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60화.
“저 양반이 웬일이야?”
천하 그룹 회장, 장연욱의 등장에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한 일이다.
몇몇 언론에서 장연욱 회장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았던가?
일각에서는 이미 장연욱 회장이 죽어 부회장인 장선욱이 경영을 총지휘하고 있는 거라고 힘을 주며 주장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비웃기라도 하듯, 장연욱 회장은 사지 멀쩡한 채로 강당 위에 서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단 얘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요?”
“그걸 믿어? 그 얘기 못 들었나봐. 천하 그룹이 작정하고 정보 차단하면 나라님도 알 수가 없다고 말이야.”
국정원부터 각 정보 기관을 움직이는 정부가 어떻게 모를 수 있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저건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다.
천하 제국, 천하 공화국, 천하민국.
이런 수식어가 왜 붙었겠는가.
천하 그룹은 오래 전부터 차근차근 대한민국을 장악해 왔고, 지금은 그들의 힘이 어디에도 닿았다.
청와대는 말할 필요도 없으며, 법을 집행하는 검경과 행정 기관들까지 천하 그룹의 입김에 작용한다.
“아무래도 곧 대통령 바뀌니까 슬쩍 얼굴이라도 비추려 한 거겠지. 거기다 오랜만에 군기도 잡으면 좋고.”
“군기를 잡아요?”
“여기 재벌들 중에서 천하 그룹한테 열등감 느끼는 놈들이 얼마나 많겠냐? 그중에는 정말 천하 그룹을 따라잡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데 때마침 천하 그룹을 지금의 크기까지 키운 장연욱 회장이 사라졌으니, 기회다 생각하고 달려들었겠지.”
“그 사람들 지금 심장이 쫄깃하겠네요.”
“아마도 그럴 거다.”
죽은 줄 알았던 장연욱이 떡하니 돌아와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으니, 총수들도 이런 저런 생각이 참 많아질 것이다.
거기다 곧 있으면 총선이다.
지지율로만 보면 우리나라 첫 여성 대통령 탄생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곧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된다는 것과 장연욱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예전에는 각자 따로 플레이를 했었지. 보수, 혹은 진보에다 각자 을 거는거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서로 연합해야 할 경제인들이 오히려 서로 정치 싸움만 하려 든다는 의견이 나와서 그때부터는 전경련 전체가 하나로 움직이고 있어.”
“그 말씀은 전경련에서 어떤 후보자를 지원할지 결정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음-. 우리야 돈 버는 장사치들이잖아. 가장 이득이 될 만한 정권을 골라 그쪽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거지. 전경련만큼 이번 대선을 확실하게 승리로 매듭질 수 있게 해 주는 곳이 또 없어. 원래 돈의 힘이 가장 세니까. 대선도 마찬가지야.”
전경련이 대선을 도와주고 그에 따른 대가를 받는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들이 단합해 한쪽 후보를 도와준다면 그 후보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을 터.
수백 개의 대기업이 전폭적인 지지를 해 주는 것이지 않은가.
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홍보팀이 그 후보의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움직일 것이며, 각 언론사들도 한쪽 후보에게만 편파적인 기사를 쓸 게 뻔했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도 전경련의 지지를 얻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경제 개발에 관련된 공약들을 많이 내걸기도 한다.
정치권이 재벌의 눈치를 보는 시대.
불편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정치권에서 원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 돈이니까.
“오늘 장연욱 회장이 전경련에 나타났다는 얘기가 밖으로 안 새어 나가겠죠?”
“우리가 공식으로 발표하지 않는 이상, 언론사들도 저 양반이 사지 멀쩡하다는 거 모르겠지.”
장연욱 회장의 건강 이상설이 떠돈지 2년이 넘었다. 그동안 천하 그룹 주가가 많이 요동쳤지만, 장선욱 부회장이 회사를 잘 이끌어 가면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그런데 만약 장연욱 회장이 아주 건강하다는 기사가 나가면 어떻게 될까?
최근 상승세가 주춤하던 천하 그룹의 주가가 가파른 상승을 보여 줄 건 뻔했다.
