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92화
비도덕적인 기업. 규모를 축소해 예전의 기술력을 잃어버린 기업.
J&H가 비수를 제대로 꽂았다.
그리고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현재 현광은 여러 의혹을 받아 벌써 임원 15명이 잡혀갔다. 그리고 조선소를 철수시키기 위해 규모를 축소한 것도 타격이 꽤 있었다.
“그런 헛소리를 믿는단 말이야? 절대 아니라고 말을 했어야지! 당신들은 대체 뭐 하는 거야! 그러라고 비싼 돈 들여 임원 자리에 앉혀 놓은 줄 알아!?”
하지만 정 회장 입장에서는 다 개소리였다.
그는 자신의 고객들을 그 어린놈에게 다 빼앗겼다는 것에 분노했다. 결코 자신이 무능했기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이게 다 전부 임원들이 똑바로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정 회장은 그렇게 믿었다.
“이런 쓸모없는 인사들. 고작 그딴 놈에게 밀리다니. 당신들 일주일 내로 이 사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 옷 벗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어?!”
정 회장의 일갈에 임원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이런 푸대접을 받을 바에는 차라리 자진해서 옷을 벗고 나가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 회장은 쉬지 않고 임원들을 질타했다.
“비리 문제부터 입찰 경쟁에, 밥그릇까지 빼앗겼어. 대체 어디까지 빼앗기려고 이러는 거야? 설마 자네들 J&H 사람들이야? 나 엿 돼 보라고 그 새끼랑 짝짜꿍이라도 하는 거냐고!”
당신이 저지른 비리로 임원들이 잡혀가고 입찰 경쟁까지 패배했다. 그리고 밥그릇을 빼앗긴 것도 결국 정 회장, 당신의 잘못이다.
그러나 누구도 저렇게 말을 하진 못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정 회장은 듣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이야. 그전까지 해결 못 보면 각오하는 게 좋아.”
그 말을 끝으로 임원들은 빠르게 회장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비서실장과 단둘이 회장실에 남게 된 정 회장은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후-.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 거지?”
비서실장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말했다.
“J&H의 공격이 너무 거셉니다. 이런 식의 시간차 공격은 임원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죠.”
“지랄 맞을. 이게 다 저놈들 실력이 부족해서야. 빨리 몸부터 움직여서 정보를 캐 오든가, 행동에 나섰어야지. 넋 놓고 여자들이나 끼고 노니 이 사태가 일어났잖아.”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회장님.”
“뭐야?”
정 회장의 날카로운 눈빛에 비서실장이 얼른 말을 이었다.
“J&H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움직였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방금 전에 알아보니, 선박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J&H 쪽에서 각 기업에 공문을 돌렸다고 합니다. 진지하게 J&H 조선소와 계약을 맺는 것이 어떠냐고요. 그런 다음 사건이 터지고 나서 또다시 서류를 돌려 현광 조선소는 악덕 기업이라고 광고를 했다는군요. 사건이 크게 이슈화되기도 전에 J&H가 그렇게 밑밥을 깔아 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뭐야? 이진석 그놈이 신내림이라도 받았다는 거야?”
“사업적인 직감이 뛰어난 놈인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기민하게 움직여서 다 쓰러져 가는 조선소를 살리지 않았습니까?”
“야. 그렇게 말할 거면 너 그냥 이진석 그놈 팬이나 해라.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그놈 칭찬 못 해서 안달이라도 난 거냐?”
정 회장은 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비서실장의 얼굴빛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또 뭐?”
“J&H 건설사 말입니다.”
“그게 왜? 그놈들은 우리나라에서 이제 일 못 해. 청와대에서 작정하고 거기 묻어 버리려고 칼 가는 중이니까.”
“예. 그런데 그게 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응?”
“회장님 말씀대로 J&H 건설은 한국에서 일 못 하죠. 그리고 J&H도 그걸 알고 있고요. 그래서 아예 해외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비서실장은 간신히 구해 온 서류를 정 회장 앞에 놓았다.
