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85화
서류를 넘겨 가면서 나는 헛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강철 회장은 생각 이상으로 전투 기질이 있는 양반이다.
적의 급소를 찌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을 보면.
“거래를 하고 싶으십니까?”
내 물음에 이강철 회장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괜히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는 게 아니구먼.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빨라.”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이 미사일로 쑥대밭을 만든다고 해도 그 영토를 점령할 군대가 없으면 소란스럽기만 하지, 얻는 건 없을 테니까요.”
이강철 회장이 내게 보여 준 것은 현광 건설 그룹이 그동안 저지른 비리를 차곡차곡 모아 놓은 것이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구했는지 신기할 만큼 세세한 회계 장부까지 서류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강철 회장은 이 미사일을 쏠 수가 없다.
쏜다고 해도 현광 그룹에 치명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현광 건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기에 이 서류가 검찰에 넘어간다고 해도 담당자 몇몇을 조지는 것으로 끝을 낼 게 뻔했다.
하지만 무기라는 건 누구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가치와 품격이 달라지지 않던가?
“자네 말이 맞아. 소란스럽기만 하겠지. 정작 얻는 건 하나도 없을 테고. 오히려 내가 역공을 당할지도 몰라.”
이강철 회장도 자신의 손에 있는 이 무기를 함부로 터트릴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걸 입찰 경쟁에서 터트리면 가히 치명적이겠군요.”
“정부도 여론을 무시하진 못할 테니까.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놈들에게 한라 중공업이 넘어가면 불을 보듯 뻔한 사태가 벌어진다는 걸 국민들도 알게 될 거야.”
이강철 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현광 그룹 정 회장, 그 친구가 여기저기 너무 많이 못을 박아 댔어. 녹슨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말이야. 이 서류를 토대로 검찰이 의심 가는 곳 한 바퀴만 쭉 돌면 아마 몇 배는 더 두툼한 서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걸세.”
“정치권에도 영향을 많이 주겠네요. 공무원들도 옷 벗을 사람이 많아 보이고.”
“정상적으로 개발 허가를 받는 건 어렵지 않지. 그런데 내가 원하는 곳을 개발시키려면 이상하게 법으로 묶인 것들이 많더라고. 그럴 때 빳빳한 현찰 들고 나랏일 하는 양반들한테 선심 좀 쓰는 거지. 아마 현광 건설에서는 그게 불법이라고 생각조차 안 했을 거야.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니까.”
공무원에게 돈을 주고 청탁을 하는 건 엄연히 불법이다. 그러나 워낙 그런 게 일상이 되어 있다 보니, 그것이 불법이라는 것조차 망각해 버린다.
현광 건설은 그렇게 망각에 빠져 이강철 회장에게 틈을 내주고 말았다.
“어때? 이 정도면 쓸 만하지?”
이 서류라면 인수전 때 조커 카드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승리를 결정짓는 카드가 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무턱대고 받아들일 순 없다.
“제가 인수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 서류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겠군요.”
“음. 그, 그렇겠지.”
이강철 회장은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께서는 제가 이걸 꼭 써 주었으면 하고요.”
“맞아. 난 자네가 꼭 한라 중공업을 인수했으면 좋겠어.”
“그냥 제가 좋아서 그런 생각을 하신 건 아니겠죠?”
“허허. 당연히 자네가 좋은 것도 있지.”
“돈 앞에서는 사적인 감정을 담지 않는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거 사람 참. 할 말 없게 만들기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걸 내게 넘길 리 없다.
자기가 키운 사람들을 6개월 동안 무임금으로 일까지 시키겠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다.
“한라 중공업에 섞여 있는 한라 그룹 지분을 내게 넘겨 주시게.”
역시, 이강철 회장이 원하는 건 지분이었다.
“그 지분을 내준다면 한라 중공업이 흔들리지 않도록 내가 도움을 주겠네. 어떤가?”
이강철 회장은 아무래도 나를 마냥 착한 사람으로만 보는 것 같다.