“저 양반이 건강 이상설까지 퍼뜨리면서 집에 은둔하는 이유가 다 있어. 괜히 침묵의 지휘관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야. 옛날부터 유명했잖아. 사람 만나는 거 싫어하는 걸로.”
침묵의 지휘관.
장연욱 회장이 천하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을 때부터 불리게 된 별명이다.
회사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항상 집에 머물며, 혼자 서재에서 며칠 동안 나오질 않는다. 그러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기면 그제서야 서재에서 탈출해 임원들을 불러 모아놓고 지시를 내린다.
이것이 유명한 장연욱 회장의 회사 경영 방식이었다.
임원들 중에서도 그의 얼굴을 10번 이상 본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가만히 집에 머무는 것을 워낙 즐기다 보니 수십 개의 별장을 소유해 때때마다 장소를 바꾼다고 들었다.
그런 특이한 성격 때문에 말들이 참 많았지만, 결국 그는 우물 안에서 놀고 있던 천하 그룹을 전 세계까지 퍼뜨리는 쾌거를 이뤄냈다.
지금은 그의 유별난 경영 방식과 리더십을 욕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거기에서 비밀을 찾고자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을 정도다.
짝짝짝-!
강당에 올라와 짧게 몇 마디를 하고 내려가는 장연욱 회장에게 총수들은 열심히 박수를 쳐댔다. 그후 사회자는 1시간 뒤에 몇몇 안건을 처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재계 총수들은 장연욱 회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장연욱 회장은 그들과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횡 사라져 버렸다.
결국 오늘 장연욱 회장이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괜한 짓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경련 모임에 모습을 드러낸 게 고작 몇 분에 불과했는데, 가장 큰 임팩트를 남기고 간 장연욱 회장이었다.
“이진석 회장?”
현식이네 아버님이 다른 총수들과 인사를 나누러 떠난 사이, 나는 혼자 뻘쭘하게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KV 그룹 회장, 오대현이 내게 아는 척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 말이 있지. 직함이 날개라고. 회장 되니까 아주 포스가 철철 흐르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양반도 참 이상한 사람이다.
LK 금융 인수 문제로 나와 진흙탕 싸움까지 하며 더럽게 엮였다.
나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비엣콤이 LK 금융을 사지 절단 해 놓고 KV 그룹의 배를 불려주었을 텐데, 이상하게 나한테 호의를 보인다.
그런 내 시선을 의식한 모양인지, 오대현 회장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다 우리 아들 같아서 그래.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난 옛날 일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제 우리도 한 배를 같이 탄 건데, 다 지난 일 때문에 으르렁 거리는 건 낭비 아니야?”
낭비.
재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돈에 관련된 일이라면 조금의 손해도, 그리고 낭비도 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 회장이 나한테 자기는 옛날 일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이 회장, 만나는 여자는 있나?”
“예?”
“아니. 이렇게 인물도 좋고 응? 능력도 좋은 사람이 여자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내가 이 회장 만나는 여자 없나 조금 알아봤었거든. 근데 아무도 없더라? 아니면 몰래 만나는 건가?”
“뒷조사 했다는 걸 너무 당당하게 말씀하시는데요?”
“뭐 어때. 자네도 LK 금융 꿀꺽 하려고 할 때 우리 회사 조사 안 했어? 그때 내 뒷조사도 분명 했을 텐데?”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혹시 만나는 여자가 정말 없으면 내가 소개 좀 시켜 줄까?”
나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정말? 내가 아주 귀하게 키운 우리 막내 딸인데도?”
“그럼 더더욱 싫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한번만 만나 봐. 우리 딸이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나온 인재 중의 인재야. 얼굴도 지 엄마 닮아서 엄청 예뻐요.”
“······.”
왜 이렇게 호의를 보이나 했더니, 자기 딸을 소개 시켜 주려 했던 거였다.
역시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고 했던가.