“이게 뭔가?”
“이번에 J&H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협력해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뭐? 사우디?”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장소부터가 불안하다.
오일 머니로 매일같이 파티를 벌이는 그 사치스러운 놈들의 땅이지 않은가.
건설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다.
정 회장은 빠르게 서류를 넘겨 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탈한 한숨과 함께 서류를 내려놓았다.
“하-. 이놈들 보게.”
그리고 담배 하나를 새로 물었다.
“이번 정권 끝날 때까지 한국에서는 철근 하나 만지지 않겠다는 뜻이로구먼.”
“그 정도입니까?”
“내가 이 바닥 구른 게 몇 년인데. 앞에 몇 장만 읽어 보면 견적 나와. 적어도 10년은 해 먹을 프로젝트야. 거기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사우디라고 했지? 그놈들은 돈이 마르지 않아. 그러니까 시계탑 하나 완성하겠다고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수십 년이나 바라보고 있잖나.”
“그렇다면 J&H가 대어를 잡은 셈이군요.”
“엄청난 대어지. 그런데 사우디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말은 없었던 거 같은데? 아니면 그런 발표가 있었는데도 우리 잘난 임원들께서 못 봤거나.”
“그건 아닙니다. 사우디에서도 아직 공식으로 발표한 일이 아닙니다.”
“공식으로 발표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J&H가 어떻게 알고 이 대어를 낚아챈 거지?”
“그것까지는······.”
정 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자네, 이 서류는 어떻게 구한 거야?”
“그건 J&H에 있는 정보통을 통해서 구한 겁니다.”
“그래? 사우디에서도 아직 공식으로 발표하지 않은 프로젝트 서류를 이렇게 쉽게 구했다고?”
“예?”
“이거야 원. 나도 그렇고 자네도 그놈한테 된통 당했네.”
비서실장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정 회장은 짧게 혀를 찼다.
“이 서류는 이진석 그놈이 우리한테 던져 준 거야.”
“예? 그럴 리가요.”
“쯧쯧. 그놈 몰라? 자기 회사에 우리 측 정보통이 있다는 것쯤은 진작 눈치챘을걸? 그래서 대놓고 이걸 우리한테 던진 거지. 난 뭐 같은 대한민국에서 철근 만질 생각 없다고.”
“······.”
“하여튼 웃긴 놈이야. 그 나이에 대단하기도 하고. 젠장. 내가 그런 놈을 다 인정해야 한다니.”
“회, 회장님.”
“됐어. 자네 그만 나가 봐. 아무래도 이걸 보낸 걸 보면 그 친구가 나랑 할 이야기가 있는 게 분명해.”
이번에도 비서실장은 정 회장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얼굴을 붉히던 정 회장이 지금은 조금 차분하기까지 했다.
비서실장이 나가고 나서 정 회장은 핸드폰을 들고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눌렀다.
* * *
“예, 회장님. 아닙니다. 예. 저야 좋죠. 그럼, 곧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권 대표가 물었다.
“누구기에 그러십니까? 혹시 정 회장님입니까?”
“예. 제가 일부러 흘린 서류를 확인한 모양입니다. 정 회장님도 바보는 아닌가 봐요. 제가 대놓고 흘린 걸 보고 바로 연락을 넣은 것을 보면 말이에요.”
“잠시만요, 회장님. 그 서류를 일부러 흘리셨다고요?”
“예. 우리 회사 어딘가에 있을 현광 건설의 정보통에게 슬쩍 흘렸죠.”
“아니,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 원래 신화 금융에서 일하고 있었잖아요. 저 같은 초짜한테 가끔 그런 제안이 들어오곤 해요. 건당 얼마를 줄 테니, 신화 금융 정보를 넘기라고 말입니다. 근데 제가 새가슴이라 그런 짓은 못 하겠더군요.”
경쟁 회사에 스파이를 심어 두는 건 거의 일상 같은 일이다.
우리 J&H라고 산업 스파이가 없겠는가?
알게 모르게 경쟁 회사에 일정 돈을 뿌려 정보를 긁어모은다.
