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02화
“회장님.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건지······.”
임원들은 내 말에 즉각 행동에 나서기보다 일단 멈춰 서서 귀를 열었다.
철권 통치를 하는 게 아닌 이상, 이들에게 합당한 이유를 말해 주는 것이 옳다.
“리프레시라고나 할까요?”
“리프레시요?”
“예. 재정비를 하자는 겁니다. 그동안 쥐고 있던 지분 다 팔아서 자금을 한곳에 모아 보자고요. 어디다 투자를 하면 좋을지 포트폴리오를 각자 만들어 오세요. 그걸 보고 판단을 해 보겠습니다.”
이게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하는 얼굴들이었다.
권오준 대표도 적잖게 당황했는지 급하게 나를 불렀다.
“회장님. 재정비라니요. 블루칩을 한꺼번에 다 팔아서 재정비를 하는 금융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가요? 그럼, 우리가 첫 금융사가 되겠네요.”
“진심이십니까? 고객들의 반발이 거셀 겁니다.”
“그래서 제가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고객들한테 분명히 말하라고. 저희는 더 나은 수익을 위해 지분을 파는 거라고 조언을 드렸지만, 그걸 거부한 건 고객님이라고 말입니다. 확실하게 녹음까지 따 놓으세요.”
펀드 혹은 투자 위임을 통해 증권사가 개인의 돈을 굴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일 보고를 받아 가며 자신의 돈이 어디에 들어가는지를 확인하기 때문에, 망할 일 없는 블루칩을 전부 다 빼 버린다고 하면 분명 말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사전에 문제를 차단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이 아닌, 고객의 선택에 의해 문제가 생기면 그건 고객의 잘못이라고 말이다.
“······.”
임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나와 권오준 대표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권 대표는 짧게 헛기침을 뱉으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뭣들 하고 계십니까? 회장님의 지시 사항입니다. 모두 각자의 일터로 돌아가서 지시에 따르세요.”
임원들은 꽤 충격이 컸는지 조금 넋이 나간 얼굴로 전부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권오준 대표도 무너지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회장님. 재고해······ 아니. 재고할 생각은 없으시겠죠?”
이미 내 스타일을 알고 있는 권 대표다. 한번 결정한 것을 번복하는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예. 그럴 일 없습니다.”
“설마 무슨 정보라도 얻은 게 있으십니까?”
“음. 딱히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재정비를 하겠다는······.”
“조금 상식 밖인가요?”
“많이 밖이죠. 블루칩을 이대로 다 처분해 버리면 다른 금융사들이 죄다 가져갈 게 뻔합니다. 거기다 옵션 판매까지 중단하셨잖아요. 이건 마치 뭔가 터진다는 걸 아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렇게 급작스러운 투자를 결정할 때면 항상 뭔가 일이 생긴다는 걸 권 대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직감이랄까요?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잖아요. 한 번쯤 이렇게 충격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죠.”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지만, 그래도 스스로의 마음을 따르기로 결심한 듯 권오준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바쁘게 움직여야겠습니다. 블루칩 다 매각하고 옵션 판매까지 죄다 중지시키려면요. 한꺼번에 물량을 쏟으면 가격 손해를 보게 되니, 금융사들에 전화 돌려서 살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예. 그렇게 해 주세요.”
기관이나 혹은 금융사가 들고 있는 대량 지분을 매각할 때는 한꺼번에 시장에 풀어 놓기보다는 다른 금융사나 관심 있는 기업에 먼저 문의를 넣는 것이 금융계의 룰이다.
수많은 물량이 갑자기 풀리게 되면 주가가 출렁이면서 모두가 손해를 보는 그림이 나온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금융사들끼리 만들어 놓은 암묵적인 합의라고 보면 된다.
권 대표가 저렇게 뛰어다니면서 정보를 흘리면 금융사들도 긴가민가하며 우리가 뿌리는 지분을 주워 가게 될 것이다.
* * *
“뭘 팔아?”
