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87화 (87/200)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87화

“좋아. 그렇게 아픈 곳을 찌르고 나온다 이거지?”

“먼저 말을 꺼내신 건 회장님이십니다.”

“하하. 젊은 사람이 패기롭구만.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말을 하다니.”

그따위 말이라.

재벌집 아들로 태어나 아무런 고생도 없이 대기업을 이어받은 회장답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자기 아래로 보는 것만 같았다.

“계산기 두드리면서 돈 세는 놈이니까 대화도 돈으로 하겠지? 얼마를 원하나?”

“예?”

“주식을 대량 사들였잖아. 그걸로 시세 차익 보려는 거 아니었어? 시장에 내다 팔기보다는 차라리 나한테 파는 게 더 이득이라고 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가격을 부르라고.”

이 양반은 내가 아직도 돈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나?

“돈을 원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회장님한테 받을 생각은 없는데요?”

시세 차익을 보겠다는 생각은 이미 버렸다.

이번에 한라 중공업을 인수해 정말 잘 키워서 크게 이득을 볼 생각이다.

“그 말은 정말로 나와 한판 붙어 보겠다?”

“젊을 때 한창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늙어서는 예전만큼 못할 테니까요.”

은근히 비꼬는 말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늙은이 무시하지 마. 젊음으로 이길 수 없는 게 연륜이야.”

“하지만 결국 세대 교체는 이루어지기 마련이죠. 아무리 연륜이 쌓여도 말입니다.”

이어지는 기 싸움이 질렸는지 정영준 회장은 거칠게 나왔다.

“이미 다 깔아 놓은 굿판이야. 지금 자네가 와서 엎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은행, 채권단, 거기다 청와대까지 내 돼지 콧구멍에 돈 박아 준 지 오래라고.”

“남의 잔칫상 엎는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죠? 끝까지 해 봐야 안다고.”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는 건 아니지.”

“그 똥도 된장처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저한테 있다면요?”

정영준 회장은 나를 기이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로 내가 자신감 있게 나오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래. 역시, 까지 않은 패 하나쯤은 있다는 거겠지? 한 팔광쯤 되나?”

“장땡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광잡이를 들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땐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죠. 하지만 회장님께서 광잡이를 들고 있을 것 같진 않은데요?”

이 영감, 매우 궁금할 것이다.

내가 무슨 패를 들고 있는지.

“허-. 내 손자뻘 되는 놈이랑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원.”

할 말을 다 했는지 정영준 회장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 경고를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현광 건설을 우습게 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 각오하는 게 좋아.”

“우습게 본 적 없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고요. 회장님도 저희 J&H를 우습게 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자네 자신감 하나는 기똥차다는 걸 내 인정하지. 하지만 사업은 젊은 패기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다 말아 먹고 땅이나 치지 마.”

정영준 회장은 무섭게 일침을 가한 뒤 회장실 밖을 나섰다.

역시 연륜이라는 건 무시 못 하는 것 같다.

저 나이에 저런 카리스마를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얘기는 잘 하셨습니까?”

“예. 심장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하하. 그런 것치고는 아주 멀쩡하신 얼굴인데요?”

회장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권오준 대표는 내 표정을 보고 안심하는 듯했다.

“갑자기 왜 찾아온 거랍니까? 그냥 깽판 치러 온 것 같진 않던데···.”

“뭐, 반반이죠. 깽판도 치고 제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내고.”

“회장님도 얻을 건 얻으셨습니까?”

“예. 이제 저쪽 회장님이 저를 진짜 적으로 인식했다는 정도? 앞으로 세게 나올 겁니다.”

“이런. 제가 언론사에 한 번 더 비타민 박스를 돌려야겠군요. ”

“그래도 한동안 우리를 물어뜯으려고 안달이 날 겁니다. 그냥 놔두세요.”

권오준 대표는 내 뜻이 궁금한 모양이다.

“언론사가 우리를 때리도록 가만히 놔두라는 말씀이십니까?”

“예. 언론사도 곤란하지 않겠어요? 현광에서도 광고로 협박하고, 우리 쪽에서도 광고로 협박하면 양팔, 양다리 다 찢어집니다. 그냥 현광이 하라는 대로 기사 쓰라고 하세요. 대신, 우리가 언질을 줬을 때 터트려 주는 걸 잊지 말라고 하시고요.”

