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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계 천재가 되었다-99화 (99/200)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99화

청와대는 경제적 정책을 펼치기 전, 그에 협력할 수 있는 대기업 회장, 혹은 임원들을 불러 모은다.

현 대통령은 취임을 하자마자 바로 유망한 경제인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였는데, 그 당시 나는 아주 단단히 찍혀 있는 터라 부름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현찰을 세는 금융사라는 인식이 있다 보니, 경제 정책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금융인들이야말로 경제 정책에 가장 적합한 이들이 아닌가?

이들은 리스크를 관리하면서 어느 식으로 돈을 굴려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미국을 보라.

더러운 로비가 있긴 했지만, 미국 백악관은 월가의 인물들을 끌어모아 주요 자리에 앉혔다. 그들이 곧 돈을 움직이고, 경제를 좌우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금융인들을 모두 사기꾼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어 좀처럼 그런 모임에 초청하지 않는다.

분명 이번 초청도 내가 금융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건설 그룹을 인수했기 때문에 불러들였을 것이다.

“우리 쪽에서 용산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걸 청와대가 인지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전 그 프로젝트 할 생각 없는데.”

“그래도 뭔가 얻어 내는 건 있지 않겠습니까? 청와대가 초청한 명단을 보면 대다수가 건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천하 물산 사장과 현광 건설 사장도 참여를 한다는군요.”

“거기 회장님들은 행차 안 하신답니까?”

“경제인 모임 때 딱 한 번 모습 드러내고 그 뒤로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분들 아닙니까.”

천하 그룹과 현광 그룹의 회장들은 청와대가 부르는 경제인 모임 때 딱 한 번 모습을 드러내고 그다음에는 요청이 들어와도 거절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나이도 찰 대로 찼고, 본인 스스로가 실무를 맡는 대신 제 후계자가 될 아들들을 보내서 일을 맡게 하는 것이다.

“회장님도 정 불편하시면 제가 대신 가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대통령님 얼굴 한번 봐야죠. 청와대가 어떻게 생겼나 구경도 할 겸.”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다.

좋은 먹잇감을 던져 주면 받아먹겠지만, 그런 게 아니면 그냥 시간만 때우고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와대에 초청을 받으면 아주 당연하게도 경호 차량이 지급된다. 그리고 10명가량의 경호원들도 함께 지원이 되는데, 우리 회사 경호원들이 아니라 청와대 경호원들이 양옆에 있으니 뭔가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차량은 정문을 지나 어느덧 청와대에 도착하게 되었다.

청와대 안에 있는 연회장에는 이미 여러 총수들이 모여 있었고,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그들은 모두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몇몇은 불편한 시선으로, 또 몇몇은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 외 나머지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진 것이 조금 웃기긴 했지만, 나는 티 내지 않고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런 내게 누군가가 반갑게 인사하면 악수를 건넸다.

“이렇게 뵙는군요. 현광 건설 사장, 정대용이라고 합니다.”

정대용이라면 현광 건설 그룹 회장, 정영준의 큰아들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건네는 손을 붙잡았다.

“J&H 이진석이라고 합니다.”

“하하. 저희 회장님께 얘기는 몇 번 들었습니다. 며칠 동안은 자다가도 이 회장님 이름이라면 벌떡 일어나셨다고 하더라고요. 아직도 뒤통수가 얼얼하신 거 같기도 하고요.”

뭔가 시비를 걸려고 꺼낸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참 배울 게 많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더러 오늘 청와대 모임에 가서 이 회장님을 만나 많이 배우고 오라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오히려 배워야 하는 건 접니다. 정 사장님의 연륜과 경험에서 나오는 걸 제가 따라갈 순 없으니까요.”

“이런. 겸손하시기까지 하다니.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만나 뵈었으면 좋겠군요. 우리가 경쟁사이기는 하지만, 메카 프로젝트로 지금은 동맹 관계 아닙니까?”

“예. 저야 영광입니다.”

현광 건설의 정대용.

재벌집 장남답게 성깔이 보통 아니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임원들도 툭하면 정대용에게 싸대기를 맞거나, 참기 힘든 모욕을 당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기 동생과 지분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정영준 회장이 타개하게 되면 정대용과 그의 동생은 피 터지도록 싸워 건설 그룹을 쪼개 놓을지도 모른다.

“이진석 회장님?”

“아, 예.”

“천하 물산 부회장, 장현욱이라고 합니다.”

천하 물산 부회장, 장현욱.

모두가 알다시피 현재 천하 그룹을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는 건 장현욱의 형, 장선욱이다. 아직은 부회장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장연욱 회장이 완전히 그룹 일을 놓아 버리게 되면 장선욱은 가차 없이 제 동생을 잘라 낼 가능성이 높다.

현재 천하 그룹 후계 구도는 생각보다 복잡하지가 않다.

모든 건 한쪽에 몰아 줘야 한다는 천하 그룹의 경영 철학 때문인지, 장연욱 회장은 10년 전부터 차근차근 제 장남에게 회사를 물려주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그에 반해 둘째라는 이유로 장현욱에게는 쥐꼬리만 한 지분만 남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셋째는 아들이 아니라 딸인데, 그 딸은 지금 백화점과 호텔 일을 맡아 나름 좋은 성과를 내는 중이다.

그래서 그런지 천하 물산이란 이름이 있는데도 장현욱에게는 총수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 못 가 제 형에게 숙청당할 놈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인사말을 나누던 중, 드디어 이곳의 주인이 등장하게 됐다.

“대통령님 나오십니다.”

총수들은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강당으로 나오는 대통령을 향해 박수를 쳐 댔다.

유미화 대통령은 서글서글한 얼굴로 짧게 인사를 하며 강당 위에 섰다.