“대다수가 블루칩들입니다. 지금 J&H가 모든 라인을 돌려 가며 매수 의향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KV 금융 사장은 몇몇 임원들과 함께 일식집에서 식사를 하던 중 눈살 찌푸리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거 언제 나온 얘기야?”
“오늘 오전 11시에 전화가 왔었습니다.”
어느 임원의 말에 그는 젓가락을 세게 내려놓았다.
“이 사람들이······. 그 중요한 걸 이제 말했다고? 지금 시간이 12시야. 1시간 전 내용을 지금 말하면 어떡해?! 그거 들었으면 내가 여기서 한가롭게 우동 면발이나 처먹고 있었겠냐고!”
“죄, 죄송합니다. 잠시 알아본다는 게······.”
“그런 일이 있으면 즉각 보고부터 해!”
임원들은 잔뜩 흥분해 있는 사장을 달래기 위해 하나둘 입을 열었다.
“그냥 지분을 매각하는 거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요즘 J&H가 용산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 때문에 급하게 돈을 마련하려고 지분을 매각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 자금 마련으로 급하게 매각을 하는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얘기였다.
“당신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J&H 자금력이 우리보다 훨씬 좋을걸? 잘 생각해 봐. 죄다 블루칩들만 내놓고 있어. 이진석 회장의 재가가 떨어지지 않으면 결코 있을 수 없을 일이야. 아무리 돈이 필요하다고 블루칩을 파는 놈이 어디 있나? 대기업 지분 얻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너도나도 다 사 가려고 하는 게 블루칩인데!”
“그건······.”
“이거 분명 뭔가가 있는 거야. 그놈이 가끔씩 이런 미친 짓을 할 때면 꼭 무슨 미친 상황이 발생한다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가롭게 앉아 있던 임원들에게 호통을 쳤다.
“여기 계속 죽치고 앉아 있을 거야?! 전 라인 동원해서 이진석 그놈이 뭔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봐야 할 거 아냐!”
임원들은 먹던 것도 뱉어내고 후다닥 밖으로 나서야만 했다.
* * *
“이거 좀 수상한데요?”
KV 금융을 비롯해 여러 금융사들이 J&H 금융의 전화를 받고 난 뒤부터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현재 금융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천하 금융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지?”
천하 그룹 사장 장기철 역시 임원들과 마찬가지로 이상함을 느꼈다.
“팔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블루칩들을 전부 다 던진다? 이건 대체 무슨 의도인지 원······.”
“어떻게 할까요? 다른 금융사들이 눈치만 보고 있는 거 같은데, 그놈들이 챙겨 가기 전에 저희들이 먼저 선수를 칠까요?”
장기철 사장은 짧게 신음을 흘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금덩이나 다름없는 블루칩을 저렇게 던진다라······.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일까.
그걸 모르기 때문에 장기철 사장은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용산 프로젝트 때문에 자금이 좀 많이 든다고 하던데, 혹시 그것 때문은 아닐지?”
“음······. 다들 어떻게 생각해? 난 아무리 짱돌 굴려도 답이 안 나오는데. 난 이게 독약일 수도 있다고 보거든?”
장기철 사장은 장연욱 회장과 마찬가지로 핏줄이 같다. 그러나 핏줄이 같다고 하여 모두가 왕좌에 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연욱에게는 조카인 그는 당연히 출셋길이 막혔었지만, 금융 감각이 남다르다는 이유로 최근 천하 금융의 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런 그의 머리가 이 거래는 위험하다고 종을 울린다.
“이게 독약일 수가 있습니까?”
“뭐, 주가가 폭락하면 우리에겐 독약이지.”
“주가가 폭락한다고 해도 블루칩이 휴짓조각 될 일은 없지 않습니까.”
“주가 폭락하면 그걸 계속 들고 있게? 우린 금융사 직원들이야. 당장 눈앞의 실적부터 쌓아야 한다고. 금융사들 중에서 장기투자 바라보고 하는 놈들이 몇이나 있어? 다들 단기 투자에 미쳐서 그걸로 실적 쌓지.”
