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00화
김 장관과의 은밀한 대화를 끝낸 뒤, 나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던 김 장관은 조금이나마 희망의 빛을 본 듯싶었다.
연회장 분위기를 보니, 다들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청와대 실무진들도 눈에 띄었다.
유미화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실권을 잡고 휘두르고 있다던 문고리 3인방도 여러 회장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새끼들은 볼 때마다 정이 안 가네.”
앉은 자리에서 거친 욕설을 토해 낸 건 다름 아닌 현광 건설 그룹 사장, 정대용이었다. 그는 대통령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는 저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끽해 봐야 비서질이나 하는 놈들이 어깨에 힘 팍 주고 다니는 꼴을 보고 있으면 열받지 않습니까?”
농담처럼 얼버무리려는 것 같았지만,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딱 2~3년만 지나 보세요. 분명 저놈들이 구설수에 오르게 될 겁니다.”
“쯧쯧. 나라가 어찌 되려고 저런 놈들이 설치고 다니는지.”
정대용이 쏘아 올린 공을 다른 사람들이 잘 받아 주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가끔 와인 잔을 드는 게 전부였다.
그런 날 의식한 모양인지, 한창 욕설을 내뱉던 사람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성이 없다고 느꼈다.
“아니. 벌써 가시려고?”
내가 그만 연회장을 나가려는 모양새를 취하자 정대용 사장이 날 붙잡았다.
“예. 밀린 일들이 많아서 그만 나가 보려고 합니다.”
“그래요. 바쁘신 분이니 어떻게 말릴 수가 없겠네. 대신, 다음에 식사라도 한번······?”
“물론입니다. 언제든 초대해 주십시오.”
“하하. 시원시원해서 좋네. 좋아요. 그럼, 다음에 봅시다.”
나는 정대용 사장과 인사를 나눈 뒤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곳을 빠져나온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이 회장님.”
누가 부르나 했더니, 천하 물산 부회장 장현욱이었다.
“혹시 지금 나가십니까?”
“예. 부회장님도?”
“네. 괜찮으시다면 저와 차라도 한잔하실 수 있을까요?”
장현욱과 내가 딱히 나눌 얘기는 없어 보였지만, 오죽하면 내가 나오기를 기다렸을까 싶어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우리 두 사람은 각자 경호 차량을 타고 청와대 밖을 나와 미리 잡아 놓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커피는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뭐, 커피 맛을 보려고 온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런 자리를 만드셨는지······?”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본론에 들어가자 장현욱은 오히려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J&H의 힘을 조금 빌리고 싶어 회장님에게 부탁을 하려는 겁니다.”
“J&H의 힘?”
“예. 아시다시피 천하 그룹의 후계 구도가 점점 굳건해지고 있습니다. 장남이라는 이유로 장선욱 부회장이 모든 걸 물려받고 있죠.”
장현욱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사전에 선을 그었다.
“그거야 천하 그룹의 경영 철학 아닙니까? 장연욱 회장님도 천하 그룹을 승계받았을 당시 모든 걸 몰아준 거로 알고 있습니다. 현광 그룹을 보세요. 괜히 여기저기 지분을 나눠 주다가 그룹이 산산조각 났잖아요. 장연욱 회장님은 한 명에 몰아 주지 않으면 결국 다 찢어져 버린다는 걸 알고 계신 거예요.”
“하지만 눈 뜨고 당할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3년 일찍 태어났다고 모든 걸 가져가는 건 너무 불공평합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세요. 장남이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면 항상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장 회장님은 역사를 통해 알고 계신 겁니다.”
내가 철저히 선을 긋고 있다는 걸 알아챈 장현욱 부회장은 어두운 낯빛을 드러내며 말했다.
“이 회장님도 제게 전혀 희망이 없다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아마 재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겠죠. 제 형이 회장으로 승진하면 저는 곧바로 목이 날아간다는 걸.”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변함없는 사실인 것을.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저는 남의 집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천하 그룹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아무래도 오늘은 자리를 잘못 마련한 듯하군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바쁜 사람을 불러 놓았나 싶었는데, 결국 자기 하소연이었다.
J&H의 힘을 빌린다고 해서 천하 그룹을 어떻게 건들 수 있겠는가.
이런 만남은 사절이다.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얘기를 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장현욱 이 양반, 꽤 끈질기다.
“어떤 얘기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걸 듣는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요?”
“확실히 다릅니다.”
나는 슬그머니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일단 뭔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는 보겠으나, 영 맹탕이면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이다.
그런 내 얼굴빛을 읽은 장현욱 부회장이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천하 그룹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곳은 천하 전자입니다. 그러나 지분을 컨트롤하는 곳은 전자가 아니에요. 바로 물산입니다. 5년 전에 건설을 흡수하고 그 외 자잘한 회사들까지 싸그리 모아 물산은 천하 그룹의 지주 회사가 되었죠.”
10년 전만 해도 각 대기업들은 순환 출자라는 방식을 고집해 기업을 운영해 왔다. 그러나 순환 출자가 공격적인 투자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 드러났고, 정부에서도 순환 출자를 법으로 금지하면서 지주 회사라는 개념이 새로 도입되었다. 천하 그룹은 여러 계열사를 통합해 천하 물산을 지주 회사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천하 물산은 만들어진 지 꽤 오래된 계열사이기 때문에 지분을 한곳에 모으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엉켜 있는 지분들이 상당수 있고요.”
“서론은 거기까지 하시고 요점만 말씀해 주십시오. 저도 그 정도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천하 그룹이 유독 정부와 손발을 잘 맞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무슨 뜻이죠?”
