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98화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는 여성이 바지를 입을 수 없게 법으로 지정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213년째에 들어서서 여성 인권회가 그 말도 안 되는 법안을 철폐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여성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제 여성의 시대가 다다랐음을 선포했고, 온 세계가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본격적인 페미니즘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은 금방 꺼지고 말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갑작스러운 퇴임을 발표했고, 그를 뒤이어 교황 프란치스코가 선출되었다. 600년 동안 현직 교황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교황 자리가 바뀌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재선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서민들의 돈을 쪽쪽 빨아먹으며 돈 잔치를 벌이는 월가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재정부 장관과 여러 주요 인사들 자리에 월가의 인물들을 앉혔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행동은 월가의 노예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쏟아졌으나, 백악관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축구 승부 조작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FIFA에서는 유럽 A 매치에선 절대 승부 조작이 없다고 단언했지만, 최근 경기에 이상한 점을 발견한 유로폴은 수사에 착수했고, 챔피언스 리그를 비롯한 여러 경기에서 승부 조작 정황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싱가폴, 이탈리아 마피아들이 주도적으로 일을 벌인 것이며, 400명이 넘는 관련자들을 소환할 만큼 유로폴은 무섭게 수사를 이어 갔다.
“아무래도 사업을 엎을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듯 여러 사건이 터지고 있을 때 한국에서도 대형 사건이 하나 터지고 말았다.
단군 이래 최대의 사업이라 불리던 용산국제업무지구 프로젝트가 취소되고 만 것이다.
“이미 2008년에 서브프라임 사태로 한 번 엎어진 적이 있는데, 이걸 저번 정권에서 억지로 되살리려다 이 사태가 온 겁니다.”
2005년에 처음 사업이 선정되고 2007년에 프로젝트가 발표되었다.
건설교통부에서 주도한 사업으로 한국철도공사와 천하 물산이 합작을 해 최대 규모의 명품 수변 도시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미국발 금융 위기가 한국 대기업들을 뒤흔들었고, 초기 자금이 무려 30조 원이나 투입될 거라 예상되었던 이 프로젝트 역시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2008년에 잠정적으로 중단되어 있다가 저번 정권이 말아먹은 4대강 사업을 복구하고자 다시 한번 이 프로젝트를 건드렸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정권으로 이어온 것인데, 천하 물산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초기에 손절을 했고, 대타로 들어온 LK 관광개발이 현재 이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LK가 금융 부문을 넘기고 나서도 재정적으로 삐걱거리다 보니, 결국 이 프로젝트를 포기할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다가 행정적으로 일을 너무 개판처럼 처리했어요. 주민들의 반발은 물론, 역세권이라는 것도 결국 철로를 다시 뚫어야 한다는 건데, 그것마저도 완전히 꼬여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개발 프로젝트라 불리는 만큼, 책임을 맡고 있는 한국철도공사는 30개가 넘는 회사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그곳에서 가장 굵직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건 LK 관광개발인데, 이들이 가진 지분은 총 45%나 된다.
그런데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너무 망상적인 꿈을 품은 것이 큰 문제였다.
용산구 한강로와 이촌동. 그리고 용산역의 차량 사업소와 그 주변 지역을 철거하고 대규모 재개발에 들어간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였다.
이제까지 한국 역사상 이 정도 넓이의 재개발을 진행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 정도 규모의 재개발은 다른 나라에서도 이뤄지지 않았을 만큼 굉장히 모험적인 프로젝트였다.
그 어렵다는 재개발을, 그것도 이 정도 면적을 한꺼번에 재개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던 것.
결국 주변 주민들의 피해만 늘어 갔으며, 상식을 벗어난 한국철도공사의 행정으로 개발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J&H 건설 그룹 임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한영호 사장이 대표로 내게 말했다.
“LK 관광개발이 프로젝트를 포기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즉, 45%가 넘는 지분을 넘긴다는 건데, 과연 그것을 어디에다 넘길지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도 판에 끼어들어야 한다는 건가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한국 건설업은 지금 씨가 마른 상태이지 않습니까? 비록 문제가 많은 프로젝트이기는 하나, 뻥튀기된 걸 싹 다 도려내고 새롭게 시작한다면 J&H 건설이 한 발 더 발전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나는 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다가 임원들에게 물었다.
“리스크는요? 우리나라 최고의 건설 기업인 현광도 이 프로젝트는 쳐다보지도 않고 있어요. 거기다 천하물산은 진작 손절을 쳤고요. 그 말은 대형 건설사가 달려들어도 답이 안 보인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일단 초기 자금이 30조 원이나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었을 겁니다. 알아보니, 지금 프로젝트를 시작하려면 LK 관광개발이 초기 건설 자금을 3조 원이나 부담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또 시작에 불과한 것이, 3조 원이 곧 10조 원까지 불어난다는 거죠. 그렇게 꾸역꾸역 다 짓고 나면 벌써 10조 원이 넘는 투자금이 들어갔다는 건데, 현광과 천하 물산은 그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임원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이들이 내게 이 프로젝트를 건네는 건 별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 터.
“지금까지 하시는 얘기만 들어보면 절대 이 프로젝트를 파고들어선 안 될 것 같은데, 그럼에도 제게 추천을 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저희도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예?”
“회장님께서 건설사와 조선업을 살리지 않으셨습니까? 직접 현광과 담판을 지으실 동안 저희는 손가락만 빨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무능력하다고 손가락질해도 할 말이 없죠. 그리고 능력이 부족한 자는 잘려 나가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금융 부문과 건설 부문에서 종합 평가를 실시해 임원들의 목을 치려고 했다.
나의 경영 철학은 확실하다.
실력 있는 자는 끝까지 올라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옷을 벗어야 한다.