“우리가 가진 조커 카드를 최후의 최후까지 놔두시려는 거군요.”

“예.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때, 바로 그때 패를 던질 겁니다.”

패를 던지는 순간이 어느 구간이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틀 후죠? 인수 가격 보내는 게.”

“아, 예. 맞습니다.”

“추정 가격이 얼마 정도 됩니까?”

“솔직히 한라 중공업에 딸려 오는 계열사가 한두 개가 아니라서 말이죠. 3조 원 이상을 불러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하지만 입찰 경쟁에 들어간 거라 2조 5천억 정도는 부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라 중공업에 여러 계열사가 섞여 있다.

건설과 조선은 물론이요, 그 외 생산 라인들도 모두 섞여 있는 터라 만일 하나하나 가격을 매긴다면 3조 원은 족히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이번 입찰 경쟁은 제값을 치르려고 하는 게 아니다.

“저도 가격을 어느 정도 써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우리 쪽에서도 정보 수집해 주세요.”

“예, 회장님.”

임원들이 라인을 돌려 정보를 긁어모으는 동안, 나는 미래 커뮤니티 센터로 현광이 얼마에 한라 중공업을 삼키는지 알아보면 된다.

그리고 그 가격과 똑같이 써 내릴지, 아니면 조금 더 낮출지는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 *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두 눈을 시퍼렇게 뜨더구먼.”

“하하. 저도 잘 압니다. 그거 아주 물건이에요.”

“내가 지금 자네랑 그놈 칭찬하려고 여기까지 발걸음 한 줄 알아!?”

“예예. 잘 알겠습니다. 한 잔 받으십시오.”

J&H로 가서 한바탕 엎어 버리고 오려 했는데 왠지 한 방 맞고 온 것 같아 기분이 더 찝찝해진 정영준 회장이었다.

그는 KV 그룹 회장 오대현과 술잔을 맞췄다.

현광과 KV는 잘 알려진 사돈 관계 아니던가?

둘 다 주량이 어마어마하기도 했고, 성격도 잘 맞아서 종종 답답한 일이 있을 때면 서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이진석에게 한 방씩 맞은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자네는 LK 금융을 그 싸가지 없는 놈한테 빼앗겼으면서 잘도 웃고 있구먼.”

“뭐, 처음에는 조선족이라도 끌어들여서 담가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죠. 얼마나 열불이 났겠습니까? 다 된 밥에 그놈이 똥물을 부었는데.”

“쯧. 자네가 너무 허술했지.”

“글쎄요. 지금 생각해도 제가 허술했다고 보진 않습니다. 모든 각본이 완벽했고, 딱 실행에만 옮기면 됐으니까요. 지금 회장님처럼 말이죠.”

“지금 내 집에 불나라고 고사 지내는 건가?”

“그렇다기보다는, 그때와 상황이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겁니다.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뜬금없이 나타나 제가 차려 놓은 밥상을 빼앗으려 해서 후다닥 달려갔었던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만나고 와서는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구태여 표현하진 않았지만, 정 회장도 오 회장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놈의 면상을 죄다 뜯어 버리려고 왔는데 원하는 건 얻지 못하고 역으로 당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나진 않는다. 그저 기분이 묘했다.

“대단한 놈이지 않습니까? LK 금융을 가져갔을 때만 하더라도 얼마 못 버틸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십시오. 모든 증권사들의 목숨줄을 위협하고 있는 공룡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놈이 내 중공업을 홀라당 털어 갈 거라고?!”

정영준 회장의 언성이 높아지자 오 회장은 그를 타이르듯 말했다.

“어련히 회장님께서 잘 판을 깔아 놓으셨겠죠. 이 우매한 놈보다 더욱 완벽하게 말입니다.”

“당연하지! 내가 자네처럼 멍청하게 눈앞에서 밥상 빼앗길 줄 알고? 어림도 없네.”

“제 말은 그놈이 중공업을 노린다는 건 J&H 금융처럼 크게 키울 자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오 회장 감이 다 죽었네. 돈 세는 거랑 철근 만지고 노는 거랑 똑같은 줄 알아? 조금만 눈 돌리면 자기 돈이 어디로 빠져나갔는지도 모르는 게 건설이야.”