나는 연신 구애를 하며 매달리는 오 회장을 간신히 떼어 놓고 마침내 중요 안건에 대해 사회자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총선이 몇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창 양측 진영이 PR을 하기 바쁘고요. 이제 전경련에서도 입장을 나타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건 사회자인 저의 뜻이 아니라, 전경련 회장이신, 천하 그룹 장연욱 회장님의 뜻입니다.”
현 정권의 대통령은 전 대마 그룹의 회장직을 역임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대마 그룹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많았지만, 전경련 회장이 쭉 장연욱인 것을 보면 권력 구도가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투표를 하려고 합니다. 여기 모인 400명의 총수분들께서 투표에 참여하시어 뜻을 나타내 주십시오. 가장 많이 표가 몰린 곳에 전경련이 전폭적인 지지를 할 예정입니다.”
색깔론처럼 보이긴 해도 우리나라 정치권은 항상 두 가지로 나뉜다.
진보냐, 보수냐.
군사독재의 패망 이후부터 쭉 진보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현 정권부터는 보수가 권력을 잡았고, 다음 대선도 현재 보수 쪽이 미세하게 앞서고 있다.
투표를 시작하면서 최진철 사장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투표해도 어차피 결과는 정해진 거 같더라.”
“그렇습니까?”
“이미 보수로 결론이 났어. 천하 그룹이 이미 보수 쪽에 표를 던지겠다고 얘기를 뿌렸거든. 장연욱 회장이 보수에 붙겠다고 선언을 했는데, 다른 총수들이 그 흐름을 거부하려 할까?”
“조금 씁쓸하네요.”
“의외로 전경련도 단순해. 천하 그룹 중심으로 돌아가는 건 어쩔 수가 없지. 장연욱 회장 이전부터 천하 그룹이 뿌려온 게 있잖아. 그걸 다 수확해서 열심히 휘두르고 있는 거야.”
그렇게 투표는 빠르게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최진철 사장 말대로 투표 결과는 압도적으으로 보수가 승리했다.
“우리 금융 회사들이 이제 바빠지겠어.”
최진철 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대선 같은 특별한 이벤트에 가장 많이 웃는 건 금융사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대선 자금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헌법상 대선후보가 대선에서 쓸 수 있는 자금은 509억 원이다.
그렇다면 대선 자금을 보통 어떻게 마련하는가?
첫째로는 선거 보조금이라는 것이 나온다. 선관위에서 의석에 따라 각 당에다 보조금을 지원해 주는데, 사실 이거로는 대선을 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을 쓴다.
그건 바로 은행 대출.
수백억 원의 돈을 대출받아 대선 자금으로 쓰는 건데, 수백억의 빚과 그 이자를 감당해야하기 때문에 리스크가 있다.
그렇다면 세 번째 방법이 또 있지 않을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번 대선 때 펀드 개설을 한 후보가 있지 않았던가요?”
“응? 펀드?”
“예. 펀드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대선 자금을 모으는 겁니다.”
최 사장은 턱을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었던 거 같네. 알다시피 저번 대선은 좀 싱겁게 끝났잖아. 일단 돈도 많은 양반이었고, 지지율도 압도적이었고. 그런데 펀드 개설로 선거 자금을 얻은 적이 있던가?”
“제 기억으로도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소규모였을 테고요. 예전에는 사람들이 주식 시장에 쉽게 접근할 수가 없지 않았습니까.”
헌법상 득표율이 15%가 넘으면 대선에 들어간 모든 자금을 정부에서 지원해 준다. 그렇기에 대선에서 승리하면 그동안 사용했던 자금을 전부 돌려받기 때문에 펀드 모금 참여를 한 국민들은 일정한 수익률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순간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쩌면 서로가 어디다 돈을 때려 박아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나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장님. 저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응? 벌써 가게? 음식 좀 먹고 가지. 여기 요리사들 실력 좋은데.”
“아뇨. 지금 가서 머리 안 굴리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하하. 그래. 젊을 때 열심히 굴려야지. 어서 가 봐.”
나는 무례를 무릅 쓰고 전경련을 뛰쳐나왔다.
진보와 보수, 이 두 세력에게 호감을 얻는 것은 물론 홍보 효과와 신규 고객 창출이라는 아이디어가 내 머리를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