예전의 나였다면 친분에 이끌렸을지 모르겠지만, 금융 그룹을 이끄는 회장으로서 나는 사적인 감정을 미뤄 놓고 철저히 돈만 생각해야 한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응?”
“저도 사적인 감정은 전부 배제해야겠습니다.”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거래를 하는 것치고는 제게 건네주시는 게 좀 약해 보입니다.”
“허어-. 약하다고? 6개월 무임금에, 인수전에서 쓸 수 있는 미사일까지 쥐여 주는데?”
“그럼 반대로 생각을 해 보죠. 6개월 무임금? 좋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회장님 사람이지, 결코 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라 중공업의 시스템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죠. 즉, 저 같은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는 겁니다.”
“자네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 내가 자네를 기만할 거라고?”
“회장님은 믿습니다. 하지만 전 그들을 믿지 못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회장님이 갖고 계신 그 미사일은 저 아니면 쓸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 그걸 썼다고 해서 승리가 확정되는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제가 역으로 당할 수도 있죠.”
“이, 이보게. 이 회장.”
“잠시만요. 아직 더 남았습니다.”
나는 반쯤 식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은 뒤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는 아마 제가 회장님과의 인연 때문에 이 제안을 선뜻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셨겠지만, 저는 한라 중공업을 손에 넣겠다고 확정 지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듯, 시세 차익으로 이익을 보고 빠져도 솔직히 상관없습니다.”
“······.”
“회장님께서 제안해 주신 건 매우 매혹적이고,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분을 넘기는 건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강철 회장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혹 자네도 현광처럼 한라 그룹을 노리는 건가?”
“아니요. 이거 하나는 약속드리죠. 만일 제가 한라 중공업의 주인이 된다면, 그 안에 섞여 있는 지분은 회장님의 우호적인 지분이 될 겁니다. 절대 경영권을 빼앗거나, 경영에 관여하지도 않을 것이고요.”
“허허. 겉은 안 그래 보이는데, 욕심이 어마어마하게 큰 사람이었구먼.”
“금융 그룹을 이끌고 있는 회장이니까요. 제 신세도 이해해 주십시오.”
나는 이강철 회장에게 분명히 내 의지를 전달했다.
한라 중공업이 현광 건설에게 넘어가는 순간, 이강철 회장은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하지만 내가 인수에 성공하게 된다면 그는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는 날 응원해야 한다. 또한 나를 응원하는 대가 역시 치러야 한다.
6개월 무임금과 현광 그룹의 추악한 모습을 낱낱이 드러낼 수 있는 서류.
내가 한라 중공업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저 두 개를 내게 넘겨야 한다.
“자네가 봐도 거의 날강도나 다름없는 계산법이라는 건 알고 있지?”
“글쎄요. 전 회장님의 영원한 아군인걸요?”
“허허. 이거 내가 된통 당한 거 같은데.”
“회장님의 마지막 카드는 바로 J&H이지 않습니까?”
“J&H가 내 마지막 카드?”
“예. J&H가 한라 중공업을 삼키지 않는다면 한라 그룹 전체가 현광에 넘어갈 테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제값은 한다고 생각합니다.”
“음······.”
이강철 회장이 침음을 흘리고 있을 때,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회장님이 결정을 내리시면 저도 그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내가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면 자네는 시세 차익만 뚝 챙기고 떠날 건가?”
“그것이 회사의 이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면 지체하지 않고 그렇게 할 겁니다.”
“냉정하구먼. 완벽한 경영인의 자세야.”
“과찬이십니다. 그럼,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빼앗긴 한라 중공업이란 영토를 다시 찾기 위해 날 군대로 쓸지, 아니면 그냥 현광이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기도할지.
최종 결정은 이강철 회장이 내리게 된다.
* * *
“허허. 이거야 원.”
이강철 회장은 이진석이 떠나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나이가 어리고, 자신과의 인연과 손녀딸과의 관계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미 이진석은 이강철 회장마저 찜쪄먹을 수 있는 놈이었다.
