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96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주도하는 이번 메카 프로젝트는 J&H 건설과 현광 건설이 협업할 예정입니다. 이미 예정된 규모만 수백억 달러이며 또 어떤 식으로 발전될지 모를 다양한 잠재력을 갖춘 프로젝트입니다.
한동안 J&H를 때리던 언론은 모두 휘갈기던 펜대를 멈추고 현광 건설의 발표를 지켜보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작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프로젝트.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는 건설업계에 이만한 봄날이 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J&H와 현광은 철천지원수지간 아닙니까? 갑자기 두 그룹이 한데로 손을 모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현광 건설을 대표해 기자들 앞에 선 정주호 사장은 다소 민감한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했다.
“철천지원수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건설업이 꽤 많이 힘들어졌다는 건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서로서로 도와 상생하는 것이 우리 현광의 목표입니다. J&H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요. 불편한 과거는 이미 잊은 지 오래입니다.”
이 소식은 상당한 충격일 것이다.
J&H가 현광의 밥상을 엎는 바람에 청와대에 완전히 찍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 때문에 주가가 폭락하고 J&H 건설 그룹이 얼마 못 가 망할 거라며 조롱하는 자들도 넘쳐났다.
그러나 이번 기자 회견이 모든 걸 바꿔 놓았다.
영원한 적인 줄 알았던 현광이 J&H와 손을 잡았다는 건 곧 청와대도 J&H의 편을 들어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번에 시작되는 메카 프로젝트는 그 규모가 무려 수백억 달러에 이른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프로젝트를 J&H가 주도하고 있으니 당분간 이들이 자금적으로 쪼들리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모두가 알 것이다.
[J&H의 또 다른 기적.]
[J&H, 이번에는 건설로 성공하나?]
[건설과 조선업의 미래를 예측한 J&H 회장 이진석. 그의 성공 신화는 어디까지인가?]
현광 건설과 우리가 손을 잡았다는 기사가 나가자마자 각 언론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나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건설 그룹을 인수한 건 신의 한 수였으며, 나의 놀라운 기지로 건설업과 조선 사업 둘 다 회생시켰다고 칭송했다.
물론, 이들 중 절반은 권오준 대표가 광고를 밀어주면서 나온 기사이긴 하나, 현재 나에 대한 여론이 매우 좋다는 건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연예 기획사요?”
“예. 혹시 저희 쪽으로 투자 의뢰가 들어온 곳이 있나 해서요.”
권오준 대표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옆에 있던 현식이는 나를 이상한 놈처럼 쳐다보았다.
“연예 기획사? 갑자기 그게 뭐야? 너 혹시 막 이상한 생각 하고 있는······.”
“야. 시대가 어느 때인데 설마 음흉한 마음으로 내가 기획사를 알아보고 있겠냐?”
“너 군대에서 걸 그룹이라면 아주 환장했잖아.”
“그건 군대라서 그런 거고.”
군대에 가면 어떤 남자라도 걸그룹에 빠질 수 있다는 말이 예전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걸 그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나도 군대에서 아주 걸 그룹 전문가가 되었다. 신기한 건 전역하는 순간, 걸 그룹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식어 버린다는 것.
그건 지금도 그렇다.
옛날에는 연예인들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안 좋았다.
재벌들의 노리개.
딴따라 하면서 옷을 벗는 놈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모욕스러운 이름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다르다.
연예인들은 성공의 상징이 되었으며, 아이들의 워너비가 되어 가고 있다.
가끔 스폰서 문제로 이슈가 나긴 하지만, 그런 문제들이 차츰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회장님. 갑자기 연예 기획사는 왜······.”
“일단은 한번 찾아 주시겠어요? 대형 연예 기획사는 필요 없습니다. 성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기획사를 물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권 대표는 물어볼 게 많아 보였지만, 지금은 일단 넘어갔다.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말해 준다는 것을 경험으로 통해 알고 있는 것이다.
