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84화 (84/200)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84화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자주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하하. 이 회장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축하하네. 이번 실적 발표가 어마어마하더군.”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테슬라에 묶인 돈을 찾아온 게 아니라서 언제 또 떨어질지 몰라요.”

“사람 참 겸손 떨기는. 자자. 그러지 말고 얼른 앉게.”

이강철 회장은 꼭 잡은 내 두 손을 놓으며 자리를 가리켰다.

이윽고 이강철 회장의 집에서 일하는 직원 하나가 차를 가져다주었다.

그동안 신변잡기를 나누며 정작 중요한 얘기는 빙빙 두르고 있었는데, 결국 참다못한 이강철 회장이 먼저 운을 뗐다.

“이 회장. 뭐 좀 물어봐도 되나?”

“예. 말씀하십시오.”

당연히 이번 입찰 경쟁에 관한 내용이 나올 줄 알았다.

“자네는 우리 손녀를 어떻게 생각하나?”

“···예?”

“내 손녀딸 말일세. 한별이. 둘이 드문드문하게나마 만나는 거로 알고 있는데. 혹시 진지한 사이인가? 내 손녀가 통 그런 걸 말해 주질 않아서 말이야. 허허.”

찝찝함 때문에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는 건가, 아니면 정말 이걸 물어보려고 날 부른 건가.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긴 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일에 쫓겨서 회사와 집만 들락거리고 있어서요. 누굴 만날 시간이 부족하죠.”

얼굴만 가끔 볼 뿐, 진지한 사이는 아니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이강철 회장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지만, 이내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해하네. 지금도 많이 바쁘지 않은가? 내가 공들여서 키워 놓은 중공업을 인수해야 하니 말이야.”

이런 식으로 대화가 넘어간다.

그는 내 얼굴을 보고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누구를 원망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다 내 잘못이지. 회사를 지키지 못한 건 전적으로 회장인 내 잘못이야. 그리고 이번 입찰 경쟁에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네. 그래도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고, 미련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충분히 이해합니다.”

“고맙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는 정말 중공업을 인수할 참인가?”

“입찰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서류도 제출했고요.”

“그런 건 누구나 할 수 있지. 보여주기식으로라도. 난 자네의 진심을 알고 싶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응? 잘 모르겠다?”

“회장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잘 압니다. 제가 크게 주가를 폭등시켜 팔아먹으려 한다고 생각하시겠죠.”

“허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지. 그렇다고 자네를 비난할 생각은 없네. 나라도 그렇게 해서 짭짭한 수익률을 올렸을 테니까.”

“예. 그래서 저도 고민 중입니다. 여기서 브레이크를 걸어 돈을 챙길지. 아니면 리스크를 감수해서라도 모험을 해 볼지.”

“모험이라······.”

내가 말한 모험이 무슨 뜻인지 이강철 회장은 알아들었을 것이다.

중공업을 인수하는 건 정말이지 큰 모험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만약 중공업을 자네가 인수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둘 중 하나입니다.”

“둘 중 하나?”

“일단 저희는 중공업을 운영할 만한 경영진이 없습니다. 그 분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으니까요. 하지만 마땅한 경영진을 구한다면 조선 사업과 건설 사업 쪽을 잘 키워 볼 예정입니다.”

“두 번째 옵션은?”

“투기 자본이 그렇듯, 중공업을 인수한 뒤에 쓸모없는 건 제거하고 필요한 건만 모아서 팔아 버리는 거죠. 아마 판다고 하면 살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중에서 제일 가격을 잘 쳐 주는 곳에 넘기면 됩니다.”

“솔직하군.”

“이미 예상하셨을 테니까요. 숨길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이강철 회장이 아니더라도 사업하는 사람이면 우리 계획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금융 회사라고 투자하는 분야에 대해 무조건 빠삭할 필요는 없어. 다른 금융사들을 봐도 그러지 않는가? 돈만 맡기고 경영은 알아서 하라고 놔두는 거지.”

“예.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죠. 특히 건설은 여기저기서 빼먹을 구멍이 많다 보니까요. 아! 회장님이 그러신다는 건 아닙니다. 윗사람 모르게 뒤로 돈을 빼돌리는 사람들을 말한 거죠.”

“허허. 괜찮아. 그렇게 눈치 볼 필요 없어. 그동안 회사를 운영해 오면서 오물 한 번 뒤집어쓰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오히려 내가 자의로 똥통에 입수한 적이 더 많아.”

