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90화
나는 준비해 온 서류를 임원들에게 던져 놓았다.
“지금 한번 검토해 보세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그들은 후다닥 각자 앞에 놓인 서류를 들고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처음에는 의아함, 두 번째는 놀라움. 세 번째는 묘한 눈동자를 띤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눈알을 굴리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서류에 담긴 프로젝트가 좋은 것 같긴 한데, 참 애매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서류를 내놓은 건 바로 나다.
저들의 인사권을 결정지을 수 있는 내가 준 서류이니, 무작정 반대를 하는 건 눈치가 보일 것이다.
“어떻습니까?”
“중동이군요. 그것도 사우디라면 확실히 우리나라 건설 회사들이 많이 투입되어 있는 지역이긴 하죠. 그런데 사우디가 새로운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
중동 건설 사업은 기회만 생기면 우리나라 건설업자들이 죄다 달려든다.
석유라는 축복받은 자원으로 돈을 펑펑 써도 마르지 않게 된 몇몇 중동 정부들은 개인의 사치를 위해 건설사를 불러들여 달러를 뿌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오죽하면 건설사에서 중동을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고 부르겠는가.
문제는 중동에 투입되어 있는 건설사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설 프로젝트가 생길 때마다 순식간에 대형 건설사들이 낚아채 간다.
“당연하죠. 공식으로 발표 난 게 아니거든요.”
“회장님은 이걸 어떻게······.”
“이번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IT 인프라 구축을 위한 프로젝트에 나섰어요. 다들 아시죠? 사우디가 예전에는 세계 최대의 원유 생산 국가였지만, 지금은 저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거기다 사우디 석유가 곧 마른다는 얘기까지 돌고 있죠. 그래서 사우디도 손에 대지 않았던 사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에요.”
한때 사우디는 중동 최대 원유 생산 국가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자리를 빼앗겼고, 지금은 완전히 하위권에 머물러 언제 석유가 고갈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더 가관인 건,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노동자들 중 80%가 외국인이라는 것이다.
현지인들, 그중에서도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아무짝 쓸모도 없는 이슬람 철학을 전공해 실질적으로 그곳에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사우디 정부는 프로젝트를 열 때마다 해외 기업의 투자를 유치해 기술력과 노동력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저는 이번에 10억 달러를 사우디 정부 사업에 투자했습니다. 그런 뒤 강력하게 주장했죠.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모든 건축 사업은 J&H 건설에 맡겨 달라고.”
“아···.”
임원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인프라 구축을 하려면 IT 업계가 필요하지만, 당연히 건설사도 같이 투입이 되어야 한다. 무작정 케이블만 깐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
더군다나 뭐든 화려하고 다른 나라보다 더 멋있게 지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각 중동 정부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인프라 구축을 핑계로 여러 빌딩을 마구 지어 낼 게 뻔했다.
실제로 그들이 내게 개인 메일로 보내온 사업 계획서만 봐도 여러 채의 빌딩을 올려 그곳을 새로운 컨트롤 센터로 갖출 예정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사우디가 정신 못 차리고 천연자원만 믿으며 크게 후회할 거라 말하지만, 사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우디가 원유로만 돈을 버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그들의 경제를 살리는 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요?”
“사우디는 곧 자원이 마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업을 벌이는 것도 있지만, 이들은 사실 천연자원보다 더 큰 자본 공급원이 있어요. 그게 뭔지 아십니까?”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메카로군요.”
“예. 이슬람을 믿는 종교인이라면 죽기 전 꼭 한번 가 봐야 한다는 메카. 그것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죠. 매년 수천만 명이 다녀가는 곳이고, 그곳에서 경제 활동이 가장 왕성합니다. 이번 인프라 구축도 결국 메카를 더욱 활성화시키겠다는 의도가 있고요. 다들 알베이트 타워라고 아시죠?”