* * *
“확인을 해 보니 여러 기획사들이 투자 제안을 넣은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 쪽으로 넘어오기 전에 임원들이 적절하게 커트를 했습니다.”
“이유는요?”
“연예계 쪽은 불안 요소가 많다고 느낀 거죠. 거기다 수익 창출이 좋은 것도 아니고요. 겉만 화려하지, 속을 들여다보면 깡통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나라 3대 기획사들을 보면 규모가 크고 겉모습이 매우 화려해 돈을 많이 벌어들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포장을 뜯어보면 마이너스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금융사에서도 엔터테인먼트 쪽에 투자를 하는 걸 많이 꺼린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곳은요?”
“사실 별로 없다고 봐야 합니다. 투자 금액도 적은 편이고요. 1억에서 최대 50억까지입니다. 우리나라 3대 기획사 중 하나인 UG 아시죠? 거기서 회장님과 전속 계약을 하고 싶다는 의뢰서도 있었습니다.”
“저랑요?”
“예. 회장님에 대한 여론이 워낙 좋으니까요. 그래서 회장님을 방송에 내보내 그놈들도 이익을 챙기고 싶었겠죠. 이 기획서 보낸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전화라도 해서 확 욕이라도 퍼부어야 되나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와 전속 계약을 맺어 방송을 내보낸다라······.
깜찍한 발상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서류만 줘 보시겠어요? 한번 찬찬히 검토해 보고 싶습니다.”
“아, 네. 제가 검토를 먼저 해 보긴 했는데, 그나마 가능성이 조금은 있어 보이는 기획사가 하나 있습니다. 3대 기획사도 아니고, 아직 자라나는 새싹에 불과한 곳이에요.”
권오준 대표가 서류 하나를 건넸다.
그 서류를 펼쳐보자 회사명이 먼저 나왔다.
“클린 히트?”
“예. 강시현이라는 작곡가가 만든 기획사인데, 규모도 작고 저번에 내놓은 보이 그룹은 완전히 폭망해서 자금적으로 좀 딸리는 곳입니다. 은행 빚도 좀 있고요. 그런데 이번에 보이 그룹을 또 하나 내놓는다고 하더군요.”
“그런 곳을 왜 추천하시는 거죠?”
“회장님의 마음을 조금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헤아렸다?
권오준 대표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는 우리나라에서 그 누구보다도 투자판이 어떤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깡통이나 다름없는 연예 기획사에 투자한다는 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으신 거겠죠. 저는 거기서 뭔가를 새로 시작하시려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조금은 멀리 바라보고 계신 거죠.”
역시, 권오준 대표는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것 같았다.
내가 이익을 실현하고자 했다면 기획사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대표님은 제 뼛속까지 다 들여다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사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이야말로 이쁨을 받으니깐 말이죠. 아무튼, 이 회사를 추천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정말 이익을 위한 거라면 대형 기획사에 투자를 하는 것이 좋겠지만, 이 회사는 당장 이익을 실현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자금적으로 어려움이 있죠. 회장님께서 돈을 싸 들고 진입하시면 경영에 깊이 관여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권오준 대표는 내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만약 이 사람이 내 경쟁사의 대표였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 정도였다.
“100억만 던져 줘도 화들짝 놀라 회장님 앞에 머리를 조아릴 겁니다. 아직 상장을 한 곳이 아니기는 하지만, 100~200억 정도로 경영권을 위협할 만큼의 지분을 획득하실 수 있을 거예요.”
“여기 지분 구조가 어떻게 되죠?”
“KYP 아시죠? 우리나라 3대 기획사 중 하나. 거기가 지분 10% 정도 쥐고 있고 대표가 90% 다 들고 있습니다. 자기가 작곡으로 번 돈을 죄다 기획사에 쏟아부은 거죠. 은행에 대출 목적으로 담보를 맡긴 것도 있고요.”
