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93화 (93/200)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93화

“나 때는 말이야. 중동에서 흙먼지 묻혀 가며 땅 파고 철근 올리고 식수도 끌어와서 썼어.”

술 몇 잔이 들어가고 나니 정 회장은 과거를 회상하며 썰을 풀고 있었다.

재벌가의 일원이기는 하나, 젊었을 적 제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직접 두바이로 날아가 공사 인부들과 함께 철근을 나르기까지 했다고 하니, 건설에 대한 경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네 번째 썰이 끝날 때쯤이었다.

“그래서 얼마쯤 던져 주려고?”

갑자기 훅 들어온다. 순간 당황할 뻔했다.

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얼마쯤이면 될까요?”

“허허. 먼저 값을 제시하지 않고 나한테 제시를 받겠다? 좋아. 그럼 우리 딱 까놓고 말해 볼까?”

“경청하겠습니다.”

정영준 회장은 술잔을 쭉 들이켠 다음 말을 이었다.

“자네가 내 쪽에 던져 준 서류는 아주 잘 봤네. 청와대와 내 뒤통수를 제대로 쳐 주는 프로젝트야. 솔직히 말해서 난 자네를 완전히 말려 죽일 생각이었거든.”

“예. 제가 운이 좀 좋습니다.”

“이걸 운이라고 해야 할까? 입찰 경쟁을 하기 전부터 미리 판을 깔아 놓은 거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데?”

“그런가요? 그런데 회장님.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요?”

“흐흐. 성질 급하기는.”

다시 잔을 채워 한입에 털어 넣는 정 회장이었다.

그런 뒤 세게 나왔다.

“50%. 프로젝트는 좋지만, 지금의 J&H 건설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야. 초기에는 가능하겠지. 아직 들어간 투자금도 많지 않고,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2년 정도 흐르면 알게 될 걸세. J&H 배가 점점 찢어지고 있다는 걸.”

50%라.

이 양반 세게 부르는군.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오늘 회장님 이득도 없이 비싼 밥값만 내게 생기셨습니다.”

“50%는 꿈도 꾸지 마라? 좋아. 자네가 생각하는 내 몫이 얼마인데?”

난 주저 없이 대답했다.

“20%.”

그러자 정 회장의 얼굴이 붉게 변하면서 술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 전 그냥 일어나겠습니다.”

일어나는 척 몸을 일으키자 정 회장이 얼른 내 손을 붙잡았다.

“이 사람아. 어딜 가나? 내가 언제 마냥 싫다고 했어?”

“그럼요? 받아들이실 겁니까?”

“원래 이런 건 밀고 당기기를 해야 재미가 있는 거야. 앉아 보게.”

나는 다시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정 회장은 속이 타는지 물을 한 컵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좋아. 40%! 자네도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야. 프로젝트가 점점 더 거대해지면 그땐 현광 건설이 더 많이 일해야 할 걸세.”

“역시 그냥 일어나는 게 낫겠네요.”

“뭐, 뭐야? 40%도 안 받는다고? 이런 도둑놈 같은 심보를 봤나! 좋아. 30%!”

“전 분명 20%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20%면 대체 우린 뭘 먹고 살라는 거야? 자네도 장사하는 사람 아닌가? 20%는 억지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아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입 꼬리를 위로 올렸다.

“회장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프로젝트, 적어도 10년 이상은 너끈합니다. 매년 얼마를 벌어들일지 예측조차 안 되고요. 이제껏 있었던 그 어떤 프로젝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겁니다. 그리고 전 이걸 회장님과 나눠 먹기로 결심했고요. 그런데 제 호의를 이렇게 뭉개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쩌시려고?”

“천하 물산에 가야죠. 이번 연도에 2위를 차지하고 이제 1위 자리까지 노리고 있는 곳 아닙니까? 만약 이번 프로젝트로 저와 손을 잡게 되면 1위 자리를 결국 가져오지 않을까요?”

천하 그룹의 천하 물산.

천하 건설을 흡수한 천하 물산은 연 12조 원이라는 매출로 올해 2위 건설사로 이름을 올렸다. 전자부터 각 분야를 석권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천하 그룹은 이제 건설까지 장악하려 들고 있다.