“정부가 무엇을 시키든 천하 그룹은 별말 없이 고분고분 따르고 있습니다. 천하 그룹 정도면 한 번쯤 개겨도 이상할 게 없는데 말입니다.”
천하 그룹이 대한민국 1위 대기업이란 타이틀을 지킬 수 있는 건 천하 전자 때문도 있지만,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는 능력 때문이다. 이들이 정권에 불만이 있다면 분명 한마디쯤은 했을 텐데, 아직까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
“참여 정부 때 만들어진 주 5일제 근무 제도를 끝까지 고수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에 천하 그룹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번 정권에서는 주 5일제를 그렇게 반대했으면서 말입니다. 한술 더 떠서 정부는 주 4일 근무 제도를 시행해 보는 게 어떠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어요.”
“그거야 이미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혔기 때문이죠.”
“아닙니다. 저희 아버지가 주 5일 근무 제도를 얼마나 반대하셨는데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 불만도 표현하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재계에서 거의 은퇴한 거나 다름이 없으니, 더는 정부와 기 싸움을 하지 않으려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른 이유가 있었나?
“이번 정권에서 완전히 승계를 끝내려고 하는 겁니다. 장남한테 모든 걸 넘겨주려는 거죠.”
“그게 이번 정부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앞서 말씀드렸듯, 천하 물산은 복잡한 지분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하는 수 없이 지주 회사로 만든 거고요. 그리고 그 복잡한 실타래를 이번 정권과 함께 손을 잡아 싹 풀어내려는 겁니다. 신화 그룹 기억하시죠? 딱 그 짝입니다.”
장현욱 이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겠다.
설마 이 양반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부회장님 말씀을 듣고 있으면 마지막에 판을 뒤집을 수 있는 패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제가 천하 물산의 부회장입니다. 지분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죠. 저번 주부터 천천히 지분을 이동시키고 있어요. 정부의 묵인하에 말입니다. 천하 물산에다 지분을 전부 몰아주기 위해서는 몇몇 계열사들을 통합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감자를 피할 수 없죠. 자기가 들고 있는 주식이 소각된다면 주주들이 가만있겠습니까?”
“그걸 정부가 뻔히 아는데도 덮어 주고 있다?”
“예. 아마 큐가 떨어지면 순식간에 해치워 버릴 겁니다. 개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돈만 날리는 거고요. 이미 세 곳이 넘는 국가 기관이 협력 중입니다.”
신화 그룹 때와 상황이 좀 비슷하다.
국민연금 같은 국가 기관들은 대기업의 지분을 대량 보유하고 있다.
투자 수익을 내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여차하면 대기업을 압박할 무기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대기업이 승계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마어마한 상속세를 절세라는 이름으로 다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로비를 통하여 들어가는 돈이 상당하지만, 상속세를 생으로 내는 것보단 싸게 먹힌다.
“원래 대기업이 그런 수작을 부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좀 도를 넘었어요.”
“그 증거들을 갖고 계십니까?”
“예. 제가 은밀히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그걸 야당에 가지고 가도 쓸 만하지 않겠습니까?”
“현 정권이 이제 막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야당이 백번 찌른다고 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죠. 거기다 천하 그룹이 언론 통제를 시작하게 되면 보나 마나 흐지부지 사라질 겁니다.”
“그럼 아무리 봐도 제 도움이 필요해 보이진 않는데요?”
“아닙니다. J&H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나는 장현욱 부회장의 말을 중간에 잘라 버렸다.
“부회장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대충 알 것 같네요.”
“정말입니까?”
“천하 물산에 흡수될 회사 하나를 골라 거기 있는 주식을 대량 매입해서 발언권을 가지라는 뜻 아닙니까? 힘없는 개미들과는 달리 J&H 금융 정도면 충분히 이슈화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마 언론도 마냥 데스크를 틀어막을 순 없을 겁니다. 제 말이 맞죠?”
“하하. 잘 아시네요. 맞습니다. J&H 금융이 몇몇 계열사들의 주식을 매입해 대주주로써 권리를 행사한다면 천하 물산이 화들짝 놀랄 겁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설사 그렇게 했다고 해서 J&H에 이익이 갈 부분은 하나도 없는데요? 정의로운 일을 하려고 금융 그룹 회장이 된 게 아닙니다. 거기다 천하 그룹과 영원히 척을 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런 짓을 꾸밀 순 없죠.”
“하지만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아버지와 형님의 모략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회장으로 올라갈 기회가 열리게 되죠. 그렇게 되면 J&H에 큰 이익이지 않겠습니까?”
“이 작전이 성공한다고 해서 부회장님이 회장으로 임명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예. 그 대신 천하 그룹을 엄청나게 흔들 수 있게 되겠죠. 아마 사방팔방 지분이 튀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때 J&H가 대거 매수해서 오히려 천하 그룹을 야금야금 차지할 수 있다면요?”
이건 좀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불가능한 이야기다.
순환 출자에서 지주 회사로 탈바꿈하며 지배 구조가 흔들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장연욱 회장은 제 아들에게 모든 걸 물려주어 경영권에 철옹성을 만들려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연욱 회장이 쌓고자 하는 철벽을 과연 뚫을 수 있을까?
장현욱이 기회를 만들어 준다고 해도 실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흥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천하 그룹을 뒤흔드는 일이다. 어쩌면 현광처럼 그곳도 갈기갈기 찢어질 수도 있다.
당사자는 매우 속이 쓰리겠으나, 경쟁자들은 음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일.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내가 단호하게 대화를 끊자 한창 열을 올리던 장현욱 부회장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그러나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근거 있는 데이터가 있다면 제가 조금은 손을 내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의 얼굴에 다시 웃음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