의외로 신입들에게 그런 제안이 많이 들어가는데, 그 이유는 회사에서도 신입을 스파이라고 의심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제 의도가 잘 전달된 거 같으니, 정 회장 얼굴을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
“그걸 왜 뿌리신 겁니까? 불편한 만남일 텐데.”
“원래 사업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어제까지는 피 터지게 싸워도 같이 돈을 벌어야 하는 일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손 맞잡고 미소를 보여야죠. 지금이 딱 그럴 때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권 대표는 아직 내 말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았다.
“대표님. 이번 사우디 프로젝트, J&H 건설에서 다 못 삼킵니다.”
“예?”
“제가 다방면으로 알아본 거예요. 지금쯤 임원들도 난감해하고 있을걸요? 초기에 10억 달러가 들어가고 그 후부터 계속해서 자금이 투입되는 거대한 프로젝트잖아요. 그런 큰 규모의 건설을 J&H에서 혼자 감당한다? 잘못 삼키면 배가 다 터져 버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사우디 프로젝트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받으며 이 프로젝트의 미래를 확실하게 파악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 한라 건설만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프로젝트를 우리가 지휘해 갈 순 있겠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다른 건설사와 협업을 하지 않는 이상 좋은 결과를 내놓긴 힘들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미리 인지하고 있던 나는 일부러 프로젝트 서류를 현광에 흘려 놓은 것이다. 그리고 현광 건설을 대한민국 1등 건설 기업으로 키워 놓은 정 회장은 내가 보낸 서류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챘다.
“전혀 몰랐습니다. 그 정도 프로젝트면 J&H가 대대손손 해 먹을 줄 알았거든요.”
“저도 그랬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직 J&H 건설은 더 규모를 키워야 돼요. 아무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아, 예. 회장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 양반이 성질 못 이겨서 술잔 던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하. 제가 가만히 맞고만 있겠어요?”
나는 금융사를 나와 정 회장과 약속을 잡은 한식집으로 이동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한창 저녁 시간에 붐빌 텐데, 손님이 한 명도 없다.
오히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식당 직원들만 눈에 보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무식한 회장님이 식당 전체를 빌려 놓은 것 같았다.
“아이고. 이 회장 오셨는가? 허허.”
방에 들어서자 정 회장은 반갑게 나를 맞이하며 두 손을 붙잡았다.
“자자. 자리에 앉게. 여기 음식 맛이 아주 뛰어나. 마음에 들 거야.”
정 회장의 웃는 얼굴을 보니 나도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역시, 이 사람도 뼛속까지 장사꾼이구나.
마냥 운 좋게 재벌집에서 태어나 현광 건설의 주인이 된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돈이라면 과거의 악연도 깔끔하게 잊어버릴 사람이 분명했다.
“이거, 괜히 잘못 먹었다가 체하는 건 아닐지.”
“어허. 그럴 리가 있겠나? 이 회장이 내 눈치를 보는 사람도 아닐 테고. 오히려 내가 걱정이지. 괜히 잘못 보였다가 밥그릇이 깨질 수도 있잖아.”
“하하. 그런가요?”
나는 정 회장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잔을 부딪친 뒤 입을 축였다.
“일단 시장하니, 밥부터 먹을까? 중요한 얘기는 조금 이따 하자고. 나이가 들어서 한번 체하면 한 달 내내 고생을 해야 돼.”
“예. 그렇지 않아도 저도 많이 배고픈 상태였습니다. 어쩌면 나오는 음식을 제가 다 먹어 버릴 수도 있어요.”
얘기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프로젝트를 J&H 혼자 다 해 먹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정 회장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면박을 줬다.
“이 사람아. 여기가 얼마나 음식을 많이 주는데. 그거 다 먹으려 들면 배 터져 죽어!”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 하지 않습니까? 아직 젊으니까 뭐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내가 슬쩍 미소를 보이자 정 회장도 조금은 긴장한 듯한 얼굴로 억지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우리 두 사람의 기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