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94화
“음······.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예. 그때 분위기가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습니다.”
이강철 회장은 한영호 사장이 전해 주는 말을 들으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한라 그룹 때의 마인드가 남아 있다면 사표를 쓰고 나가라!
이것이 임원들에게 보내는 이진석의 메시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현광 건설이랑 손을 잡을 줄은 몰랐는데.”
“저도 놀랐습니다. 현광과는 영원히 척을 지고 살 줄 알았는데, 갑작스레 협업이라니요.”
이강철 회장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많이 놀라고 있었다.
이진석은 현광이라는 적을 자신의 아군으로 만들었다.
정영준 회장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가 이진석과 손을 잡았다. 그렇다는 건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
이강철 회장은 그게 가장 궁금했다.
그 자존심으로 가득 찬 정영준을 어떻게 고개 숙이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래. 임원들 분위기는 어때?”
“뒤숭숭하겠죠. 이미 몇몇은 사표를 쓰고 나가겠다는 의사를 저한테 조용히 밝혔습니다. 회장님을 봐서라도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쯧. 멍청한 인사들 같으니라고.”
“회장님. 그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회장님에 대한 충성심으로 각오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거야. 여기서 임원들이 단체로 사표 쓰고 나간다는 게 나를 위한 일이라고? 전혀 아니야. 오히려 날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거지.”
“예?”
한영호 사장은 뭔가 아차 싶었다.
자신이 캐치하지 못한 부분을 이강철 회장이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네도 감이 다 녹슬었구먼. 이 회장이 임원들 모아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낸 게 단순히 군기 잡으려 한 줄 알아? 아니야. 이제 슬슬 선을 긋겠다고 나한테 말하는 거지.”
“회장님한테요?”
“그래. 자네가 이렇게 쪼르르 달려와 나한테 다 일러바치고 있잖나. 그걸 노린 거지. 이 회장은 내가 직접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 주길 바라고 있는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진짜 그렇다면 실망이 큰데요. 회장님에게 받은 도움이 많을 텐데, 갑자기 줄을 다 끊어 버리라고 하다니.”
“임원들도 다 자네랑 비슷한 생각이겠지?”
“예. 이 사실을 알면 다들 이 회장에게 섭섭해할 겁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 줘야겠구먼. 다 똑똑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전부 다 헛똑똑이야.”
“회, 회장님.”
“뭐 하고 있어? 얼른 다 불러.”
이강철 회장의 작은 호통에 한영호 사장은 하는 수 없이 임원들을 전부 자택으로 모이게 했다. 이강철 회장은 한자리에 모인 임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몇몇은 다시 한라 그룹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가득 찼고, 몇몇은 이런 자리를 매우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들 핸드폰부터 꺼내.”
이강철 회장의 지시대로 전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한라 그룹과 관련되어 있는 전화번호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다 삭제한다.”
“예?!”
“회장님!”
임원들이 화들짝 놀라자 이강철 회장은 더욱 세게 나갔다.
“다들 귓구멍이 막혔어?! 얼른 삭제하라니깐!”
이 회장의 일갈에 모두 빠르게 번호를 삭제했다. 그리고 다들 핸드폰을 내려놓자 묵묵히 있던 이강철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한라 그룹에서 해 왔던 일들은 모두 잊어. 괜히 한라 그룹 발목 잡지 말라는 뜻이다. 나도 너희들 발목 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냥 한라 그룹에 대한 모든 걸 잊는 게 좋을 거야.”
“회장님. 그럴 순 없습니다.”
“예. 저희가 회장님과 같이 함께한 세월이 얼마입니까?”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회장님.”
임원들은 절절하게 이 회장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그는 냉혹하게 뿌리쳤다.
“이 양반들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거야? 새로운 둥지에 들어갔으면 거기서 날개를 펼칠 줄 알아야지. 산가 초가 다 태워 먹은 곳에서 뭘 하려고? 이제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말게. 어떠한 연락도 하지 말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한라 그룹에 대한 모든 걸 잊어. 그리고 J&H에서 새롭게 시작해.”
이강철 회장의 발언에 임원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영호 사장을 바라보았다.
