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88화
“2조 2천억? 확실한 숫자야?”
“예. J&H에서 제출한 금액이라고 합니다.”
“그놈들 자금력이 빵빵하다 하지 않았어?”
“워낙 이진석이란 브랜드가 막강해서 사모 펀드 열었으면 그 정도는 금방 채웠을 겁니다.”
“음······.”
정영준 회장은 임원들이 가져온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 서류는 이번 입찰 경쟁에서 J&H가 제출한 일종의 포트폴리오였다.
인수 금액과 어떤 방식으로 건설, 조선 사업을 이끌어 갈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가격이 좀 묘하지 않아?”
비가격 요소이기는 하나, 어쩔 수 없이 가격도 입찰 경쟁에 포함되는 중요한 요소이긴 하다. 그런데 돈 많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던 J&H가 고작 2조 2천억을 써 냈다.
2조 2천 500억도 솔직히 깎고 깎아서 결정한 가격이지 않던가.
“세게 나온 것 치고는 가격이 많이 낮죠.”
“아마 포기한 게 아닐까요? 이리저리 찔러 봐도 답이 없으니 그냥 포기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게 아닐지······.”
“그런가? 그런 것치고는 우리가 쓴 가격이랑 좀 비슷하지 않나?”
“무려 500억 차이입니다, 회장님. J&H가 분석을 제대로 했다면 최소 2조 7천억은 썼어야 합니다.”
정 회장은 도통 이진석의 속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저번에 만났을 땐 아주 전투 의지를 좔좔 흘리던 놈이 막상 칼을 뽑아 들자 꼬리를 내렸다. 정말 포기를 한 건가?
“이미 채권단과 은행도 결정을 끝냈고 공식 발표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 다들 고생했어. 그리고 J&H 그놈들 주식 다 팔고 손 털었나?”
“아니요. 아직 지분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수하고 나면 다 휴짓조각 될 거라는 걸 잘 알 텐데?”
“기존에 있던 주식들을 전부 소각하고 새로 공모를 한다는 걸 아직 모르는 듯합니다.”
아직 외부에 공개된 정보가 아니라고 해도 증권사 놈들은 미리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기존에 있던 한라 중공업의 지분이 전부 휴지가 된다는 걸 말이다.
J&H도 분명 이걸 알고 있을 텐데 끝까지 지분을 놓지 않는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J&H가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좀 알아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놈들이 무슨 짓을 해도 상황이 엎어질 일은 없습니다. 이틀 후면 한라 중공업은 현광 중공업이 됩니다.”
임원들이 아무리 다독여 봐도 정 회장은 이 찝찝함을 날려 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회의를 마무리하려 할 때였다.
“회장님.”
그의 비서가 조심스레 다가와 휴대폰을 건넸다.
정 회장과 직통으로 연락할 수 있는 휴대폰이다.
“누군데?”
“중앙지검장입니다.”
서울중앙지검장이?
돈 떨어졌다고 전화했을 리는 없고.
분명 무슨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지검장이 직접 전화를 건 것이리라.
“김 지검장. 오랜만일세.”
-회장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허허. 그래. 근데 무슨 일인가? 전화까지 다 주고?”
-회장님. 검찰청에 접수된 건이 있습니다. 혹시 아시나 싶어서······.
“음? 무슨 소리지? 혹시 현광에 관련된 건가?”
-예. 회장님.
검찰에 그런 것들이 투서되는 게 한두 개이던가?
그 정도는 알아서 검찰이 커트를 한다. 그런데 지검장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냥 커트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전화를 걸었다는 건 꽤 심각한 내용이라는 거겠지?”
-예. 제출된 보고서 두께가 제 팔뚝보다 두껍습니다. 대충 살펴보니 환치기는 귀여운 수준이더군요. 혹시 SEVO라는 기업을 아십니까?
순간 정 회장의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SEVO라면 정 회장이 이용해 먹은 유령 회사들 중 하나다.
“기, 김 지검장. 검찰청에서 커버 치는 게 불가능할 정도인가?”
