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86화
“이런 걸 눈 뜨고 코 베인다고 하는 거지?”
“그런 말씀 하시면 제가 너무 죄송스럽지 않을까요?”
“허허. 한 톨도 그런 마음이 없다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네.”
“그럴 리가요. 지금도 매우 송구스러운 마음뿐입니다.”
며칠 걸릴 줄 알았더니, 이강철 회장은 바로 다음 날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현광 건설을 한바탕 시끄럽게 만들어 줄 서류를 내 앞에 던져 주었다.
“자네가 요긴하게 쓰길 바라겠네.”
“든든한 칼잡이를 구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래야지. 안 그러면 내가 자꾸 손해 본 거 같아서 돌아버릴 거 같거든.”
하소연을 늘어놓았지만, 이강철 회장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건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아. 물론, 오랫동안 모아 온 자료를 돈 한 푼 못 받고 넘겨야 하는 건 좀 속이 쓰리긴 하겠다. 거기다가 임원들을 6개월 동안 무임금으로 일을 시키려면 더더욱.
말이 무임금이지, 결국 그들의 밥그릇은 이강철 회장이 대신 챙겨 줄 것이다.
돈은 이강철 회장이 내고, 생색은 내가 내는 상황이라는 것.
나는 정중하게 인사부터 올렸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현찰 만지던 사람이 냄새나는 철근 만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게야. 이건 그냥 돈을 투자하는 개념이랑은 완전히 다르니까.”
금융 회사들이 건설사에 투자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건 투자를 하는 게 아니라 소유를 하는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일이지요. 그러나 회장님 도움으로 아스팔트 길이 쫙 깔리지 않았습니까. 전 편하게 걷기만 하면 됩니다.”
“허허. 그리 생각해 주면 나야 고맙고. 우리가 전에 했던 약속은 지키겠지?”
“예. 한라 중공업에서 나온 지분들은 영원히 회장님의 우호 지분이 될 겁니다.”
“내 우호 지분이 되면 뭐 하나? 이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이강철 회장은 다음 후계를 걱정하는 것이다.
이상현 부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하고 나서의 일을 걱정하는 거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현광처럼 한라 그룹을 빼앗을 생각이 없습니다.”
“음-. 그래. 내가 늘그막에 근심이 많아져서 말일세. 한번 해 본 말이야.”
“아닙니다. 충분히 걱정하시고도 남죠. 뒷일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허. 그리 말해 주니 오늘 저녁은 소화가 잘 되겠는걸?”
은근슬쩍 저녁을 같이 먹고 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이강철 회장이 준 선물도 있으니, 거절할 생각은 없다.
단지, 한라 그룹을 영원히 욕심내지 않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었다.
이강철 회장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라 그룹이 또 한 번 위기에 빠져 휘청거린다면 내가 경영진을 갈아 치워 한라 그룹을 손아귀에 넣을 수도 있다.
“우리 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요리 하나는 끝내주게 해. 밖에서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니까? 허허.”
듣고 싶은 대답은 전부 다 들었으니, 이강철 회장은 자연스레 나를 거실로 이끌었다.
미리 언질을 준 것인지, 일하는 아줌마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오늘 여기서 파티라도 하는 줄 알겠다.
한식, 양식, 그리고 중식까지.
준비되지 않은 요리가 없을 정도다.
“꼭 고급 뷔페에 온 듯한 기분이군요.”
“허허. 내가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쫙 깔아 먹어야 적성이 풀려. 냄새부터 죽이지? 오늘 실컷 먹고 가시게.”
이런. 요즘 배 나왔다는 소리를 다른 사람도 아닌 현식이한테 들어서 다이어트 좀 하려고 했더니, 이거 벨트를 풀고 먹어야 할 지경이다.
“두 분 나오셨군요.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잘 나눌 게 뭐가 있겠나. 내가 다 뺏긴 거지. 에잉.”
“그래도 표정은 후련해 보이시네요, 아버지.”
이상현 부회장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으려 했다.
“진석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한별이었다.
아직 깊은 사이로 진전된 것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건 분명했다.
조금 기분이 묘했다.
