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05화
“바짝 쫄아 있는 거 같지 않습니까?”
고해성사하듯 자신이 아는 걸 전부 다 불고 가 버린 김 장관이었다.
권오준 대표도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는 걸 깨달은 듯 보였다.
“예.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몰라 노심초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LK 그룹 정도면 나름 입김이 있겠죠. 거기서 작정하고 김 장관을 털기 시작하면 먼지가 안 나오겠습니까? 검찰에서 칼춤 한번 제대로 출 수도 있죠. 어쩌면 정부도 용산 프로젝트 희생양으로 김 장관을 지목할지 모릅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는 장관인 만큼 이리저리 받아 처먹은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부메랑처럼 날아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이 프로젝트는 포기한다고 하셨잖아요.”
“김 장관을 보니까 좀 짠하더군요. 저러다 목 날아가면 참 억울하지 않겠어요?”
“회장님이 생판 남을 신경 쓸 분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흐흐. 그냥 해 본 말입니다. 사실 김 장관이 똥줄 타는 걸 보고 너무 고소하더라고요.”
감히 내가 건네준 제안을 저울질했던 놈이다. 더 놀려 먹고 싶긴 한데, 그냥 놔두기에는 이번 기회가 아까웠다.
“아무래도 칼자루는 우리가 쥔 거 같으니, 기존에 있던 제안을 싹 다 갈아엎어야죠.”
“최대한 J&H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입니까?”
“예. 저쪽 상황을 보니, 우리 제안을 받지 않으면 꽤나 복잡해질 것 같아요. 우리가 요구하는 건 최대한 들어주려 할 겁니다. 안 하면 내가 언제든 손을 털 수 있다는 걸 알 테니까요.”
지금쯤 청와대도 괜한 일을 벌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창조 경제의 대표적인 뭔가를 만들기 위해 다 죽어 가는 용산 프로젝트를 건드려 본 건데,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갈 줄 누가 예측이나 했겠는가.
LK 그룹도 좋다고 정부의 뒤를 따라가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그 덕분에 관광개발 계열사를 싹 날려 버리게 생겨 이를 빠득 갈고 있는 상태.
정부는 이대로 수습이 안 되면 차라리 김 장관을 앞에 내세워 일을 마무리할 셈인 것 같았다.
“그러다 청와대가 깔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냥 김 장관을 단두대에 세우고 말입니다.”
“그러지 못하게 해야죠. 그래서 언론에 돈을 쫙 뿌려 화력을 집중시킬 생각입니다. 먼저 정부의 책임 없는 행동을 비판하게 만들고, 그다음은 J&H가 딱 구원자처럼 나타나 사태를 정리하고 있다는 듯이 잘 꾸며 말하는 겁니다.”
“그럼, 단숨에 회장님은 영웅이 되시겠군요.”
“예. 반드시 그렇게 보여야 합니다. 그 정도로 몰아붙이면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의 제안을 전부 받아들이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될 겁니다.”
언론이 먼저 포문을 열어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 국민들이 나서서 화력 지원을 해 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잘 양념이 되면 내가 나서서 마무리를 하면 된다.
아주 완벽한 각본이었다.
“제가 바삐 움직여야겠습니다. 언론사에 요즘 고생한다고 박스를 돌려야겠군요.”
“예. 광고도 빵빵하게 넣어 준다고 하세요. 그리고 이제 그런 일은 직접 하지 마시고 밑의 사람들 시키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닙니다. 아직 뛰어다닐 수 있을 때 뛰어다녀야죠. 그리고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건데, 눈에 힘 팍 주고 갑질 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있음에도 여전히 활동적인 양반이다.
어쩔 땐 나보다 더 체력이 남아도는 것 같다.
이거, 나도 운동을 좀 해야겠는데?
* * *
“용산 프로젝트는 엄연히 사기입니다. 대형 프로젝트라고는 하나, 결국 삽 몇 번 뜬 게 전부지 않습니까? 대행사도 그렇고, 정부 기관도 그렇고. 의심스럽지 않은 곳이 단 한 곳도 없어요. 이건 분명 잘못된 일이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분명 엄청난 비리가 있지 않은 한,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수가 있습니까? 명백하게 조사를 해서라도 누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였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뉴스 채널에서는 전문가들이 나와 용산 프로젝트를 대차게 까기 시작했다.
각 언론사들에서도 용산 프로젝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며 탁상행정이 만들어 낸 세계적인 웃음거리라는 기사까지 나왔다.
청와대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정상화를 시키겠다고 말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고, 당연히 언론의 공격은 날이 갈수록 그 수위가 높아졌다.
이제 타이밍 맞춰서 내가 등장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모두의 이목이 내게 쏠리게 될 것이고, 청와대는 협상 테이블로 나와 내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요즘 일이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에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천하 금융 사장, 장기철이었다.
나는 그가 건네는 잔을 받으며 말했다.
“그냥 평범합니다. 이미 혼란스러운 시기는 지나갔으니까요.”
“그 말이 아닙니다. 용산 프로젝트를 말하는 거죠.”
“······예?”
“딱 보니 알겠던데요? 지금 언론이 이렇게 불장난을 치고 있는 건 누군가가 이 불을 끌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게 바로 이 회장님 아니십니까?”
장기철 사장, 이 양반 눈치가 보통이 아니구나.
그래서 이번 위기도 무사히 넘겼던 건가?
나는 구태여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절 다 찾으셨는지요?”
“그동안 천하 금융과 J&H 금융 사이에 교류가 아예 없었잖아요. 겸사겸사해서 약속을 잡은 것뿐입니다.”
