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89화
“고얀 양반 같으니. 잡을 게 없어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건방진 놈의 손을 잡아?”
“상대가 워낙 거칠어서 말일세. 별수 있겠나? 밥줄 안 끊기려면 나도 간이고 쓸개고 다 내놨어야 했어.”
정영준 회장은 아예 해탈이라도 한 듯 보이는 이강철 회장을 보고 답답한 듯 막걸리를 쭉 들이켰다. 그런 그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잔을 채워 주는 이 회장이었다.
“그래. 모든 방법은 다 동원하셨는가?”
“지랄 맞을. 나한테 매달 꼬박꼬박 돈 받아 간 새끼들이 전부 내 전화 피하고 있어. 그나마 지검장 하나가 총대 메고 나한테 그러더구먼. 사람 구하라고.”
“자네 대신해서 감옥 들어갈 사람?”
“내가 감옥 갈 일이 무에 있나? 지금까지 밝혀진 비리들 중에 내가 관련된 건 하나도 없어. 다 지들끼리 해 먹은 거지. 공식적으로는 말이야.”
재벌가 사람들은 비자금을 만들든, 뒤에서 돈을 해 먹든 절대 탈이 나지 않게 한다.
교묘하게 서류를 조작해 다른 누군가가 쇠고랑을 차게 하지, 결코 자신이 쇠창살에 갇히는 일은 없게 만든다.
이 회장은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이 자네 대신해서 들어가는 건 맞잖나. 두둑이 챙겨 줘야겠구먼.”
“왜? 그쪽이 챙겨 주려고? 당신이 미친 짓만 안 했으면 그 사람들이 징역 살 일도 없었을 건데?”
“그러게 누가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라고 했나? 배수진을 치게 만든 건 자네야.”
“에이. 씨부럴.”
정영준 회장은 욕지거리를 뱉으며 벌써 혼자 막걸리 2병을 비워 냈다. 그러고는 취기가 올라왔는지 갑자기 차분해졌다.
술에 취하면 손에 잡히는 건 다 집어 던질 것처럼 생긴 인사가 막상 술에 취하니 차분해지는 것을 보고 이 회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진석 그 친구를 도와준 건 실수한 거야.”
“음. 그런가?”
“정부와 내가 합작해서 만든 작품이었어. 그런데 그 친구가 시원하게 똥을 싸질렀지. 청와대가 그걸 좋게 보겠어? 건설 프로젝트가 있어도 무조건 J&H는 배제하고 시작할걸?”
“음······.”
“거기서 뭔가 콩고물이 떨어질 거라 기대는 하지 마. 난 뒤끝이 장난 아니거든. 내가 J&H 건설을 폭삭 망하게 만들 거야.”
“사람 참 심술하고는.”
“두고 봐. 감히 내 밥상을 뒤엎은 대가가 뭔지 똑똑히 알려 줄 테니까.”
무시할 수 없는 경고였다.
정 회장의 입김도 입김이지만, 이번 입찰 경쟁은 청와대와 현광 그룹이 애초에 합을 맞추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진석이 그걸 방해했으니, 가뜩이나 J&H에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청와대가 작정하고 괴롭힐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앞일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닌가.
J&H 건설은 얼마 못 가 삐걱거릴 테고, 그대로 무너져 현광이 다시 그걸 주워 담을 것이다.
“잠깐 그 애송이한테 맡겨 둔 거라 생각하지.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스스로 손을 놓게 될 거야. 거기다가 조선 사업은 또 어떻고? 조선은 솔직히 지금 나도 힘들어. 답이 안 보인다고. 그런 걸 젊은 친구가 멋모르고 만졌으니, 금융업도 함께 휩쓸려 나갈 공산이 커.”
“J&H 금융도 함께 망한다?”
“건설과 조선이 힘들어지면 그 구멍 막으려고 금융에서 돈을 가져다 쓰겠지? 그게 매달 이어져 봐. 아무리 수익률 좋은 사업이라고 해서 그 구멍을 다 막을 수 있겠어?”
“나한테 협박해도 소용없네. 그거 더 이상 내 회사 아니야.”
“흐흐. 그놈한텐 이런 말 할 필요도 없어. 회사를 인수하는 순간 딱 알게 될 테니까.”