솔직히 지금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나는 한라 중공업을 인수하려고 한다. 아무리 회사가 자금난 때문에 넘어갔다고는 해도 저들 눈에는 내가 강탈자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 더군다나 이강철 회장이 죽고 나면 한라 그룹을 내가 정말로 빼앗을지도 모른다.
이런 기이한 구도에서 내가 이한별과 좋은 사이로 발전할 수 있을까?
“노파심에 말해 두는데, 사랑과 일은 별개로 두고 봐야 돼.”
“예?”
“돈 때문에, 자신의 목적 때문에 원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게 얼마나 고약이겠어? 그래서 난 정략결혼을 하지 않았고, 내 아들도 정략결혼은 절대 시키지 않았네. 그리고 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지.”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아무래도 이강철 회장은 내 마음을 읽은 듯 보였다.
“사랑만큼은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돼. 머리로 계산기 두들기지 말고 마음 따라가는 대로 움직여야 되는 거야.”
그룹을 이끄는 회장 자제들 중에 자기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옛날 고려, 조선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왕가의 자식들은 정략결혼을 통해 이익을 챙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룹은 누구와 사돈을 맺느냐에 따라 얻는 이익이 다르다. 그런데도 이강철 회장은 정략결혼을 시키지 않았다. 만약 제 아들을 다른 그룹의 여식과 결혼시켰다면 이 정도로 회사가 기울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미련은 없는 듯 보였다.
“회장님. 맛있게 드세요.”
이상현 부회장과 그의 부인도 내게 존대를 하는 게 여간 불편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사모님.”
“호호. 정말 그래도 돼요?”
“예. 제가 다 불편해서 그럽니다.”
그러자 이강철 회장도 거들었다.
“혹시 알아? 우리 이 회장이 정말 우리 가족으로 들어올지?”
“하, 할아버지.”
“허허. 그래그래. 남녀 일에 늙은이가 관여해서는 안 되지.”
이한별은 이미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나도 맛있게 먹던 음식이 갑자기 목에 턱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어머니만 계셨다면 흡사 상견례가 되었을 것 같다.
* * *
“이 새끼들··· 아무리 봐도 진심 같지?”
그냥 일반 담배도 아닌, 쿠바산 시가를 만지작거리던 정영준 회장.
애연가였던 정영준 회장이지만, 어느 날 무슨 겉멋이 들었던 건지 쿠바산 시가를 피우기 시작했다. 물론, 시가가 워낙 독해서 반도 못 피우고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시가를 고집한다.
“조만간 팔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이미 주가가 고점 찍고 내려앉는 중이잖아. 곧 가격이 평준화될 거라면서 말들이 많아. 그런데도 이놈들은 끝까지 팔지 않았단 말이지.”
여간 심기가 불편한 게 아니었다.
단독으로 들어갈 줄 알았던 입찰 경쟁에 돈놀이나 하던 놈들이 갑자기 뛰어들어 판을 흔들어 놓았다.
기분이 매우 언짢았으나, 금융에서 이름 좀 날리는 놈이니 시세 차익을 챙기고 바로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넓은 아량으로 봐주려고 한 건데, 이놈들은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긁어모은 주식을 팔지 않았다.
즉, 이놈들은 정말로 한라 중공업을 주물러 보려는 것이다.
“건방진 새끼들. 주재도 모르고 감히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이건 선을 넘어도 세게 넘었다.
투자의 귀재라고 언론에서 추켜세우니 자기가 정말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채권단과 은행은 확실하게 단도리 했지?”
“예. 그쪽에서도 많이 당황하더군요. 갑자기 J&H가 왜 튀어나오냐면서······.”
“그 새끼들은 아가리에 돈 더 넣을 생각에 기쁜 거지. 조금 더 챙겨 줘. 뒷말 안 나오게.”
“그렇지 않아도 미리 챙겨 줬습니다.”
“잘했네. 그리고 청와대는? 그쪽에서는 말 없어?”
“어차피 청와대는 방관자 아닙니까? 한라 중공업이 우리에게 넘어오는 건 확실하니까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 다행이다.