한때 대한민국 대기업 1위와 2위를 다투고 있었던 현광으로서는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영준 회장은 천하 물산에 프로젝트를 던져 준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이 친구가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지금 그걸 천하 물산에 가져다 바치겠다고? 천하 물산에 그거 주면 건설업계는 전부 다 천하 물산이 장악하게 되는 거야!”

천하 물산이라면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키는 양반이다.

내가 제대로 허를 찌른 것이다.

“전 아쉬울 거 없습니다. 회장님처럼 J&H 건설을 대한민국 TOP으로 만들 생각도 없고요. 앞으로 10년 이상은 먹고살 걱정 없는 프로젝트를 잡았는데, 뭐가 아쉽겠습니까? 천하 물산이라면 20%를 충분히 맞춰 줄 거라 봅니다. 또 다양한 방면으로 저를 지원해 줄 수도 있겠죠.”

정 회장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천하 물산이라면 분명히 J&H가 건네는 손을 뿌리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호시탐탐 1위 자리를 차지하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지 않은가.

단순히 자존심 싸움이 아니다.

이건 밥그릇 두고 벌이는 신경전이다.

결국 정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내가 완전 말린 거 같은데.”

내가 사우디에서 프로젝트를 받은 순간, 현광은 심각하게 말린 거라고 봐야 한다.

정 회장은 입맛을 다시다 끝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에이. 완전히 내 속에 있는 살까지 다 발라 먹으려 작정을 했구먼.”

“회장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제가 회장님에게 호의를 보여 드리는 겁니다. 과거의 악연은 전부 청산하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말이죠.”

“그런 사람이 20%만 던져 줬는가? 그 정도면 10년 동안 우린 손가락만 빨 수도 있어.”

정 회장이 투덜거리는 것을 보며 나는 못 이기는 척 말했다.

“이런.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다니 제 마음이 갑자기 약해지는군요.”

그러자 정 회장은 눈을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음흉한 일을 꾸미려고?”

“그럴 리가요. 전 회장님과 정말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요.”

“응?”

“20%는 너무 심하다고 말씀을 하시니, 좋습니다. 30%로 하죠.”

정 회장이 나를 탐색하는 눈동자를 보였다.

그냥 20%에서도 그칠 수 있는 걸 팍 30%까지 올렸으니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 보게? 갑자기 10% 올려? 대가 없는 호의는 없겠지?”

“하하. 회장님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보이는 호의일 뿐입니다. 정 대가를 찾자면 하나밖에 없죠. 청와대와 꼬인 줄을 좀 풀어 주십시오.”

그제야 정 회장은 내 의도를 알아챘다.

“허어-. 이런 음흉한 사람 같으니.”

“회장님과 청와대가 저희 밥줄을 꽉 잡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 그만 풀어 주시죠.”

“이 사람아. 그 줄 잡은 지 한 달도 안 됐어! 그리고 사우디 프로젝트를 따는 순간 선포한 거 아니야? 대한민국에서는 철근 만질 생각 없다는 거.”

“뭐, 과시용이죠. 고향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어떻게 조국을 버리고 다른 나라 가서 땅을 파기만 하겠어요? 그러니 풀어 주시죠. 앞으로 얼굴 붉힐 일 없이 웃으며 공생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정 회장의 얼굴을 보니 조금 넋이 나간 듯 보였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자네 정말 20대 맞나?”

“예?”

“아주 능구렁이가 따로 없구먼. 제갈량이나 한신이 딱 자네 같았을 거야. 아주 음흉하고 치밀해. 아, 이건 칭찬이야.”

뭔가 칭찬이 칭찬처럼 들리진 않는다.

“나 참. 원래대로라면 아예 줄로 꽁꽁 묶어서 말려 죽이려 했는데, 되레 내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네.”

“30%면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실 겁니다.”

“손해는 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꿀통을 갖게 되는 것도 아니지.”

“그래도 이게 최선이지 않겠습니까? 한라 그룹 회장님이 제게 모든 걸 넘겼듯이 말입니다.”