“그 말은 이번 입찰 경쟁을 정말 포기한다는 건가? 현광이 뒷심을 발휘하면 입찰 경쟁은 어떻게든 끌고 나갈 수 있을 텐데?”
마지막으로 사발을 들이켠 정영준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 내가 말했지? 잠깐 맡겨 두는 거라고. 내가 독기 품고 달려들면 이번 입찰 경쟁은 어찌어찌 내가 먹게 될 거야. 그런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대로 회사 넘기면 얼마 못 가서 그놈이 내게 저절로 찾아오게 될 거야. 그때 싹싹 빌겠지.”
술을 마시기 전에는 화가 잔뜩 나 보이더니, 지금은 아주 여유만만해져 있다.
그런 모습이 조금은 눈꼴 시린 이강철 회장이 말했다.
“어쩌면 자네가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어.”
“음?”
“잘 생각해 보게. 그 젊은 나이에 무려 금융 그룹을 이뤄 내고 자네가 차려 놓은 밥상까지 뺏어간 친구야. 그런 친구가 과연 미래의 일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청와대가 건설 프로젝트를 줄 리 없다는 것도 그렇고, 현재 조선 사업의 미래가 밝지 못하다는 것도 아주 잘 알겠지. 그런데도 끝까지 한라 중공업을 손에 쥐고야 말았어. 그게 무슨 뜻이겠나?”
“그놈이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고?”
“굳이 그렇게까지 비유를 하진 않겠네. 그러나 자네 생각대로 그 친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지. 그렇게 뻔한 사람이었으면 J&H는 진작 망했을 테니까.”
“허-! 아주 콩깍지가 제대로 끼셨네.”
“자네도 직접 만나 봤을 텐데? 적이 아니라 아군이라면 그만큼 든든한 사람이 없을걸?”
이 회장의 말에 정영준 회장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디 한번 두고 보시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 친구가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 같거든. 자네에게 쪼르르 달려가 무릎 꿇을 일은 아마 절대 없을 거야.”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기분이 언짢았는지 정 회장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이 회장의 말이 계속해서 뇌리에 남았다.
정말 그놈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 * *
-현광 그룹이 오늘 최종 입찰 경쟁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전해왔습니다. 이로써 한라 중공업은 J&H에게 인수되는 것이 확정되었으며······.
-엄청난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현광 건설의 인수가 거의 확실시되고 있던 때에 J&H가 마지막 뒤집기에 성공했습니다.
연이어 폭격을 맞은 현광 건설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총선을 앞둔 여당은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현광 건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요구했고, 잘만 하면 현광 건설 회장이 포토존에 서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뭐, 저러다 며칠 지나면 금방 잊히겠지만 말이다.
“축하합니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임원들은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누구 하나 웃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내가 이번 입찰을 실패하길 바랐을 테니까.
“이 좋은 날 왜들 그리 표정이 안 좋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저들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미래가 결코 밝지 않은 건설과 조선 사업을 인수했다. 거기다 정부의 협력이 절대적이라는 건설 사업은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현광과 청와대가 준비한 무대를 내가 다 망쳐 버렸으니, 그들은 보복을 위해 우리 건설사를 계속해서 공격할 게 뻔했다.
이들을 대신해 권오준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회장님. 인수가 확정된 것은 좋으나, 문제는 당장 건설과 조선을 어떻게 운영할지가 관건입니다. 물론, 한라 그룹 회장님이 인력 지원을 해 준다고는 했지만, 당장 일할 게 없는데 돈만 축내는 꼴 아닙니까?”
“잠깐만요. 거기까지.”
“예?”
“여러분은 어디에서 일하고 계시죠?”
“그거야······.”
“바로 이곳입니다. 여기 J&H 금융사. 이번에 인수한 한라 중공업은 새로 만들어질 J&H 건설 그룹에 포함될 겁니다. 즉, 여러분의 권한 밖의 일이라는 거죠. 여러분은 금융 쪽 일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건설이, 혹은 조선 사업이 무슨 프로젝트를 물고 와서 먹고살지는 그쪽 사람들이 걱정하면 됩니다.”
