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54화.
이런 회의는 이제 지겹기까지 하다.
아마 다른 금융사들도 비슷한 회의를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오늘의 안건은 바로 J&H 금융.
특히 이진석이란 이름이 나올 때면 임원들은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KV 증권은 양우석 대표가 맡고 있었다. 그러나 비엣콤 뱅크와 KV 금융 사이에 비밀 계약이 오고 갔다는 의혹이 드러나면서 오 회장은 양우석 대표를 잘라 버렸다.
양우석 대표는 절대 자기 입에서 나간 게 아니라며 오 회장을 설득했지만,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 돌리지 않는 오 회장은 아무래도 찜찜하다는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대표에 오른 것은 윤진혁이었다.
KV 그룹에서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던 윤진혁이 양우석의 후임으로 앉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가 결코 수명이 긴 곳이 아님을 선배들의 말로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이틀에 걸쳐 전량 매도입니다. 1조 원이 넘는 양을 이틀 안에 팔아치웠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의도가 불분명합니다. 지금 잘 나가고 있는 줄기세포 관련주만 모조리 매도했으니까요.”
“줄기세포 관련주에 무슨 악재라도 떴나?”
“아니요.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들 신기술에 열광하고 있죠. J&H가 관련주를 전부 처분한 다음에도 주가가 더 올랐습니다.”
“그런데도 다 팔았다?”
“예, 사장님. 아마 J&H 쪽에서 더는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 미스를 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내부적으로 자금이 필요해 종목을 다 팔아 버린 것일 수도 있고요.”
임원들의 보고에 윤진혁은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참. 이 양반들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네.”
“예?”
“당신들 지금 나 쫓아내려고 이러는 거지? 뭐? 판단 미스? 내부적으로 자금이 필요해? 진짜 어이가 없어서.”
과격해진 윤진혁 사장의 어투에 임원들은 바짝 긴장했다.
오 회장은 누군가를 사장 자리로 올려놓을 때 인사권도 함께 준다.
권한을 보장해 주는 만큼 실적으로 보답하라는 의미였는데, 그로 인해 임원들은 오 회장이 아니라 윤 사장한테 잘 보여야 할 판이었다.
“J&H 금융이 다른 곳보다는 자금이 딸리긴 하지. 그런데 당장 파산할 정도는 아니야.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고. 거기다 당신들, 이진석이 그동안 보여 준 패턴들을 다 잊었어? 그놈은 우리 모두가 직진을 할 때 갑자기 혼자 후진을 하는 놈이야. 이번에도 똑같아. 자기 혼자 튀는 행동 하고 있잖아. 그럴 때마다 우린 비웃었지.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더라?”
“······.”
“그놈이 매번 이겼어. 모두가 맞다고 할 때 혼자 틀렸다고 외치면서 기어코 승자가 되었다고. 이런데도 그놈이 실수한 것처럼 보여? 아니야. 그놈 혼자 또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전량 매도를 선택한 거라고. 어떻게 이 간단한 걸 당신들은 못 보고 나 혼자 보는 거지?”
임원들은 잠시 말이 없다가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진석의 결정이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금융 그룹 회장이 되었지만, 증권사는 권오준 대표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그쪽 임원들과 내부 회의를 통해 이끌어 낸 결과가 아니었을지······.”
“아니야. 이건 아무리 봐도 이진석 콜이야. 내가 볼 땐 분명히 우리가 놓친 게 있어. 그러니까 지금부터 모두 이쪽 일에 달려들어. 우리가 모르는 그 뭔가가 무엇인지 찾으라는 거야. 특히 이번에 나온 만능 세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면밀히 조사해 봐.”
“예, 사장님.”
윤 사장이 확실하게 지시를 내리자 임원들은 각자 할 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윤 사장은 잠깐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권오준, 그 능구렁이한테 아양 떠는 건 싫은데.”
그렇지만 아무리 사장이란 직책을 가지고 있어도 엄연히 이곳은 일터이며, 결국 자신도 월급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윤진혁이었다.
그는 꽉 막힌 목소리를 풀고 권오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자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넉살스러운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이쿠, 권 대표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 * *
“예, 예. 그냥 내부적으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니까요? 별 이유 없습니다. 딱히 들고 있는 특별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하. 그럼, 다음에 술 한잔하시죠. 예. 들어가십시오.”