“바쁘신 와중에도 초청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미화 대통령은 준비한 원고대로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그중 중요한 포인트는 이곳에 우리를 모은 목적이었다.

“우리 정부는 창조 경제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경제 정책을 펼치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프로젝트를 다양하게 이뤄 내고자 합니다. 그 시작은 건설이 될 겁니다.”

한동안 메말라 있던 건설업에 단비를 내릴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말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용산국제도시 개발 프로젝트는 오래전부터 이어 온 뜻깊은 사업입니다. 지금 이것이 막히게 된다면 크나큰 손해로 이어질 것이고, 그건 고스란히 국민의 짐이 되고 맙니다.”

대통령은 우리를 이곳에 다 불러들인 속내를 슬슬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 사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생각입니다. 오늘 여기 계신 분들 중 용산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청와대에 문의를 하셔도 됩니다. 저희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방법을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노골적이다.

정부가 확실히 밀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긴 했지만, 그건 말로 하는 약속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돈이 상당하며 이미 야당에서는 보수 정권 최악의 사업이라고 비판 중이다.

그들이 들고일어나 프로젝트를 반대하고 국민의 여론을 끌어들이게 되면 일이 참 복잡해진다. 더군다나 프로젝트 자체가 워낙 꼬여 있어 대기업들도 이미 고개를 절레 흔들고 있는 상황.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은행 빚만 잔뜩 얻게 될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라 다들 대통령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듯 보였다.

“제가 너무 무거운 이야기만 한 거 같군요. 모두 즐겁게 만찬을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끝으로 대통령의 연설이 끝났다.

총수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충 박수를 친 뒤 각자 자리에 앉아 서빙되는 코스 요리를 즐겼다. 여기서 뭔가 더 대통령이 어필을 할 줄 알았는데, 이미 유미화 대통령은 온데간데없고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그중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국토교통부 장관 김용원이라고 합니다.”

“아, 예. 장관님. J&H 이진석 회장입니다.”

그는 나와 악수를 나누며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이 회장님. 잠깐 저와 조용한 곳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예. 그러시죠.”

국토교통부 장관이 나를 찾아왔다는 건 분명 용산 프로젝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른 대기업 총수들이 아니라 구태여 날 찾아왔다. 어쩌면 J&H가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을 수도 있다.

우리 두 사람은 집무실에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그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본론을 꺼냈다.

“J&H 건설 그룹에서 용산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김 장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임원들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번 정권이 용산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 큰 관심은 없었습니다.”

“정말입니까? 용산 프로젝트에는 큰 잠재적 가치가 있지 않나요? 이번 사우디 정부와 함께 메카 프로젝트도 추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거긴 사우디아라비아니까요. 거긴 미국발 외환 위기가 터져도 문제없이 잔금을 치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독 달러에 약하지 않습니까? 2008년 때의 상황이 또다시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금융을 잘 아시는 회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섭섭합니다. 이미 여러 번의 금융 위기를 통해 지금은 그 정도 충격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김 장관은 불쾌하다는 듯 얘기를 했지만, 사실은 사실이지 않은가.

한국은 여전히 달러에 약한 나라다. 언제 또 서브프라임 같은 일에 휘말려 주가가 출렁일지 모른다.

“장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는 걸. 주민들의 반대는 물론이요, 주먹구구식의 행정으로 너무 꼬여 버렸어요. 거기다 강남과 분당 쪽에 새로 철로를 뚫어 용산국제도시구역을 역세권으로 만드는 것도 어렵다고 하더군요.”

조목조목 알려진 팩트만 말해 주자 김 장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J&H는 아예 관심이 없다는 겁니까?”

“그거야 장관님이 어떻게 유혹을 하시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예? 유혹이요?”

“솔직히 LK 관광개발까지 두 손 번쩍 든 마당에 누가 이 프로젝트를 맡으려 할까요. 당장 천하 물산도 쳐다보지 않는 프로젝트인데.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다른 기업들과는 달리 아주 미미하게 호기심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 말에 김 장관이 어두워진 표정을 풀었다.

내가 타협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줬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아까 대통령님 말씀을 들으셨겠지만, 이번 정부가 화끈하게 밀어 드릴 겁니다. J&H가 청와대와 관계가 녹록지 않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를 잘만 성공시킨다면 그 불편한 관계가 해소되지 않을까요?”

“글쎄요. 제가 젊어서 그런지 남의 눈치를 잘 안 봅니다. 청와대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는 해도 딱히 회사에는 큰 영향이 없어요. 방금 장관님이 해 주신 말씀은 별로 와닿지 않는군요. 단순히 청와대와 좋은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지옥 불이 될지도 모르는 프로젝트를 떠안으라는 겁니까?”

내 억양이 조금 세지자 김 장관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럼, 다시 제안을 주시지요. 저도 무작정 들어갈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 프로젝트에 손을 담근다는 건 곧 건설 그룹과 금융 그룹이 한꺼번에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저희 회사에 투자를 해 주시는 주주분들이 과연 이걸 곧게 보고만 계실까요?”

이 정도 말했으면 눈치를 채야 하는 게 정상이다.

김 장관은 잠깐 생각을 하다 내게 물었다.

“혹시 따로 준비한 제안서라도 갖고 계십니까?”

나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완성형은 아닙니다. 그냥 가볍게 만들어 본 것뿐이에요.”

“하하. 역시 그러셨군요. 뭔가 들고 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오늘 밤이라도 직원들을 시켜 보내드리죠. 한번 검토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그런데 재차 말씀드리지만, 용산 프로젝트에 갖는 제 호기심은 정말 미미한 수준입니다.”

내 제안서를 까는 순간, 용산 프로젝트는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말이었다.

김 장관도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조금은 긴장한 눈치를 보였다.

J&H 말고는 누구 하나 그 프로젝트를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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