한영호 사장은 그 눈총을 못 이겨 총대를 멨다.
“회장님. 적어도 왜 갑자기 이러시는지 이유라도 설명해 주십시오.”
“보면 모르겠나? 그냥 늙은이의 변덕이지. 우리 가문이 쓰러지고 있으니, 붙어 있는 건더기들을 싹 다 떼어 내려는 거야. 더는 나한테서 빨아 먹을 거 없으니까, 다들 빨대 꽂을 생각 마.”
“회장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난 자네들 책임질 생각 없어. 그러니 이진석 회장한테나 잘 보여. 그 친구는 자네들 주머니를 두둑이 채워 줄 힘이 있으니까.”
안부 인사 전화를 걸었을 때만 하더라도 전부 부드럽게 받아 준 이강철 회장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돌변할 줄이야.
“아직도 엉덩이 붙이고 뭐 하고 있누? 여긴 한라 그룹이랑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발붙일 곳이 아니야.”
축객령이 떨어지자 임원들은 굳은 얼굴로 하나둘 회장실을 떠났다. 하지만 한영호 사장은 여전히 자리에 남아 있었다.
“회장님······.”
단둘이 남게 되자 그제서야 이강철 회장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자네가 임원들을 잘 다독여 주게. 내가 참 미안한 게 많아.”
“그런데 왜 그리 모질게 보내셨습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저자들이 나랑 연을 끊고 새롭게 시작할 거 아닌가? 지금 나는 저자들에게 장애물일 뿐이야. 그 장애물을 치워 줘야지.”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고 있는 이강철 회장을 보고 있자니 한영호 사장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렇게까지 해 줬으니, 이진석 그 친구도 더는 말이 없을 거야.”
“이게 전부 이진석 회장을 위한 겁니까? 꼭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이건 그 친구를 위한 게 아니야. 나랑 우리 한라 그룹을 위한 거지. 만약 여기서 임원들이 들고일어나 전부 내 편을 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나?”
“그거야······.”
“그날로 한라 그룹은 J&H에 전부 다 넘어가 버려. 어쩌면 현광에 넘어갈 수도 있고.”
“서, 설마요. 이 회장이 그 정도로 막가파는 아닙니다.”
“아니지. 매우 현명한 거지. 지금 이진석 그 친구에게는 칼자루가 쥐어져 있어. 그 칼로 언제든 내 목을 칠 수가 있지. 현광과도 손을 잡은 친구야. 그 말인즉슨 현광을 등에 업고 한라 그룹을 박살 낼 수가 있다는 뜻이고.”
그동안 한영호 사장이 봐 온 이진석은 그런 냉혈한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강철 회장은 그 반대를 얘기하고 있다.
“돈과 관련된 일이라면 사적인 감정을 전부 배제하는 친구야. 나와 친분이 있다고 해서 칼을 휘두르는 걸 주저할 거 같나? 전혀 안 그래. 임원들을 가지고 내가 장난치는 순간, 그 칼은 곧바로 한라 그룹을 쪼개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 걸세. 이진석 그 친구··· 아주 무서운 젊은이야.”
“······.”
“당장 오늘이라도 칼부림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 현광과 같은 편이 됐어. 아무리 협상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 악독한 적을 단번에 아군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근데 그 어려운 걸 이진석은 해냈다는 거지. 난 그런 친구랑 싸울 생각이 요만큼도 없네. 오히려 칼을 휘두르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엎드려 있는 게 나아.”
이강철 회장의 말에 한영호 사장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이 정도로 이진석을 높이 평가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네도 이제 처신 잘 해. 오늘이 마지막이야. 임원들에게 했던 말처럼, 자네도 한라 그룹과 관련된 건 전부 잊어. 두 번 다시 날 찾아오지 말고.”
“회장님. 그건 너무 가혹한······.”
“이진석 그 친구가 이미 자네 뒤에 사람도 붙여 놓았을걸? 앞으로도 쭉 그렇게 날 찾아온다면 그 친구는 절대 자네를 곁에 안 둬. 오히려 잘라내 버리지. 그러니까 이제 나와는 남남이 되어야 할 거야.”