아픈 곳까지 찌르자 정 회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말하는 것도 참 얄미워 죽겠단 말이지.”

그러나 그는 곧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해 봅세. 중동 시커먼 놈들 돈을 뜯어낼 수 있는 대로 뜯어내자고.”

“그럼, 다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그래. 그러니까 얼른 잡아. 벌써부터 머리 아프니까. 내일 청와대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구먼.”

말은 그렇게 해도 내 제안이 결코 나쁜 건 아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현광은 30%의 수익을 얻게 된다. 그것도 사우디에서 퍼 주는 오일 머니이지 않은가?

석유가 하루아침에 말라 비틀어지지 않는 한, 사우디가 자금을 내놓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나한테도 윈윈 하는 전략이다.

현광과 손을 잡음으로써 정부가 꽉 묶어 놓은 일거리를 풀어 주게 될 것이다. 거기다 천하 물산과 손을 잡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다.

천하 물산은 건설 쪽을 완전히 장악하려 들고 있다. 그들이 정말로 1위 자리를 차지하고 건설업을 뒤흔들기 시작하면 J&H가 흔들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현광과 손을 잡아 내 방패막이로 삼은 것이다.

현광은 이제 나를 공격하기보다, 무조건 나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우디에 꽂아 놓은 30%의 빨대가 쏙 빠질 수도 있을 테니까.

정 회장은 나와 맞잡은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이제 세월이 거의 다 지나간 나이지만, 아직 뚝심은 살아 있다는 걸 보여 주는 듯하다.

* * *

“사우디 정부의 반응이 매우 좋습니다. 초기 단계에는 천천히 진행을 하다가 점점 규모를 늘려가는 건 우리와 생각이 똑같더군요.”

“메카 근처가 워낙 노후화된 곳이 많아, 일단 눈에 보이는 작은 것부터 하나씩 바꿔 가는 걸 요구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사우디로 날아가 프로젝트를 순차적으로 진행하던 임원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중간 보고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보고 내용은 매우 긍정적이었으나, 임원들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곧 나왔다.

“문제는······ 규모입니다. 초기 단계는 J&H 건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가 조금 곤란합니다. 사우디 측에서 요구하는 내용을 보면 순식간에 규모가 커집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말이죠?”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J&H 건설로는 조금 힘들 것 같은······.”

“조금? 과연 조금일까요?”

“예?”

“저는 아예 감당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말씀은 이미 알고 계셨다는······.”

“예. 프로젝트를 받기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힘들다는 걸요.”

임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이제 이들에게 큰 충격을 줄 차례다.

“우린 앞으로 현광 건설과 협업을 합니다.”

“예?!”

“회, 회장님!”

나는 손을 들어 임원들의 입을 잠시 막아 두었다.

“여러분 말씀대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프로젝트입니다. 그럼 선택을 해야죠. 밥그릇을 누구와 나누느냐.”

“그게 꼭 현광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 다른 건설사들도 충분히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들의 반발을 이해하고 있었다.

현광은 한라 그룹을 집어삼키려 했던 놈들이고, 그 말은 이들이 아직 한라 그룹을 잊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나는 인상을 쓰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하나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현광과 협업을 반대하는 이유는 한라 그룹 때문입니까?”

“그거야···.”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현광 건설과 손을 잡는 것이 우리한테는 베스트입니다. 그리고 이미 정영준 회장님과 협상을 통해 한국 쪽에 막혀 있는 일거리를 전부 풀어 주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런데도 현광과의 협업을 반대한다? 이건 여러분이 J&H가 아니라 한라 그룹의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겁니다.”

“······.”

“아직도 그런 감정적이고 옛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사표 쓰고 나가세요. 하지만 J&H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고 결심을 했다면 이 기회를 어떻게 잘 살릴까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임원들은 침묵을 지켰다.

난 이들에게 마지막 선택을 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이제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한라 그룹의 사람으로 남을지.

아니면 새로운 출발을 하여 J&H의 사람이 될지.

선택의 몫은 이들에게 남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