이런 걸 예상하진 못했는데, 이강철 회장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약점들을 내게 말해 주었다.

“한라 그룹이 유통도 하고 호텔 경영도 하고 있지만, 당연히 중공업이 최고야. 특히 건설은 내게 효자 같은 놈이지. 회사가 자금이 부족하면 건설 쪽에서 돈을 마련해 오곤 했으니까. 이런저런 방법으로 깨끗하지 않은 돈을 만들어 내는 거지. 그렇게 해서 회사 위기를 여러 번 넘겼어.”

건설 상황이 많이 힘들어도 끝까지 대기업들이 그곳을 놓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강철 회장처럼 다른 곳도 건설이 가져다주는 돈을 요긴하게 썼을 것이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요즘은 사람들이 날더러 청렴한 회장이라고 하더군. 다른 회사와는 다르게 잡음도 없고 돈 문제로 약점 잡힌 일도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다른 곳보다 비교적 덜 해먹어서 걸리지 않았을 뿐이지, 절대 깨끗한 사람은 아니야.”

“아닙니다. 회장님. 저는 회장님의 경영 정신을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회장님을 손가락질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회장님이 그렇게 회사의 구멍을 막지 않으셨다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에 나앉았을 테니까요.”

“허참. 이제 20대 중후반 되는 젊은이가 내 가려운 곳을 다 긁어 주는구먼.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그렇게 분위기가 훈훈하게 흘러가는가 싶더니, 이강철 회장이 훅 치고 들어왔다.

“입찰 경쟁, 진지하게 해 보는 게 어떤가?”

이름만 한라가 들어가 있지, 이제 남의 집 잔치 구경이다. 이강철 회장은 이번 입찰 경쟁에 끼어들 수도, 막을 수도 없다. 그런데도 내게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리라.

“도와주실 겁니까?”

“뭐, 한라 그룹이 자네를 도울 만한 여력이 없다는 건 알겠지.”

“예. 공식적으로는 도움을 줄 수 없겠죠.”

“허허. 자네 눈치 하나는 백 단일세.”

내 직감이 맞았다.

이강철 회장은 아직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패가 남아 있었다.

“만일 경쟁에서 승리한다면 내가 아는 모든 노하우를 자네에게 주지.”

건설과 조선에서 노하우라고 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건 바로 사람이다.

중공업을 인수하고 나서 가장 필요한 경영진과 현장을 지휘할 노동력.

이것들이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된다. 중공업을 인수한다는 전제하에서.

“6개월 동안 무임금으로 일을 시켜도 괜찮을 거야. 무임금이 조금 심했다 싶으면 절반으로 깎아도 되고.”

6개월 동안 무임금으로 경영진을 쓰라는 건가?

매우 파격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순순히 하려 할까요?”

“안 하면? 내가 오랫동안 키워 온 사람들이야. 어차피 우리 회사가 현광에 넘어가면 그 양반들이 설 곳이나 있겠어? 호흡기 달아 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고 절을 해야지.”

“6개월 후에 제가 갈아치울 수도 있는데요?”

“그건 자네 선택이지. 그리고 내가 오랫동안 키워 온 애들이라고 했지? 그 애들이 작년 여름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모를 줄 아는가? 혹시라도 그놈들이 반항하면 나한테 언질을 주시게.”

생각보다 냉혹한 구석이 있는 영감이다.

약점을 쥐고 흔들어 강제로 6개월 동안 일을 시키겠다는 거 아닌가?

“회장님께서 절 도와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음······. 이걸 한번 보겠나? 돈 만지는 사람이니, 숫자는 잘 보겠지.”

이강철 회장은 두툼한 서류 하나를 건넸다.

나는 빠르게 서류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왜 이강철 회장이 내게 이 서류를 건넸는지 알 것 같았다.

“현광 건설이 생각보다 더 음흉한 짓을 꾸미고 있었군요.”

“바로 알아봤구먼.”

몇 장만 읽어 봐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현광 건설은 몇 년 전부터 한라 그룹을 찢어 먹을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다.

중공업뿐만이 아니다.

한라 그룹 전체를 현광이 씹어 먹으려고 아가리를 벌리는 중이었다.

