대의 앙금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가?
장연욱 회장과 형제였던 장선호는 천하 그룹의 모든 것이 제 형에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의 권리를 찾고자 여러 번 소송도 하고 발악을 해 댔다. 하지만 결국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고, 술독에 빠져 살다가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 그의 자식인 장기철 사장은 밑바닥부터 시작해 어떻게든 장씨 일가의 눈에 들고자 안간힘을 썼던 것으로 알고 있다. 분명 온갖 더러운 일도 다 해 가며 금융사의 사장 직함까지 달았을 것이다.
“장연욱 회장님이 장기철 사장님의 그런 불손한 마음을 눈치채지 않았을까요?”
“뭐, 제가 거짓으로 충성하는 걸 눈치챘을 수도 있겠죠. 그래도 제가 아직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건 저를 위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가 천하 그룹을 위해 여러 더러운 짓을 해 왔지만, 그것을 검찰에 가져다줘도 누구 하나 수사에 들어가지도 않을 테고요.”
어차피 발버둥 쳐 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건가?
이건 천하 그룹이 방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심조차 허용할 수 있는 게 천하 그룹의 힘이다.
“무작정 도와 달라는 말보다는 그에 대한 보상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간단합니다. 저와 장현욱 부회장은 천하 그룹을 갈가리 찢어 놓을 겁니다. 어차피 저희가 가질 수 없는 거대한 제국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갈라놓을 순 있죠.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 차근차근 준비부터 해야 합니다.”
“준비라면 어떤?”
“증거들을 모아야죠. 천하 그룹의 비리들을 전부 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가 되었을 때 터트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 정권이 식물 정권으로 전락해야겠네요.”
“예. 그래서 현 정권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파악 중에 있습니다. 레임덕이 시작되고 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가속되면 그때 모든 걸 터트리는 겁니다.”
장연욱 회장이 사람을 죽여도 검찰은 그에게 아무런 수사 지시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 정권이 힘을 잃고 검찰이 슬슬 야당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3년. 지금으로부터 3년 안에 해결을 봐야 합니다.”
“생각보다 남은 시간이 많네요.”
“천하 그룹이 작은 구멍가게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리저리 꼬여 있는 지분을 하나둘 장선욱에게 물려주려면 시간이 꽤 걸립니다. 안 그러면 천문학적인 상속세를 내야 할 테니까요.”
장연욱 회장의 전 재산을 물려주려면 어마어마한 상속세를 내야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할 것이다.
“3년 안에 저희가 모든 걸 준비해 놓겠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막대한 자금으로 저희를 도와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약속드리죠.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 손해 보는 장사 안 합니다. 그리고 이게 정말 현실성이 있는 일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철저히 준비를 하지 못한다면 그땐 저희도 알아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러니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장기철 사장의 말을 듣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들이 도움을 요청할 곳은 많을 텐데도 불구하고 하필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점.
“왜 제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지 않나요?”
“아닙니다. 이 회장님을 대신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주식 시장에서는 이 회장님의 말이 곧 진리이잖아요. 여론도 매우 좋고요. 저희는 그 브랜드가 주는 신뢰성을 높이 평가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가 나서면 여론이 우리의 편을 든다?”
“그런 셈이죠. 그렇게 되면 국민이 야당을, 야당이 검찰을 압박하게 될 겁니다. 다 완성되어 가는 새로운 지배 구조에 금이 가는 것이죠. 전 그런 그림을 원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정상급이라는 우리 두 금융사가 나서서 언론을 움직이고 돈을 마구 뿌려 댄다면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말은 언제나 좋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계획을 세웠다고 해서 꼭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는 천하 그룹이지 않은가?
그곳을 깨뜨려 놓겠다는 건 허황된 소리이긴 하다. 그래도 흥미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라는 천하 그룹이 현광처럼 쪼개지고, 거기에 있는 계열사들을 내가 가져올 수 있다면?
“일단은 기다려 보겠습니다. 하지만 가져오신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전 바로 손을 털 겁니다.”
“예. 당연히 그러셔야죠. 아차! 그런데 오늘 이거 때문에 온 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말이 이상한 곳으로 갔네요.”
“다른 용무라도······?”
“이번에 J&H와 천하 금융이 덩달아 돈을 벌지 않았습니까? 다른 금융사들은 영 마뜩잖게 보고 있고 말이죠. 그래서 말인데 저희도 언론에 돈을 뿌리곤 있기는 합니다만, J&H도 어떤가 해서요.”
금융사들이 선뜻 천하 금융을 건들진 않겠으나, 혹시 모르는 일이니 단단히 틀어막겠다는 소리였다.
“저희도 철저히 언론 통제를 하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저희와 같이 천하 금융도 휩쓸린다는 걸 알고 다른 금융사들이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
“하하. 저희를 방패막이로 쓰시다니요.”
“그에 대한 값은 지불한 것 같은데요? 저희가 하는 대로 똑같이 하고 계시잖아요. 이득도 꽤 보셨고.”
“흐흐. 그건 맞네요. 대신, 오늘 술은 회장님이 사십시오. 저희도 손해 본 건 좀 있어서.”
우리 둘은 서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부딪쳤다.