“뭔가 방법이 있다는 거겠죠.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손해 볼 싸움을 하는 놈은 아닙니다.”

정영준 회장은 들고 있던 술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별 잡소리를 다 들으니 술맛이 뚝 떨어지는구먼.”

“하하. 똥줄이 좀 타시는 건 아니고요?”

“시끄러, 이 양반아. 어디 한번 잘 보라고. 내가 그놈을 어떻게 조지는지.”

“재밌겠네요. 그런데 살살해 주십시오.”

“뭐라?”

“최고의 사윗감 아닙니까? 마침 저한테 시집 안 간 딸이 하나 있어서요. 어떻게 잘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넉살스러운 오 회장의 말에 정영준 회장은 삿대질을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 음흉한 양반 보게. 지금 그놈을 응원하는 거였구먼. 그놈을 사위로 들이면 내 회사도 덩달아 넘어가는 거니까.”

“흐흐. 그렇게 보시면 곤란하죠. 엄연히 다른 회사 아닙니까? 제가 장인이 된다고 해서 그놈이 가진 걸 내놓으려 하겠습니까? 오히려 제 자식들이 쥐고 있는 걸 뺏지 않으면 다행이죠.”

“됐네, 이 사람아. 오늘 술 다 마셨구먼. 적이랑 놀아나는 놈과는 겸상할 생각 없어.”

정영준 회장이 마지막 술잔을 털어 넣고 일어나자 오 회장도 함께 일어나며 조언을 남겼다.

“회장님. 그놈이 그렇게 세게 나오는 걸 보면 분명 뭔가 들고 있는 게 있을 겁니다. 그게 과연 뭔지 빨리 알아내셔야 LK 금융 꼴이 안 납니다.”

겉으로는 별걱정 없는 척을 하고 있지만, 오 회장의 조언대로 정 회장 또한 이진석이 뭔가를 들고 있다는 걸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게 무엇인지 몰라 불안할 뿐이다.

* * *

2조 2,500억.

현광이 한라 그룹을 삼키는 금액이다.

미래 커뮤니티 센터를 확인해 본 결과, 현광은 2조 2,500억으로 한라 중공업을 인수하게 된다. 물론, 이 미래는 바뀔 가능성이 높다. 아직 내가 마지막 패를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감님 매서우시네요.”

“하루 만에 언론사가 이렇게 난리를 치다니. 현광 건설, 영향력이 아직 살아 있네요.”

“국내 최고의 건설사 아닙니까. 아파트 광고 많이 때려줬겠죠.”

모든 언론사가 마치 각본이라도 짠 듯이 J&H 금융을 공격했다.

내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물론, 투자 회사가 본인의 위치를 망각하고 투자자들의 돈으로 다 망해 가는 건설사를 사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진석이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건설사를 사들이는 거 아니냐, 이건 횡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뉴스까지 줄줄이 나왔다.

현광이 얼마나 돈을 뿌려 댔으면 가짜 뉴스로 도배를 하면서 우리를 공격하는지 참 어이가 없었다.

“언론사들한테 말은 다 돌리셨죠?”

“예. 우리를 공격해도 되지만, 신호를 주면 그땐 일제히 터트려 주겠다고 약속을 받아 냈습니다. 그쪽에서도 꽤 곤란해하더라고요. 자칫 잘못하면 스폰서를 잃을 수 있으니까요.”

“언론사야 원래 줄타기하는 곳 아닙니까. 현광이 잠깐 삐질 순 있어도 영원히 외면하진 않을 거예요.”

어차피 저렇게 공격을 해도 폭격 한 번이면 끝날 게임이다.

“인수 가격은 2조 2천억으로 합시다.”

2조 2천억.

애매한 금액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좀 적어 보이는데······.”

“정부 발표 들으셨잖아요. 돈으로 따지지 않겠다고.”

물론 비가격 요소도 들어가 있겠지만, 난 일부러 현광보다 500억 낮은 금액으로 책정했다. 이득을 볼 수 있으면 최대한 보자는 마인드도 있고, 모두 입을 맞춰 잔칫상을 날로 먹으려는 놈들에게 소소한 한 방을 먹이려 한 것이었다.

“인수 결정 발표 나기 딱 이틀 전에 터트립니다.”

그동안 축배를 들고 있을 놈들이 폭격을 맞고 무슨 표정을 지을지 내심 궁금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