전화를 끊은 권오준은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흐흐. 이럴 때면 내가 슈퍼스타가 된 기분이라니깐? 아주 전화기에서 불이 나겠구먼.”
“이번엔 어디입니까?”
“KV 증권사 사장이었습니다. 아시죠? 오 회장이 그쪽 사장 목을 확 쳐 버려서 바로 밑에 있던 윤진혁이란 사람이 사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벌써 다섯 통째다.
증권사 사장들이 아주 불나게 권오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목적은 똑같았다.
왜 갑자기 우리 J&H가 모든 줄기세포 관련주를 처분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그럴 때마다 권오준 대표는 천기누설을 하는 것처럼 조용히 대답을 했다.
모든 건 회사 내부 자금적 이유로 투자를 철회한 것이라고 말이다.
당연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멍청이는 없었다.
“회장님 덕분에 제가 매번 인기 연예인 된 듯한 기분을 다 만끽하네요. 이상하게 다들 회장님한테는 전화를 하지 않고 저한테만 한다니까요?”
“그쪽 사람들이 제 번호를 모르기 때문이죠.”
“하하. 이쪽 바닥 잘 아시지 않습니까. 번호 하나쯤이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죠. 회장님 개인정보도 마음만 먹으면 털어 갈 수 있는 놈들입니다.”
예전에는 상대방의 개인정보를 얻으려면 많은 작업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디지털화가 되어 있어서 얼마든지 해킹을 통해 상대방의 정보를 빼내 올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래서 사실상 주민등록번호는 거의 쓸모가 없어졌고 지문이나 홍채 등을 활용한 생체 인증이 점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중이다.
“요즘은 카메라 화질이 계속 좋아져서 생체 인증도 똑같이 카피해 써먹을 수가 있답니다. 참 무서운 세상 아닙니까?”
정말이지 어느 순간부터 세상이 무섭도록 빠르게 발전을 한 것 같아 때로는 정신이 없을 정도다. 아직은 젊은 축에 속하는 나도 이럴진대, 나이 40을 넘긴 권오준은 오죽하겠는가.
“어휴. 이거 또 전화가 왔네요.”
“편하게 받으세요.”
나는 권오준이 편하게 대화할 수 있게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었다.
어차피 며칠 동안은 회사에 나올 필요도 없었다. 그저 집에서 뒹굴거리며 줄기세포 관련주가 어떻게 변동되었는지에 대해서만 보고를 받으면 된다.
내가 다시 회사에 나오는 날은 줄기세포의 혼란이 끝났을 때다.
* * *
13일째부터 메이저 금융사들도 만능 세포 논문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물량을 시장에 대량 내놓기 시작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메이저 금융사들이 동시에 그런 짓거리를 하자 시장은 그야말로 폭풍 아래 파도처럼 요동쳤다.
13일 동안 무려 290%나 상승했던 주가는 빠르게 하락세를 탔고, 금융사들은 손절을 하기 위해 언론 플레이를 펼쳤다.
[줄기세포 관련주, 드디어 과도기? 전문가들, 잠깐 쉬어 가는 타임.]
[평균 10% 하락한 줄기세포 관련주. 지금이야말로 매수 적기다.]
[브레이크 타임? 아니면 이대로 연속 하락?]
[줄기세포 관련주 다시 오른다. 전문가들의 연이은 긍정적 평가.]
13일 동안 단 한 번의 하락도 없이 미친 듯이 상승만을 거듭하던 줄기세포 관련주가 드디어 꺾이면서 개미들은 손절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버텨야 하는 건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증권사들이 뿌린 언론 플레이에 넘어가 쏟아져 나오는 물량을 매수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냥 그 자리에서 우직하게 버티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15일째.
[실험 검증 이틀 남기고 하루카 박사 잠적.]
[만능 세포 논문 조작으로 밝혀져. 충격!]
[캘리포니아 주립대 하루카 공식 비난. 논문 조작은 줄기세포 연구에 큰 해를 끼치는 일.]
[일본만 믿고 투자에 목숨을 걸었던 개미들. 이제 어쩌나?]