“단순한 친목을 위해 마련한 자리라는 겁니까?”
“하하. 그렇죠. 그리고 제가 감사해할 부분도 있고요.”
“사장님이 제게요?”
“이번에 북한 문제로 시끄러워지기 전에 J&H 금융이 갑자기 블루칩을 내다 팔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나도 그게 궁금했다.
다른 금융사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가져갔는데, 유독 천하 금융만 평정심을 유지했다.
“직감으로 알아차린 거죠. J&H 금융은 그 어떤 금융사도 가지고 있지 않은 특급 정보를 알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귀사처럼 무작정 블루칩을 내다 팔 순 없는 지경이라 그냥 지켜만 보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꼭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대체 그런 특급 정보는 어디서 구하는 겁니까?”
“특급 정보라······. 죄송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거죠. 원래는 재정비를 하기 위해 돈을 한곳에 모은 것뿐이니까요.”
장기철 사장은 피식 웃으며 잔을 들었다.
“설마 저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건 아니겠죠?”
“믿고 안 믿고는 사장님의 자유입니다.”
“그 뜻은 특급 정보의 출처가 어딘지 말해 줄 수 없다는 거군요. 심지어 청와대도 몰랐던 사실을 미리 알아내는 정보처라니. 너무 부러운데요?”
내가 끝까지 아니라고 해 봤자, 이 양반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감이 좋다고 해야 하나?
자신의 직감 하나를 믿고 그 상황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다니.
달리 보면 무모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만큼 스스로의 실력을 믿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 그런 정보처가 있다면 장 사장님은 공개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안 하죠.”
“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런 정보처가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장기철 사장은 아리송하게 들리는 내 말을 미소로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슬쩍 내 옆구리를 찌르는 말을 던졌다.
“장현욱 부회장과도 은밀하게 만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순간 젓가락질을 하던 내 손이 멈췄다.
이런.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어야 했는데.
“하하. 제가 괜한 말을 꺼냈나요?”
“아니요. 뭐, 숨길 만한 일도 아닌데요.”
“음. 장현욱 부회장은 참 딱한 사람이죠.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 일가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아마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놈이라고 느낄 거예요. 실제로도 처형대에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참 이상하죠.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났는데 정작 자신은 모든 걸 잃은 채 태어났다고 믿다니.”
“평범한 생활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죠. 당장 내일 점심값을 걱정해야 하는 서민들의 삶을 그들이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장기철 사장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마치 자신은 재벌 일가의 구성원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예. 그래서 그런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보이더군요.”
“최후의 발악이요? 그렇군요. 역시 그것 때문에 회장님을 만났던 거군요.”
장기철 사장은 장현욱 부회장의 의도를 이미 알아챈 듯 보였다.
“사장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천하 그룹이 뒤엉킨 지배 구조를 풀기 위해 작업에 들어간 거 말입니까?”
숨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솔직하다.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장 사장은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대단한 일도 아니죠. 승계를 위한 작업일 뿐입니다. 세상에 이 사실을 퍼뜨린다고 해서 누구 하나 막을 사람도 없어요. 결국 묻힐 뿐이죠. 그래서 숨길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천하 그룹이 진행하고자 하면 아무도 막지 못한다······. 뭔가 뼈아프네요.”
“그게 천하 그룹이죠. 변방에 나가서는 그저 그런 대기업에 불과하지만, 한국에서는 왕실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감히 그곳을 공격하고자 하는 사람도 없고요. 제아무리 반기업적인 정치인들이 권력을 잡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들도 결국 돈을 좋아하거든요.”
불편한 진실이라고 해야 할까.
한국은 망해도 천하 그룹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건 오직 그 핏줄의 장남입니다. 나머지는 그저 숙청을 당하거나, 바짝 엎드려 왕이 떨어뜨려 주는 빵부스러기를 핥아먹으며 연명해야 합니다.”
장기철 사장도 장씨 일가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나, 선택받지 못한 자였다.
그런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빵부스러기 하나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면 왕의 발가락이라도 핥아 줄 사람은 이 나라에 참 많을 겁니다.”
그냥 부자도 아니고 무려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돈 걱정 한번 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남자다. 물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겠지만, 내게는 그저 배부른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런 내 언짢은 심경을 읽은 장 사장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이쿠. 제가 잠시 허언을. 제 말뜻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럼 이제 그만 빙빙 돌리시고 제대로 된 목적을 말씀해 보시죠. 슬슬 지겨워지려고 합니다.”
더 쓸데없는 얘기를 한다면 친목이고 뭐고 그냥 나가겠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이 사람은 천하 그룹의 일원이나 최종 결정권자가 아니다. 이 사람을 적으로 만든다고 해서 천하 그룹이 내 적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장기철은 잔을 깨끗하게 비운 뒤 속내를 드러냈다.
“장현욱 부회장에게 제안을 받은 게 있으시죠?”
“예. 있기는 합니다만, 별로 귀담아들을 필요도 없는 제안이었고, 그 제안이 무엇인지 알려 드릴 의무도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 제안이 뭔지는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장현욱 부회장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
“저도 장현욱 부회장과 같은 마음입니다. 둘 다 후계 구도에서는 완전히 밀려난 놈들이죠. 언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할 게 없는 위치입니다. 원래 인간이라는 게 그렇지 않던가요? 밑바닥에 있으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싶어 하죠. 저희가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천하 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그들을 끌어내리고 싶습니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현재 권력을 잡고 있는 장연욱과 장선욱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어갈 수 있을 정도로 충성을 맹세하던 장기철이 이런 말을 꺼낼 줄이야.
어쩌면 장기철이야말로 속에 날카로운 도끼를 품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