물론 당장 목을 칠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6개월 정도는 지켜보려고 했으니까. 그런데 권오준 대표가 임원들의 군기를 확실하게 잡아 놓고자 곧 임원 교체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슬쩍 흘렸다고 내게 보고 했었다.
지금 그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라 중공업 때부터 쌓아온 노하우로 분명 이 프로젝트를 잘 소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진심이십니까? 건설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답이 없는 프로젝트인 거 같은데.”
“그건 시작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일본을 봐도 이 정도 규모의 재개발을 한 번에 실행하진 않습니다. 지정해 놓은 면적부터가 잘못된 사업이에요. 아예 구역을 재개편하여 차근차근 이어 나간다면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프로젝트처럼 10년 이상은 너끈한 일거리입니다.”
구역을 재개편한다라.
나는 임원들이 직접 검토해서 내놓은 서류를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구역을 재개편한다면 가능성이 있습니까?”
“예. 프로젝트 형식이 작게 변할 것이고 들어가는 금액도 달라질 겁니다. 그러나 정부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긴 힘들 겁니다.”
“정부가 바라는 대로? 구체적으로 어떤 걸요?”
“이번 정권은 창조 경제에 힘을 싣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길 원합니다. 뭔가를 국민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거죠. 솔직히 프로젝트의 의미는 매우 좋습니다. 용인시에 엄청난 명품 도시를 세운다는 거니까요. 관광 유치에도 큰 힘이 될 겁니다. 처음으로 세워지는 빌딩 높이가 무려 111층이나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겉으로만 봐도 이번 정권이 잘하는 게 있구나 하는 걸 느끼게 만들고 싶은 거죠. 광화문의 청계천처럼 말입니다.”
광화문 청계천 사업은 전 대통령을 당선되게 해 준 희대의 사업이었다. 이번 정권 역시 청계천 때처럼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어 지지율을 굳건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욕심 때문에 정부는 너무 촉박한 시간을 던져 주었다.
“5년 안에 프로젝트를 완성하라는 건 억지죠. 10년 이상은 바라보고 가야 하는 사업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마련한 계획안대로 실행한다면 최소 15년입니다. 하지만 딱 5년만 두고 보면 아주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 겁니다.”
이들은 열성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이 프로젝트를 감당하기 위해서 많은 칩이 필요하다는 건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프로젝트를 아무리 축소한다고 해도 초기 자금이 3조 원을 넘어선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결국 저더러 3조 원의 돈을 내놓으라는 소리군요.”
“······죄송합니다.”
“만약 제가 3조 원을 여기다 꼬라박으려고 한다면 J&H 금융에 묶여 있는 돈을 풀어야 한다는 건데, 그 정도로 많은 돈을 끌어 올 여유가 없어요.”
임원들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이들은 J&H 금융이 무슨 수조 원의 돈을 뚝딱 만들어 내는 곳이라고 보는 듯하다.
“단단히 착각을 하시는 것 같군요. J&H 금융 그룹은 결국 투자자들에게서 돈을 받아 굴리는 곳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사모 펀드를 열어 진행할 수 없는 종류예요. 누가 미쳤다고 이미 망한 사업에 돈을 투자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는 건 J&H 금융 그룹만의 돈으로 시작을 해야 한다는 건데, 잊으셨어요? 건설과 조선업 살리려고 남아 있는 자금을 모두 끌어다 썼습니다.”
현재 J&H 금융에 남아 있는 돈이 없다.
이미 다른 곳에 씨앗을 뿌리느라 전부 다 써 버린 것이다.
“아쉬운 마음들은 잘 알겠지만, 이런 프로젝트에 굳이 집착하지 않아도 됩니다. 현광 건설과의 거래를 통해 이미 정부는 우리 쪽에 막힌 일거리를 하나둘 열어 주고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저희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아닙니다. 그래도 여러분이 어떻게든 J&H 건설 그룹을 정상으로 올려놓고자 노력하시는 거니까요.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반대할 수밖에 없겠군요. 다음을 기약합시다.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설사 있다고 해도 이걸 진행할 만한 칩이 없어요.”
솔직히 조금 욕심이 나는 프로젝트이긴 했다.
111층이 넘는 빌딩을 세우고 그 뒤부터 100층, 90층 등등의 높은 건물들을 연이어 쌓아 올린다.
완전히 두바이 프로젝트를 따라 한 것인데, 성공만 한다면 세계적인 국제 명품 도시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말한 프로젝트 축소를 정부에서 허가해 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초기 자금 3조 원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건설 그룹 임원들과의 회의를 끝내고 나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권오준 대표로부터 의외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회장님. 청와대에서 초청 요청이 왔습니다.”
“저한테요? 저번 경제인 모임 때도 쏙 빼놓더니.”
대통령이 새로 정권을 잡게 되면 영향력 높은 경제인들을 한곳에 모아 덕담을 나눈다. 거기에서 이뤄지는 로비들이 상당하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하지만 대통령은 날 부르지 않았다. J&H가 제대로 정권에 찍혔다는 걸 보여 주는 증거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초청을?
“예. 이번에 딱 20명만 초청을 하는데, 그중에 회장님도 포함된 겁니다.”
20명이라.
뭔가 숫자가 적어 보였다. 그리고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초청이기도 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나라님이 부르시면 저 같은 장사치는 머리 박고 가야죠.”
“그냥 확 거절해 버릴까요?”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그러다가 애써 풀어 놓은 건설사 쪽 일이 또 막힐지도 모르잖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정부와 관계를 조금 개선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현 정권과 계속 불편한 관계를 이어 나갈 순 없다.
그건 분명 회사에 불이익으로 다가오기 때문. 그리고 첫 여성 대통령의 모습이 어떤지도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