알베이트 타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탑 건물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돈을 투자해 만든 것인데, 이들은 메카를 관광 지역으로 키워 더욱더 많은 자본을 끌어당기려 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사우디는 불편한 교통 시설을 개편하고 메카 주변을 고급스럽게 바꾸려고 노력 중입니다. 단순히 메카에 들르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라 그 주변을 관광하게 만들고자 변화를 꾀하는 것이죠. 그 중심에 우리 J&H 건설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시작이 미미하게 보이겠지만, 곧 수백억 달러로 진화될 프로젝트이기 때문이죠.”
임원들의 눈가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제 할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새롭게 출범한 J&H 건설을 살리고자 100% 확신이 서질 않는 사업에 10억 달러를 부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제 투자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셔야 합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판은 내가 깔아 놓았다.
그것을 조율하고, 가격을 경쟁하며 사우디 정부와 밀당을 해야 하는 건 여기 있는 임원들이다.
“사람들은 얼마 못 가 J&H 건설 그룹이 쓰러질 거라고 손가락질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여러분이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제가 기회를 만들어 드렸는데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전 여러분의 능력을 의심할 겁니다.”
언제든 목을 칠 수 있다는 위협적인 경고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의 표정을 보니, 아직 다들 열정이 넘쳐 보인다.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기근에 이런 소낙비가 내리면 누구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임원들과의 첫 만남을 그렇게 끝내고 한 사람을 따로 불러냈다.
“한영호 사장님. 이강철 회장님에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J&H 건설 그룹을 제대로 이끌기 위해서는 한영호 사장님의 도움이 절대적이라고 하시더군요.”
한영호 사장은 이강철 회장과 같이 굴지에서 건설 그룹을 일으킨 사람이다.
한라 중공업이 결국 입찰 경쟁에 넘어갔을 때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회장님.”
“많은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 특히 이번 중동 프로젝트는 베테랑의 실력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저는 판을 깔 순 있지만, 그 판에서 춤을 출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 계신 권오준 대표님도 힘들고요.”
한영호 사장이 힐긋 미소를 보였다.
“너무 겸손하시군요. 10억 달러가 결코 적은 돈이 아닌데, 그 큰돈을 끌어와 중동에 투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정도로 과감하게 판을 만드실 정도라면 사실 저희는 들러리 서는 수준입니다.”
나를 칭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방어적인 것 같기도 한 말투였다.
“저는 회장님께 아주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
“이제 한라 중공업이란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 향취가 아직은 남게 해 주셨으니까요. 만약 현광이 인수를 했다면 그 향취마저도 사라져 완전히 다른 회사가 되었을 겁니다.”
“이런.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저도 현광처럼 한라의 흔적을 이곳에 남기지 않을 거예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흔적을 남기는 건 위험한 일이죠. 하지만 아직은 남겨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회사에 대한 미련이 참 많을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피땀과 눈물을 흘려 가며 키워 낸 곳이지 않은가.
“이번 중동 프로젝트도 아주 감명 깊었습니다. 서류에 있는 프로젝트의 잠재력을 생각해 보니, 앞으로 10년 이상은 든든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게 잘만 풀리면 J&H 건설이 급성장을 이뤄 내게 될 겁니다. 제가 그래서 들러리라는 표현을 썼던 겁니다.”
다른 임원들과는 달리 한영호 사장은 이 프로젝트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던져 주는 프로젝트를 받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오일 머니를 펑펑 뿌리는 중동이 훨씬 낫죠. 거기다 정부는 우리에게 꿀 한 방울 줄 생각이 없을 테고요. 회장님께서 이렇게 치밀한 준비를 했을 줄이야······. 이강철 회장님이 괜히 회장님을 높이 평가하시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간 방어적인 말투인 줄 알았는데, 그냥 정말 순수하게 나를 칭찬하는 거였다.
그리고 내게 호의를 보인다는 건 앞으로 회사에 기여를 많이 하겠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J&H 건설 그룹은 단순히 건설사만 굴리는 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게 또 있죠.”