사적인 감정은 물론이요, 가족이라고 해도 돈과 관련된 거라면 절대 양보를 할 놈이 아니다. 그리고 그건 회사를, 그것도 금융 그룹을 이끄는 회장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이다.
“아버지. 얘기는 잘 하셨습니까?”
이강철 회장이 끊었던 담배까지 물고 있으니, 위층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부회장 이현상이 조심스레 내려왔다.
이강철 회장은 제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담배를 쭉 빨아들였다.
자기 아들에 비해 한참이나 어린 이진석. 하지만 사람의 그릇과 재능은 나이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회장은 알고 있었다. 제 아들이 이진석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저도 같이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야. 나이는 어리지만, 그 친구는 나처럼 똑같이 그룹을 이끄는 회장이다. 두 회장이 나누는 대화에 부회장이 끼어들 순 없지. 아무리 네가 내 아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현상 부회장은 이강철 회장이 이진석을 동등한 위치의 인물로 인정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자신을 단 한 번도 인정해 주지 않은 그 아버지가 말이다.
“그래서 얘기는 어떻게 됐습니까?”
“오히려 내가 당했다.”
“예?”
길게 연기를 내뿜는 이강철 회장을 바라보며 이상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나이가 들고 회사가 많이 흔들렸다고 하지만, 누구에게 당할 사람은 아니지 않던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내가 가진 카드를 다 내놓으라고 하더구나. 그럼, 인공호흡기 달아서 살려 준댄다.”
“저, 정말 그 친구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허허. 그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이다. 내가 자존심까지 깎아 가며 무임금 6개월에 현광 그룹 비리 서류까지 건넸지. 그런데도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하더라.”
“그 친구가 그럴 줄은 몰랐군요······. 한별이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제안을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아들의 나약한 목소리에 이강철 회장은 혀를 찼다.
“쯧쯧. 인정에 이끌리면 잘나가던 사업도 망하는 거야. 돈 앞에서는 무조건 냉정함을 지키는 게 기본 원칙이라고 내가 입이 닳도록 얘기하지 않았냐? 너도 그런 점은 배워야 돼. 그래가지고 나 죽고 나서 이 자리를 지킬 수 있겠어?”
“아, 아버지.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시끄럽다. 아무튼, 네 의견을 말해 봐.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이상현 부회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런 한심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강철 회장은 한숨부터 나왔다.
이진석은 이강철 회장에게 영원히 우호적인 지분이 될 거라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죽고 나면 그 지분이 제 아들에게도 우호적일 수 있을까?
만약 제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면 한라 그룹 전체를 홀라당 삼킬 수 있는 자다.
그래서 이강철 회장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칼을 든 현광에 회사가 넘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속에 도끼를 품고 있는 이진석과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 * *
“어떻게 됐습니까?”
이강철 회장을 만나러 간 나를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던 권오준 대표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이 회장이 들고 있던 카드가 두 개나 있더군요.”
나는 이 회장과 나눈 이야기를 자세히 권오준 대표에게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권 대표가 박수까지 쳐 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강철 회장님이 화들짝 놀라셨겠군요. 괜히 입을 열었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다 빼앗기게 생겼으니까요.”
“소득이 없는 건 아니죠. 제가 중공업을 인수하게 되면 회장 자리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아니면 그냥 약속이고 뭐고 우리가 한라 그룹을 통째로 삼켜도 됩니다.”
“그러고 싶으세요?”
“회장님의 의지에 달린 일이지 않습니까? 현광 그룹이 했던 것처럼 우리도 국가 기관에 돈을 뿌려 우리 편으로 만들면 됩니다.”
권오준 대표는 확실히 싸움꾼 기질이 타고났다.
한번 치고 들어가면 인정사정없이 박살을 내야 속이 시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라 그룹을 통째로 삼킬 생각은 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조선과 건설뿐이다. 그 이상으로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고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정말 중공업을 내 손에 넣을지, 아니면 이대로 시세 차익만 내고 빠질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