“정영준 그 양반, 아직도 고향을 잊지 못하나 봐. 어떻게든 덩치를 키워 예전의 현광 그룹을 만들어 내겠다는 거지.”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무리하게 몸집을 늘리면 손해만 클 텐데요?”

“그걸 그 양반이 모르겠나? 그런데도 집착을 못 떨치는 거지.”

현광 그룹은 지금 갈기갈기 찢어져 서로 계열사가 나뉘었다.

한 차례 왕자의 난이 일어나 후계자를 정하는 과정에서 결국 현광 자동차와 현광 건설이 이별을 하게 되었다.

장남이 현광 자동차를 갖고, 차남이 현광 건설을 갖게 된 것이다.

장남인 장영호는 이미 건설에 대한 미련을 접은 것 같았지만, 차남인 정영준은 예전의 현광 그룹을 못 잊은 듯했다.

“현광 그룹이 돈을 어디다 쓰고 있는지 그 보고서를 보면 알겠지?”

“예. 자동차 산업에 슬슬 돈을 풀고 있네요.”

“현광 자동차가 주춤거리고 있잖아. 외제 차들이 판을 치면서 현광이란 이미지가 똥이 된 거지. 거기다 KS가 1위 자리를 바짝 쫓고 있는 추세고. 그래서 정영준 그 양반이 눈을 그쪽으로 돌리는 거야.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날개도 못 펴는 대호 자동차 지분을 매집하고 있잖아.”

이 보고서는 현광 건설 그룹의 자금 흐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들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한라 그룹 지분을 매수해 왔다. 국가 기관이 들고 있는 지분 몇 %까지 가져온 것을 보면 진심으로 한라를 삼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거기다 최근에는 저 밑바닥에서 놀고 있는 대호 자동차 지분까지 매입하며 자동차 시장 진출에도 가닥을 잡고 있다.

그 목표는 분명 현광 자동차일 터.

세 번 연속 일어난 리콜 사태로 인해 꺾일 대로 꺾인 현광 자동차를 공격해 과거의 현광 그룹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냐고?

내가 볼 땐 아니다.

지금 장영준 회장은 어림도 없는 짓을 벌이고 있다.

이미 완전 분리를 끝낸 자동차를 다시 삼키려 들다니.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이강철 회장이 말했다.

“장영준이가 멍청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겠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계열 분리가 완전히 끝난, 그야말로 남남인 회사이지 않습니까? 현광 자동차가 요즘 좀 힘들다고 해서 강도질을 당할 곳은 아닙니다.”

“허허. 나도 몇 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예?”

“현광이 우리를 삼키려고 물밑 작업 들어왔을 때 말이야. 헛고생을 한다고 비웃었어. 그런데 결국 내 턱밑까지 물이 차오르지 않았나? 현광 자동차라서 해서 다르겠는가? 세상일은 아무도 몰라. 정말 자네 말대로 멍청한 짓 하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예전의 현광 그룹을 다시 살려 내는 걸 수도 있어.”

세상일은 모른다라······.

기억해야 할 말인 것 같았다.

한라 그룹이 이렇게까지 추락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만약 현광이 이번에 한라 중공업을 인수하게 된다면 그 안에 섞여 있는 지배 지분이 현광 건설에 넘어가.”

“회장님이 쥐고 계신 지배 지분율보다 높겠군요.”

“그동안 현광이 챙겨 간 지분과 더해도 내가 가진 지분보다는 낮아. 딱 5% 부족하지. 그런데 문제는 국가 기관과 은행이야. 그들 중 한 명이라도 현광 쪽에 손을 들어주면?”

“경영권이 넘어가는 거네요.”

“맞아. 그래서 나도 필사적이야. 그리고 나름 준비를 해 왔지.”

준비를 해 왔다?

그렇다는 건 이 상황을 뒤집을 패 하나를 숨겨 두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현광이 그런 불미스러운 움직임을 보일 때 나는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네.”

“다른 쪽이라면······.”

“그놈이 도끼 들고 쫓아오는데, 나도 곡괭이 하나쯤은 찾아서 들어야 할 게 아닌가?”

이강철 회장은 이번에 다른 서류를 내게 던져 주었다.

“한번 봐 보게.”

그리고 난 그 서류를 펼치는 순간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미사일 폭격 맞고 쑥대밭이 된 땅에 깃발 꽂으러 오는 현광에 한 방 날릴 수 있는 아이템이지 않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