설마 그렇게까지 치밀하게?
알면 알수록 이진석에 대한 사람이 무섭게 느껴지는 한영호 사장이었다.
“자네도 그만 가 봐. 일 처리를 다 했으니, 나도 보고를 올려야지.”
“······예.”
한영호 사장은 힘없는 발걸음을 회장실을 나왔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한라 중공업이 정말로 역사 속에 사라졌다는 것이 드디어 실감 났다.
* * *
“공사다망하여 자주 찾아뵙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회장님.”
“허허. 아니야. 꾸준히 찾아가서 조공을 바쳐야 하는 건 내 입장 아닌가?”
이강철 회장은 조금은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로 나와 겸상을 하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뜨끈하게 데워진 사케를 한 잔씩 나누며 신변잡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이강철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교통정리는 내가 다 끝냈네. 이제 임원들 중 한라 그룹에 줄이 닿는 사람은 없을 거야. 뿌리부터 말끔히 제거해 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말을 던졌다.
“하지만 한번 박힌 뿌리가 쉽게 사라질까요?”
“의외로 이 바닥에서 뿌리는 손쉽게 제거가 된다네. 그리고 그 뿌리가 다시 자라나는 일이 없게 내가 확실히 단도리 지어 주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어려운 결정이셨을 텐데······.”
내가 가려운 부분을 이강철 회장이 잘 긁어 주었다.
한라 그룹의 뿌리를 두고 있는 임원들. 그들의 뿌리를 이 회장이 직접 잘라 준 것이다.
“정해진 수순이었을 뿐. 단지 그 시기가 내 예상보다 빨리 왔었을 뿐이야. 솔직히 난 자네가 직접 나서서 J&H 건설 그룹을 일으킬 줄 몰랐거든.”
“운이 좋았습니다. 사우디 프로젝트도 그렇고, 이번에 터진 중국 조선소 이슈도 그렇고요.”
“참 절묘하지 않은가? 어떻게 자네가 한라 중공업을 인수하자마자 그런 일들이 연이어 터지는 거지?”
“운칠기삼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운칠기삼이라······.”
이강철 회장은 천천히 잔을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운이라고는 할 수 없지. 이건 다 자네의 실력이야. 사람마다 그릇이라는 게 있거든. 아무리 운이 좋아도 그 그릇이 다 담지 못하면 넘쳐 흐를 뿐이지.”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지금 한라 그룹을 보게. 내가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서 회사 일을 그만두고 내 아들에게 전권을 맡겼어. 그놈 그릇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 아들이니 분명 뭔가를 보여 줄 거라 믿었지. 하지만 결국 내 아들 녀석은 한계를 보여 줬어.”
“타이밍이 안 좋았죠. 건설과 조선소의 지옥 같은 시간이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안 그렇고? 자네는 계속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결국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운이 따라 주는 거야.”
이강철 회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뒤늦게 회사로 돌아왔을 땐 이미 늦었지. 현광이 우리 한라를 꿀꺽 삼키려 들었거든. 그래서 차선책으로 그런 비리 서류들을 차곡차곡 준비해 놓았던 걸세.”
그러면서 이강철 회장이 내 손을 붙잡았다.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밖에 없어. 이 늙은이가 살아 봤자 얼마를 더 살겠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직 정정하십니다.”
“아니야. 나도 내 갈 때를 알고 있다네. 그래서 이거 하나만 부탁을 하고 싶어.”
“말씀하십시오.”
“한라 그룹의 이름이 계속 남았으면 해. 그 이름만큼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내가 눈을 감고 난 뒤에도 말이야.”
다른 이가 보면 소소한 소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조금 과분한 소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무한 경쟁의 시대다. 도태되는 곳은 사라지기 마련.
그리고 과거의 영광과 리더십을 잃어버린 한라는 언제 없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이제 다른 세계로 나아가야 할 연장자의 마지막 소원이지 않은가.
“회장님의 말씀대로 한라의 이름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우이.”
이강철 회장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을 뿐, 나도 확신은 못 하겠다.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