오늘의 만남이 어쩌면 천하 그룹을 무너뜨릴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제 회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면 됩니다. 비트코인으로 그 많은 돈을 벌기도 하셨고, 이번에 투자 성과가 어마어마해서 돈이 차고 넘칩니다.”
권오준 대표는 입가에 웃음이 가득 했다.
1천억을 넣었던 비트코인은 어느새 350만 원까지 치솟았다.
난 기다릴 것 없이 전부 다 팔아 무려 10배가 넘는 이득을 보았고, 내 개인 재산은 3조 원을 넘어섰다. 거기다가 비트코인 시장이 세금을 떼어 가는 곳도 아니라서 국가에 납세를 할 의무도 없다.
순식간에 재산이 이렇게 늘어난다는 건 참 기쁜 일이다. 그런데 처음 로또 1등 당첨되었을 때를 빼고는 딱히 감흥이 없었다. 스스로가 돈에 대해 이렇게까지 무감각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프로젝트에 들어갈 돈은 충분하다는 거군요.”
“예. 저희가 처음 제안했던 대로 용산 프로젝트를 진행해도 상관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청와대의 등골을 쪽쪽 빼먹을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죠.”
권 대표와 나는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 들어갑시다.”
우리 둘이 도착한 곳은 프로젝트 지분을 가지고 있는 기업과 정부 인사들이 모여 있는 회의실이었다.
이번 용산 프로젝트를 우리가 맡겠다는 뜻을 보이자 다들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구원자를 본 것처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하지만 이들의 환한 얼굴은 곧 굳어지게 될 것이다.
나와 권 대표는 미리 맞춘 대로 딱딱한 표정과 목소리를 냈다.
“일단 다들 앉으시죠.”
내 굳은 목소리를 느낀 탓일까, 이들의 얼굴에 벌써부터 불안감이 물들어 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건설 쪽에는 조금 문외한이라서 말입니다. 제대로 공부를 하고 저번에 제안을 한 계획안을 다시 검토해 봤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진행을 하면 LK 관광개발 꼴이 나겠더군요. 계획서를 손 좀 봐야겠습니다.”
“계획안을 변경하신다고요?”
“예. 저희한테 너무 피해가 많이 와요.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도 많고 말이죠.”
“회장님. 저희가 듣기로는 분명히 이 계획안대로 진행을 하신다고······.”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그냥 생각만 하는 중이라고 했지.”
내가 차갑게 잘라서 말하자 이들은 벙찐 얼굴로 김 장관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내 편으로 돌아선 김 장관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회장님께서 어떤 제안서를 준비하셨는지 궁금하군요.”
“그렇지 않아도 준비를 해 왔습니다. 다들 쫙 돌려 보시죠.”
그들은 전부 계획안을 받아들여 쭉 훑어보았다.
이윽고 사방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결국 그들은 참다못해 내게 따지고 들었다.
“회장님. 사업 규모를 조금 늘리는 대신, 그에 대한 부담 비용을 확 낮추셨네요? 오히려 지분을 적게 가진 저희들이 더 돈을 내야 한다니요?”
“그리고 국가가 부담하는 금액도 상당합니다.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들어보니, 이번에 북한 핵 실험으로 투자 이익을 꽤 보셨다던데······.”
나는 더욱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지금 그 얘기가 왜 여기서 나오는 겁니까? 그래서 돈 더 번 놈이 내놓으라 이거예요? 그럼 어디 여기 계신 분들 장부 한번 다 털어 볼까요? 누가 얼마나 돈을 벌고 다니는지. 정 싫으시면 싫다고 말씀을 하세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갈 테니.”
마음에 안 들면 다 던져 놓고 나간다는 협박까지 하자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고, 지분을 들고 있는 기업의 대표들이 조심스레 말했다.
“회장님. 아무리 그래도 저희가 부담하는 금액을 조금 낮춰 주시는 게······.”
“예. 이건 거의 갈취 수준입니다.”
참 똥줄이 탈 것이다.
내가 여기서 던지면 저들이 가진 지분은 전부 휴짓조각이 된다. 그렇다고 내 제안을 받아들이자니 당장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 너무 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권오준 대표가 나섰다.
“회장님. 제가 봐도 조금 너무하셨어요.”
그 말에 그들은 잠깐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 밝은 빛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저희 회장님은 한번 고집을 부리시면 포기를 안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타협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타, 타협점이요?”
“예. 갖고 계신 지분을 저희가 제시하는 가격에 전부 다 넘기십시오. 그럼, 공사 비용도 저희가 대고 투자 비용도 전부 J&H가 부담하는 겁니다.”
“잠시만요! 그 말씀은 그냥 손 털고 나가라는 거 아닙니까?”
“예. 아주 잘 이해하셨습니다. 손 털고 나가십시오. 어차피 저희가 여기서 안 한다고 포기하면 다 소각되는 지분들 아닙니까? 뭐, 소송이라도 거시려고요? 투자한 금액을 돌려받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다 아실 만한 분들이잖아요.”
결국 이번 회의의 중점은 저들이 가진 지분을 내가 다 차지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싼 값에!
이런 제안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전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서로 모여 뭔가를 속삭이는 동안 나는 여유롭게 커피가 담긴 잔을 들이켜며 기다렸다. 오늘따라 블랙커피가 참 달콤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