오히려 청와대가 이걸 민감하게 받아들였으면 정영준 회장이 더 피곤해진다.
채권단과 은행 모두 이미 말을 맞춘 상태고, 청와대의 재가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J&H는 무슨 깡으로 들이받는 거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식들 뭔가 들고 있는 게 있는 거 같은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설사, 뭔가가 있다고 해도 이번 입찰은 저희들의 승리입니다.”
“내가 이진석 그놈에 대해 좀 알아봤거든? 경력이 아주 화려하던데? 절대 손해 보는 놈이 아니야. 이제까지 이놈이 돈 넣은 것 중에 쪽박 찬 게 하나도 없어.”
“그렇다는 건 이번 입찰도······.”
“그래. 뭔가가 있다는 거지. 자네들은 그런 생각 안 들어? 이 새끼들이 뭘 믿고 들어왔는지?”
아무도 별다른 말이 없자 정영준 회장은 혀를 짧게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가 그놈 면상 한번 봐야겠다.”
“예?”
“자네들이 대가리에 든 게 없으니까, 내가 직접 가서 그놈 얼굴 보고 무슨 의도인지 알아내야겠다고.”
정영준 회장이 밖으로 나서는 걸 임원들이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는 벌써 경호원들과 함께 개인 엘리베이터를 타 버렸다.
* * *
이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현광 건설의 정영준 회장이 나를 찾아올 줄이야.
“회장실이 나보다 더 좋네. 돈 많이 벌었다고 들었는데, 그 값인가?”
“저희 지갑이 좀 많이 두둑하긴 합니다. 떠벌리기 미안할 정도로요.”
정영준 회장이 날카롭게 나를 노려보았다.
돈 싸움에서는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내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회장실도 좋고 내오는 차도 좋구먼.”
“워낙 귀한 손님이 오셔서 저도 잘 못 마시는 귀한 차를 내놓은 겁니다.”
“흐흐. 그렇다면 고맙고.”
정영준 회장은 차를 몇 번 들이켜는 것 말고는 말이 없었다.
결국 먼저 운을 떼야 하는 건 내 쪽인가?
“회장님. 오늘 여기 온 이유가 분명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설마 적진에 돈을 맡기러 오진 않으셨겠지요?”
노골적으로 적진이란 표현을 썼다.
정영준 회장은 한번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좋아요. 어디 한번 탁 까놓고 얘기해 봅시다. 대체 뭘 원하는 거요? 투자사면 투자를 할 것이지, 다른 것도 아닌 중공업을 소유하려 들어? 무슨 의도인지 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저희 J&H 금융 그룹은 투자사이긴 하지만, 투자사 한 곳에 국한되어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미국을 보십시오. 미국과 영국의 유명한 투자 회사들은 단순히 회사에 투자를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소유를 합니다. 그리고 잘 키워서 팔아 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외국물 좀 먹었다고 그 코쟁이들이 하는 걸 따라 해 보겠다?”
“저희 J&H는 한국 법인의 뿌리가 아닙니다. 뿌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죠. 굳이 한국 스타일대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자 정영준 회장이 상을 손으로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건방지게 중공업을 삼켜 보겠다는 거야?”
“분야가 무슨 상관입니까? 돈은 충분히 있고, 마침 매물로 적당한 게 나왔으니 사는 거죠. 경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회사를 잘 키워 낼 자신은 있습니다.”
정영준 회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 참. 뭔가 뜻깊은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젊은 사람이 엉뚱한 욕심을 품고 있구먼.”
“뜻깊은 이유요? 회장님은 단순히 건설업의 발전을 위해 한라 그룹을 통째로 삼키려 드시는 겁니까? 과거의 현광 그룹을 다시 살리시려는 거잖아요.”
그 말에 정영준 회장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게 굉장한 큰 욕심이라는 건 회장님도 잘 아시죠? 둘 중 누가 더 엉뚱한 욕심을 품고 있는지 사람들은 알 겁니다.”
그는 말없이 매섭게 나를 쳐다보았다.
아픈 곳을 푹 찌르니까 뜨끔하기라도 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