클린 히트는 이렇다 할 대표적인 아이돌을 내놓지 못해 경영이 삐걱거리는 곳이었다. 전혀 발전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내가 아이돌 쪽은 아는 게 별로 없어 이들이 현재 론칭 준비 중이라는 보이 그룹이 잘될 가능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곳을 추천해 주었다는 건 권 대표가 또 다른 무언가를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 대표가 발이 넓습니다. 작곡가로 오랫동안 생활하기도 해서 그런지 여러 방면으로 손 닿는 곳이 많더군요. 솔직히 이런 가망 없는 회사가 은행 대출을 크게 땡길 수 있었던 것이 다 그 인맥 덕분이죠. 보이 그룹도 망하고, 그 후에 내놓은 걸 그룹도 망했는데 회사가 문 닫지 않고 계속 유지되고 있지 않습니까?”
서류를 확인해 보니 클린 히트는 총 3개의 팀을 내놓았는데, 그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혼성 그룹이었다. 그런데 큰 성공을 이뤄 낸 것도 아니고 그나마 조금 잘나가던 혼성 그룹도 다른 기획사로 넘어간 상태라 사실상 깡통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도 이 기획사가 문을 닫지 않고 유지하는 건 클린 히트 대표의 인맥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인맥이 내게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인수까지는 아니어도 이곳의 대주주가 되신다면 회장님이 천천히 계획을 실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회장님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정말 궁금합니다.”
클린 히트라.
서류상으로 봤을 땐 내 계획을 실현하기에 나쁘지 않은 곳 같았다.
“요즘 뉴스가 많이 시끄럽죠?”
“예? 어떤··· 아! 여론 조작 말씀이십니까?”
“네. 여론 조작으로 한창 뜨거울 때 아닙니까. 총선이 끝나서 그런지 여당은 떠들어 대거나 말거나 거의 무시하고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제가 그것을 보며 여러모로 느낀 바가 컸습니다.”
권오준 대표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 기획사에 투자를 하신다는 게, 여론을 움직일 만한 힘이 그곳에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비슷합니다. 지금 우리 금융사도 연예 기획사와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겉으로 보면 화려하지만, 위험한 곡예 중이라 언제 떨어질지 몰라요. 저에 대한 평판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 J&H도 같이 추락할 겁니다.”
우리 J&H의 최대 강점이자 단점으로 볼 수 있는 건 바로 나였다.
내가 곧 J&H의 브랜드이며, J&H가 곧 나의 분신이었다.
내 이름을 보고 J&H에 투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며, 나에 대한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J&H의 주가도 함께 곤두박질친다.
J&H가 압수 수색을 당했을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내 이미지가 한번 추락하자 회사의 주가도 같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번에 J&H 건설을 인수 추진했을 때도 언론이 조금만 건드리자 J&H의 주가가 또 추락세를 보였다.
“어떻게 사람이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국민들에게 항상 좋은 이미지와 좋은 인식을 줄 수 있는 것 역시 기획이라고 봅니다. 제가 아무리 나쁜 짓을 했어도 그것을 충분히 커버할 만한 힘이 있다면 어떨까요?”
“회장님의 브랜드에 흠집이 가지 않게 방패를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바로 그겁니다. 지금 저는 너무 맨몸이에요.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차라리 든든한 갑옷과 방패로 무장하고 싶습니다.”
다른 회사들과 다르게 J&H는 나와 너무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재벌 가문의 이미지가 실추한다고 해서 그 회사의 주가가 폭락을 하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미지가 금이 가면 회사가 휘청거린다. 그런 광경을 또 보고 싶진 않다.
그래서 연예 기획사를 시작으로 작은 언론사들을 하나씩 주워 담아 내 방패막이로 삼는 게 최종 목표였다.
내 한 몸 지킬 줄 알아야 점점 거대해지는 J&H 그룹을 지켜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