[만능 세포는 현대 기술로 불가능해. 전문가들의 이어지는 비판.]
이틀 전만 하더라도 칭찬 일색으로 투자 과열을 불러일으켰던 언론사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논문이 조작되었다는 속보를 내놓았다.
또한 전문가들도 여러 등장해, 처음부터 만능 세포라는 게 현대 과학으로 가능할 수 없는 것이라며 저런 뻔한 거짓말에 넘어간 사람들을 비판할 정도였다.
불과 이틀 만에 확 달라진 온도 차.
그 냉혹한 현실을 주식 시장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하루카 박사로 인해 신세계가 열렸다고 떠들어 대던 전문가들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듯이 행동했고, 줄기세포 관련주에 투자만 하면 노후를 걱정할 필요 없다며 꼬드긴 증권맨들도 입을 싹 닫았다.
“아직도 다 안 팔았어? 늦기 전에 얼른 다 매도 쳐!”
“이거 남기면 우리 이번 분기별 성과급 없는 거 알지? 당신들 주머니가 걸린 일이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팔아!”
“고객들한테 다 떠넘겨! 저거 다 거짓 뉴스라고, 지금 가격이 확 내려갔을 때 사야 한다고 설득을 하란 말이야!”
각 증권사들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이리저리 물량을 끌어와 덩치만 늘렸던 증권사들의 발에 불이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들은 며칠 전부터 하루카의 만능 세포 논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J&H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매도를 하려 했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매도 물량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결국 손절을 다 하지 못한 증권사들은 어떻게든 손해를 면하기 위해 계속해서 물량을 풀어 보았지만, 지금과 같은 혼돈에 그것을 사는 투자자들은 많지 않았다.
“이런 미친······.”
“순식간에 얼마가 사라진 거야.”
그리고 20일째가 되는 날 모든 증권사가 탄식을 터트렸다.
줄기세포 관련주로 인해 순식간에 10조 원이란 돈이 증발해 버린 탓이었다.
단 며칠 만에 이 정도의 돈이 사라졌다는 건 어마어마한 투기 자본이 몰렸다는 것을 뜻하는데, 실제로 무지막지한 돈이 몰렸었고 그 돈들을 죄다 허공에 날려 버렸다.
때마침 20일째가 금요일이라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불렸다.
그렇게 모든 증권사들이 침울하게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유일하게 미소를 짓는 기업이 있었다.
J&H 증권사 직원들은 만세 합창을 하며 승리를 자축했다.
“만세! 성과급이다!!”
“들었어요? 거의 3배래요. 5천억을 단숨에 3배로 만들었으니, 우리 전부 성과급 맞죠?”
“미친. 도대체 얼마나 벌어들인 거야?”
“이거 샴페인이라도 터트려야 되는 거 아닙니까?”
딱 놓고 보면 3배라는 숫자는 그리 많지가 않다. 하지만 투자를 한 금액을 따져 보면 3배도 큰 숫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5천억을 투자해 거의 3배를 남겼다.
이 정도 규모의 돈이 들어가 짧은 시간 안에 3배를 만들어 먹는 건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다. 그리고 메이저 증권사들이 죄다 마이너스를 기록할 때 J&H 수익률을 극대화시켰으니 당연히 콧노래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J&H는 여기서 이득을 보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희대의 논문 조작 사기극에 증권사 모두 넉다운.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은 어디?]
[이번에도 J&H 혼자 승리했다. 왜 항상 그들만 승리하는가?]
[J&H 빠른 손절로 약 300% 수익률 기록.]
[메이저 증권사 고객들의 수익률을 전부 다 합쳐도 J&H를 따라가지 못한다?]
[시가 총액 10조 원 증발. 그러나 J&H만 홀로 웃었다.]
모두가 울고 있을 때 한쪽만 미소를 짓는다면 그건 오히려 적대심을 키운다. 그러나 나도 저들처럼 웃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줄 땐 적개심이 아닌, 희망을 품게 된다.
이진석은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매우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PR은 아주 잘 먹혀 들었다.
연이어 쏟아지는 J&H의 호재에 금융사 직원들은 승리를 자축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사방에서 고객들의 문의 전화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J&H의 성장이 한 발짝 더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