-저야 회장님과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덮고 싶습니다. 문제는 언론입니다. 검찰청에 이 정도 보고서가 제출되었다는 건 언론에도 전부 퍼졌다고 봐야 합니다. 알아보니 일제히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더군요. 그게 터지면 검찰도 조사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서울중앙지검장이 손 놓을 정도라면 제출된 서류들이 보통 아니라는 것이다.
“아닐세. 그래도 최대한 버텨 주게. 내가 지금 큰일 앞두고 있다는 건 알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만, 보증은 못 해 드릴 것 같습니다.
“그래. 알겠네. 일단 끊지.”
전화를 끊고 나서 정 회장은 갑자기 손이 떨려 왔다.
임원들은 보통 전화가 아니라는 걸 알고 조심스레 물었다.
“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물. 아니. 수, 술. 술 한 잔 가져와. 얼른!”
그의 호통에 직원 하나가 자주 마시던 양주 한 병을 가져와 잔에 따라 주었다.
정 회장은 벌컥 술을 들이켠 다음,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임원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누가 내 등 뒤에 비수를 꽂은 거 같다.”
“예?”
“검찰청에 우리 비리를 제보하는 막대한 양의 서류가 제출되었다고 한다. 언론도 곧 터트릴 준비 하고 있고. 당장 자네들은 나가서 어떻게 된 건지 알아 와. 언론사 전부 다 막고, 검찰청에 직접 가서 그 서류가 뭔지도 가져와. 서둘러!”
직접 술을 한 잔 더 따라 들이켠 정 회장은 이번 일의 배후가 누군지 알 것도 같았다.
언론을 이용해 그렇게 공격을 해도 잠잠하던 그놈.
이제까지 침묵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 * *
“가져왔어?”
임원들을 닦달한 지 30분도 안 돼서 서류가 도착했다.
서류를 전달받아 앞부분만 확인한 임원들의 표정이 좋지가 않다.
“예, 회장님. 그런데 생각보다 서류가 좀······.”
“이리 줘 봐.”
정 회장은 빠르게 서류를 읽어 나갔다. 그리고 점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려 10년 전에 해 먹었던 것까지 서류가 준비되어 있을 줄이야.
“도대체 이게 어떻게 서류로 남아 있는 거야? 누가 빵 부스러기라도 흘렸나?”
“······.”
임원들의 대답이 없자 정 회장은 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왜 말이 없어! 누가 의도적으로 뿌린 거 아니냐고!”
“회장님. 10년 전 일은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그때의 임원들과 다르지 않습니까?”
임원들의 수명은 길어야 2년이다.
정 회장의 변덕으로 이미 상당수가 여러 번 교체된 상태.
어쩌면 그놈들 중 앙심을 품고 정보를 넘긴 것일 수도 있다.
“그 새끼들 다 잡아 와. 어떤 놈이 흘렸는지 다 알아내라고!”
“회장님. 그놈들 하나하나 붙잡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곧 있으면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댈 것이 뻔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서류의 주인공들을 눈앞에 붙잡아 오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곧 언론이 세상에 현광의 비리를 공개하게 된다.
“언론 스피커 내가 막으라고 했잖아!”
“그쪽에서도 불가하다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 터트리면 그에 따라 다 같이 터트릴 수밖에 없다고······.”
“이런 은혜도 모르는 새끼들. 내 광고 받아 갈 땐 다 떼어 줄 것처럼 굴더니. 당신들은 대체 뭐 하는 작자들이야? 적이 공격을 하는데 가만히 두들겨 맞아 주기만 할 건가?!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당장 나가서 언론 스피커부터 막아! 안 그러면 여기 있는 자네들부터 모가지 날아갈 줄 알아!”
정 회장은 애꿎은 임원들에게 화를 내며 그들을 쫓아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칼을 휘두른 놈에게 더 휘두를 힘이 남아 있는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 * *
“참 칼 같은 분이시네.”