“조선 사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건설과 조선은 거의 하나로 묶여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한라 중공업이 갑자기 기울었던 것도 결국 조선에 여러 악재가 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장님도 선택을 하셔야 할 겁니다.”
“선택이라면 어떤······?”
“조선 사업을 버리는 거죠. 아예 분할을 시켜 다른 곳에 팔아넘기는 게 최적의 방법일 겁니다.”
한라 중공업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는 한영호 사장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조선 사업을 팔아넘겨요? 한영호 사장님이 조선 사업 발전을 위해 많이 노력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런데 지금은 미래가 보이지 않아요. 과연 한국 조선 사업이 어디까지 추락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저도 뼈를 깎는 기분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두 번 다시 제가 다니는 회사가 고꾸라지는 걸 볼 수가 없습니다.”
한 사장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자신이 열정을 쏟아부은 회사가 다른 놈의 손에 넘어가는 걸 멍하니 바라볼 때의 그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선 사업을 접을 생각이 없다.
“전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예?”
“지금 우리 조선 사업이 고꾸라지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중국입니다. 3년 전부터 중국이 바짝 쫓아와 말도 안 되는 가격 인하로 우리의 모든 사업을 빼앗아 갔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죠.”
“예. 이런 추세면 중국 조선 사업이 모든 걸 장악하게 될 겁니다. 그나마 뒤를 쫓고 있던 일본도 슬슬 사업을 접어야 하는 건가 하는 고심을 하고 있으니까요.”
굳건하게 1위를 지키고 있던 우리나라 조선 사업이 추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중국 때문이다.
중국 특유의 가격 경쟁으로 한국 고객들이 죄다 중국으로 흡수되었기 때문. 그로 인해 러시아부터 유럽과 각 아시아 국가들마저 중국 쪽에 넘어가 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거에 대해서 우리나라 조선을 비판할 순 없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 품질마저 낮추는 방법을 취할 순 없다는 장인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품질을 낮춰서 가격을 맞춘다고 해도 중국의 물량 공세를 이겨 낼 순 없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저는 우리나라 조선소의 장인 정신을 믿습니다.”
“네?”
“그리고 중국 또한 믿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간단한 논리입니다. ‘중국이 중국 했다’.”
“······?”
한영호 사장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보였다.
“중국은 가격을 대폭 낮춰 우리 고객들을 죄다 빼앗아 갔어요. 그런데 그 가격을 낮출 수 있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야 품질이죠. 중국이 만들어 낸 선박들은 전부 쓰레기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 했어요.”
난 손뼉을 치며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품질. 지금 당장은 잘 움직이는 것 같아도 결국 한계가 올 수밖에 없어요. 아기 돼지 삼 형제 이야기 아시죠? 첫째와 둘째가 집을 엉터리로 만드는 바람에 전부 다 쓸려나가지 않았습니까? 결국 그들은 다시 셋째에게 몰려와 숨을 수밖에 없었죠.”
“그 말씀은 우리가 셋째 돼지가 된다는 겁니까?”
“우리를 떠났던 고객들은 가격이 비싸도 결국 우리나라의 기술력이 최고라는 걸 인정하게 될 겁니다. 그때 형제의 마음으로, 가족의 마음으로 다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영호 사장은 표정이 묘했지만, 내 말이 완전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중국 선박이 허접하긴 해도 막 침몰할 정도의 수준은 아닙니다.”
“그렇겠죠. 그런데 10의 충격을 막아 낼 수 있는 우리나라의 선박과는 달리 그들이 그 절반인 5의 충격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전 그 차이라고 봅니다.”
“하하. 이거 회장님의 베짱을 제가 따라가지 못하겠군요.”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우리 J&H 조선 사업에도 곧 꽃이 피게 될 겁니다.”
“만약 그런다면 이 한 몸 바쳐 열심히 키워 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표정을 보면 확신이 없다.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한영호 사장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