그 말에 임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건설 쪽 일에 매달려야 하는 건 아닌지 많이 불안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건설은 건설 쪽 사람들이 하는 거고, 금융은 금융 쪽 사람들의 일이다.
둘 다 하나로 합쳐서 굴릴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건설과 조선은 걱정들 하지 마세요. 거기가 망한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 금융사만 잘 지키시면 돼요. 그리고 전 한번 잡으면 무조건 대박을 쳐야 적성이 풀립니다. J&H 건설 그룹은 반드시 잘될 겁니다. 금융사에 손 벌릴 일은 없을 테니 그것도 안심하시고요.”
임원들은 이제 아예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권오준 대표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건설과 조선 사업이 대박을 치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지게 되면 J&H 금융도 함께 쓸려나간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 *
“회장님. 저도 금융계 사람 아니었습니까?”
“하하. 대표님은 예외에요. 올라운더. 아시죠? 모든 필드에서 뛸 수 있는 선수. 그게 바로 권 대표님이시죠.”
“이런.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겁이 나거나 그렇진 않군요. 오히려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두근거립니다.”
권 대표는 싸움꾼 기질이 다분하고 참 겁이 없는 사람이다.
겁이 없다는 게 생각 없이 달려든다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눈에 힘 팍 주세요. 앞으로 권 대표님이 자주 찾아가서 압박 줘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 제가 아주 호랑이같이 노려보고 오겠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오게 된 곳은 다름 아닌 옛 한라 중공업 빌딩이었다.
지금은 우리 손에 들어와 J&H 간판으로 바꾸는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모두 반갑습니다.”
나와 권오준이 회의실에 들어오자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던 과거 한라 중공업 임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내가 자리에 앉자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혹여나 의자 끄는 소리가 날까 봐 조심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앞으로 J&H 건설 그룹을 이끌게 될 이진석 회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제 옆에 계신 분은 권오준 부회장님이시고요. 저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이분한테 눈도장을 잘 찍으셔야 할 겁니다. 실질적으로 여러분의 성과를 압박할 분이시거든요. 하하.”
가벼운 농담에도 임원들은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말을 돌리지 않고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이강철 회장님에게 다들 들으셨을 겁니다. 6개월 무임금. 이 얼마나 가혹하면서도 달콤한 제안입니까? 하지만 아무 돈도 못 받는 여러분은 죽을 맛이겠죠.”
말이 무임금이지, 이강철 회장이 알아서 이들의 뒤를 봐줄 것이다.
“하지만 전 여러분을 무임금으로 쓸 생각이 없습니다.”
“······?”
임원들의 표정이 슬슬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강철 회장님이 무임금으로 여러분을 부려 먹으라고 하셨지만, 전 정말 실력이 있는 분이라면 전에 받던 연봉의 2배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저들의 눈이 전부 다 커져 갔다.
내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권오준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겠죠? 바로 성과입니다. 프로젝트를 물고 와서 건설사와 조선 사업을 살리는 겁니다.”
잠깐이나마 커졌던 이들의 눈동자가 다시 스르르 작아졌다.
이윽고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회장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현재 건설사와 조선 사업 모두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정부에서는 아마 저희 측에 프로젝트 허가를 내주지 않을 것 같고요. 더군다나 조선 사업은······.”
“거기까지만 듣도록 하죠. 임원들의 울음소리는 대주주에게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굳은 목소리로 핑계라는 말을 내놓자 임원들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저도 회장인 만큼 우리 J&H 건설을 위해 투자해 주신 분들을 배신할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번에 입찰 경쟁할 때 1조 원은 사모 펀드로 이루어졌어요. 또한 추가적인 자금 확보를 위해서는 다시 한번 펀드를 열 수도 있고요.”
“그 말씀은 회장님께서는 방법이 있다는······.”
“제가 설마 아무런 대책도 없이 한라 중공업을 그냥 꿀꺽 삼켰다고 보십니까? 건설과 조선 분야에 제가 아무리 문외한이라고 해도 멍청한 놈은 아닙니다.”
다 죽어 가던 임원들의 눈동자에 생기가 깃들었다.
하지만 내가 먹잇감을 던져 준다고 해서 이들이 과연 잘 씹어 삼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 당분간은 현재 받고 있는 월급에 몇 배 더 빡세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