검찰청에 서류를 낸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정 회장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기다리긴 했지만, 정말 전화가 왔다고 해서 바로 받는 건 오히려 내가 기다린 꼴이 된다. 그래서 전화 두 번을 씹었다.
아마 정 회장은 삼고초려 하는 심정으로 세 번째 전화를 줄 것이다.
내 예상대로 세 번째 전화가 왔다.
나는 짐짓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회장님. 현찰 세는 놈한테 전화를 다 주시고. 무슨 일이십니까?”
“······.”
정 회장에게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이내 말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제가 회장님처럼 연륜이 있는 게 아니라서요.”
“시치미는 그만 떼지. 시간 아까우니까.”
“하하. 전 조금 더 떼고 싶은데요? 시간을 좀 끌고 싶거든요. 같이 전화하면서 회장님 얼굴이 뉴스 타는 걸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여러 포털 사이트에서도 회장님 이름과 회사가 검색어 1위를 달성할 겁니다. 어마어마한 광고 효과겠죠?”
이번에도 정 회장은 잠깐 말이 없었다.
역정을 내며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차분한 듯하다. 아니. 어쩌면 큰 충격에 빠져 화를 낼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아직 더 휘두를 게 남았나?”
“화살은 제 손에서 떠났습니다. 이제 누가 그 화살을 뽑아서 휘두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이 화살이 국민의 손에 들어간다면 아마 매서울 겁니다.”
그러자 정 회장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 보통이 아닌 친구구먼. 이런 걸 들고 있었다니. 그리고 꾹 참다가 이걸 마지막에 터트릴 줄이야.”
“마지막에 휘두를수록 가장 큰 효과를 보는 무기니까요.”
“좋아. 그럼 이거 하나만 묻지. 누가 이런 걸 넘겨줬나? 아무리 봐도 자네가 모은 것처럼 보이진 않던데.”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아실 것 같은데요?”
“잠깐. 설마···.”
“아. 때마침 9시 뉴스가 나오네요. 회장님 얘기를 하려나 봅니다. 속보부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확인해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 없네.”
내가 준 힌트를 듣고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챈 정 회장은 바로 내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연이어 나오고 있는 헤드라인을 바라보았다.
[현광 건설 게이트. 비자금만 5,000억?]
[노조 와해 및 노동력 착취. 원자재 가격을 속여 부당한 이익 챙겨.]
[부실 공사 의혹. 페이퍼 컴퍼니 SEVO의 정체는?]
이만한 대박을 놓치긴 힘들었는지 각 뉴스 채널에서 온통 현광 건설에 관한 얘기를 떠들어 댔다. 비자금은 물론, 페이커 컴퍼니를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노조를 강제로 와해시키는 등 참 다양한 비리들이 드러났다.
그리고 저건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한라 그룹 회장 이강철이 참 똑똑한 게, 저 비리들 사이에 슬쩍 현광 건설이 무슨 의도로 한라 중공업을 인수하려는 건지 끼워 넣었다.
한라 중공업을 인수하고 나서 모든 노동자들을 해고시킨 뒤 주식을 휴지로 만들어 흡수할 계획이라는 것도 포함시켰다.
당연히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일주일 뒤에 총선이지 않던가?
여당에서 이걸 제대로 컨트롤 못 하면 표가 엉뚱한 곳에 몰릴지 모른다.
“채권단과 은행에 확실히 전하세요.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현광 건설이 약 쳐 두었던 것까지 싸그리 폭로할 거라고 말입니다.”
물론, 내게는 현광 건설이 은행과 채권단에게 약을 쳐 둔 증거가 있진 않다. 하지만 저들은 내 말을 믿을 것이다.
정말로 내게 그러한 증거들이 모여 있을 거라는 불안감이 저들의 결정을 번복하게 만들 거라는 것.
“아직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됩니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이에요. 하지만 아예 절벽으로 밀어 버리면 그럴 수도 없겠죠? 다들 힘써서 끝까지 저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 버립시다.”
나는 임원들에게도 단단히 못을 박았다.
지금보다 더욱 압박을 가해서 중공업이 내 손에 떨어지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