장기 투자가 훌륭한 성과를 낸다는 건 다들 알고 있다.
그러나 금융사는 장기 투자를 거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매일 실적을 쌓아야 하는 직원들이기 때문이다.
장기 투자를 한다고 돈을 왕창 뿌렸다가 몇 달 동안 손가락만 빨게 되면, 오너는 경영진을 모조리 갈아 치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들은 눈앞에 있는 수익을 따라가야만 한다.
그런 생존 본능이 투자 시장의 혼란을 더욱 가중할 때가 많다.
“어쨌든 블루칩을 가지고 있는 건 저희로서는 굉장한 이득입니다.”
“예. 그걸 팔겠다고 내놓은 놈이 멍청한 거죠. 당장 사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임원들은 J&H가 내놓은 물량을 매수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장기철 사장은 여전히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 정도로는 안 되겠어. 다른 내용들도 알아 와. 분명 이것 말고도 J&H가 취한 행동이 있을 거야. 그걸 알기 전까진 이거 승인 못 해.”
과감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장이 답답하기는 했으나,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기에 임원들은 사장실을 나가 J&H 금융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원들이 다시 우르르 모여들었다.
“사장님!”
“그래. 또 다른 움직임이라도 있어?”
“그게 이미 그쪽에서 내놓은 물량 40% 정도가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다른 금융사들은 블루칩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병신 같은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 장기철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임원들의 보고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J&H가 옵션 판매를 중단하고 오히려 매수 포지션을 잡아 낙엽을 줍고 있답니다.”
“어떤 옵션인데?”
“콜 옵션인지, 풋 옵션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풋 옵션일 것이다.
콜 옵션을 뽑았다면 주식을 계속 들고 있었을 터. 거기다 옵션 판매를 전면 중단했다?
“이 자식들, 곧 있으면 시장이 바닥으로 추락한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시장이 바닥을 쳐요? 새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몇 달 동안은 호황을 이루는 주식 시장이 갑자기 떨어질 일이 있을까요?”
“나도 모르지. 혹시 제2의 서브프라임이라도 터지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날 이후 매번 미국 시장을 체크하지 않습니까? 전혀 그런 조짐이 없었어요. 유럽도 마찬가지고, 다른 아시아 시장들도 이렇다 할 위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J&H에서 뭔가 베팅을 하고 있긴 한데, 아마 헛다리 짚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블루칩을 전량 매수하시죠. 다른 금융사들이 전부 빼앗아 가기 전에.”
임원들은 J&H가 헛짓을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징기철 사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 주도 건드리지 마. 그리고 시세 동향 자세히 알아봐.”
“사장님! 이런 좋은 기회를 날리신다고요?”
“너무 이진석을 의식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장기철 사장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의식? 아니. 거의 집착 수준이지. 당신들도 이진석이란 사람에 대해 집착 수준으로 의식하는 게 좋을 거야.”
“예?”
“괜히 아시아 투자의 대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니야. 이 바닥에 아무리 오래 굴러도 세계적으로 그렇게 유명해질 수가 없어. 그런데 이진석은 달라. 해외 뉴스 채널에서도 간간이 그 이름이 나올 정도니까. J&H 금융이 뭘 사고, 또 뭘 팔았는지 심층 분석하는 곳도 있을 정도야. 우리 대가리를 전부 합쳐도 이진석 한 명보다 못하다는 거지.”
“사, 사장님. 그렇게까지 이진석을 높이 평가하실 필요는······.”
“그 젊은 놈이 단순히 운이 좋아서 그 자리에 올라갔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들 다 옷 벗어. 그놈은 그냥 투자의 신이야. 그놈이 건든 것 중에 대박 안 터진 게 있었나? 블루칩을 팔면 손해라는 걸 뻔히 아는 이진석이 그걸 전부 다 매각하고 있어. 그렇다는 건 분명 뭔가가 터진다는 소리지. 난 저번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진 않을 거니까 그렇게들 알아.”
장기철 사장의 단호한 의지에 임원들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슬슬 궁금해졌다.
대체 이진석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