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52화
전 LK 금융의 임원들 중에서 권오준 대표와 함께, 나는 실력 있는 자들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전부 해고 통보를 내렸다. 이미 대다수가 그리될 운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짐을 다 빼고 나간 뒤라 구조조정에 잡음이 생기진 않았다.
그렇게 절반이 넘는 임원들을 해고했지만, 그렇다고 업무상 공백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잔류시킨 임원들의 실력이 좋아 이 상태로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매일 아침 그들을 전부 회의실에 모아 두고 짧게나마 논의를 이어 간다. 오늘의 논점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줄기세포 관련주였다.
“지금 미국도 어마어마한 투기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전부 줄기세포에 올인하는 추세이기도 하고요. 다들 사고 싶은데 나오는 물량이 없어 난리라고 합니다.”
줄기세포가 워낙 잠재 가치가 높은 연구이다 보니, 한번 뜨면 돈이 몰려들 수밖에 없다.
이미 미국과 유럽에는 줄기세포 관련주 열풍이 크게 불어 닥쳤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예전 황기석 박사 때처럼 또 한 번 패닉이 찾아오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많습니다.”
황기석 박사 논문 조작 사건 때도 줄기세포 관련주에 돈이 몰렸다가 큰 패닉이 찾아온 적이 있다. 단순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런 현상을 겪었다는 것이다.
“저희도 탑승을 하려면 지금 해야 합니다. 어디까지 고점을 찍을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하고, 이렇게 가다가는 물량이 없어 매수를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물량이 없어 매수를 못 한다는 주가는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만큼 자본이 극단적으로 한쪽에 몰린다는 뜻이겠지.
나는 덤덤하게 임원들의 보고를 듣다 마지막에 입을 열었다.
“10일.”
“예?”
“딱 10일만 돈을 넣겠습니다. 어떤 종목인지는 상관없습니다. 현재 시장에 나와 있는 모든 줄기세포 관련주에 우리 J&H가 가지고 있는 돈을 전부 다 풀도록 하죠.”
“회사 자금 1,500억에, 고객들이 우리 쪽에 넣어 놓은 돈들까지 전부 다 말입니까?”
“예. 최대한 많은 주식들을 사들이세요. 큰손들이 우리 쪽에 맡겨 놓은 돈이 얼마 정도 되죠?”
“개인정보 사태 이후 전부 다 빠졌다가 지금은 다시 어느 정도 복구가 돼서 3,500억 정도 됩니다.”
신화 금융과 비교해 봤을 땐 그리 많은 자본이 아니다.
워낙 LK 금융이 휘청거려 큰손들이 돈을 죄다 빼 간 것이 큰 타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저 돈을 몇 배로 불리면 다른 금융사 부럽지 않은 자본금이 완성된다.
“그럼 우리 금융사에 예금을 하고 있거나, 적금을 들고 있는 고객들 돈까지 모아서 해 봅시다.”
우리 J&H 금융이 은행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은행과 비슷한 역할을 맡기도 한다.
투자형 적금 통장을 고객이 개설하게 유도하여 그곳에 돈이 들어오면 우린 그 돈으로 투자를 진행해 수익률을 내고 그 이자를 고객에게 주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5천억.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가능할까요?”
“예. 가능합니다. 5천억은 문제없이 운용할 수 있습니다.”
10위권 안에 들어오는 증권사의 자산 규모를 따지면 대부분 5조 원을 넘고 5위권으로 넘어가면 평균 12조 원을 차지한다. 그러나 증권사가 그것들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돈은 어디까지나 고객이 개인 투자를 위해 예치한 금액이기 때문. 그중에서 쓸 수 있는 돈은 고객이 증권사에 대리 투자를 맡기거나, 수익형 통장에 넣어 두었을 때만 가능하다.
우리 J&H 금융도 마찬가지다.
LK 금융 사태로 인해 많은 돈이 빠져나가긴 했어도 현재 자산 규모는 5조 원이 넘는다. 그러나 그중에서 우리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래도 이번 줄기세포 관련주에 투자할 돈은 다행히 충분하다.
“그런데 회장님. 딱 10일로 기간을 정해 놓은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예. 전 이번에 발견했다는 만능 세포가 가짜라고 생각하거든요.”
“가, 가짜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 그런데 이게 가짜였다는 사실이 곧바로 공개될 리가 없죠. 그래서 대충 날짜를 산출한 것이 10일입니다. 10일 정도면 주가가 고점을 찍을 테고, 그 이후부터는 점점 논문이 조작된 게 아니냐는 의문으로 가득하게 될 겁니다. 그때부턴 치열한 눈치 싸움이 시작되겠죠.”
임원들은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가짜라고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두 개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현대 기술로는 줄기세포를 컨트롤할 수 없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제 직감입니다. 전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안 간다고 해서 눈앞의 수익률을 포기할 순 없죠. 그래서 10일만 넣어 놓은 다음, 한창 열이 올랐을 때 죄다 팔아 버리자는 겁니다.”
전문가의 조언을 받았다는 말에 임원들의 표정이 풀어지긴 했지만, 두 번째 이유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뭐, 의견이라는 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너무 굳은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탄없이 의견을 내주세요. 상황이 바뀌면 저도 언제든 생각을 바꾸겠습니다.”
그러자 임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빛을 싹 바꿨다.
“하하. 저희가 언제 굳은 표정을 지었다고 그러십니까. 회장님의 의견이라면 적극 찬성입니다.”
“예. 회장님의 뜻이니, 당연히 따라야죠. 거기다 회장님 말씀대로 애초에 일본 놈들은 믿음이 안 갔어요.”
나는 임원들의 반응을 잘 살펴보았다.
대다수는 내 기분에 맞추려고 자신의 의견 따위는 아예 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든 아양을 떨어 자리를 보전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중 몇몇은 현실을 직시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투자라는 것이 단순히 직감으로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조금 더 명확한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회장님을 못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식 시장의 흐름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더 자세한 정보를 산출해서 보고해 드리겠습니다.”
그 몇몇 임원들은 높은 사람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닌, 일단 자세히 파고들어 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저런 사람들은 승진을 목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주식 시장을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진정한 실력파라고 볼 수 있다.
난 내게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 임원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 둔 뒤 회의를 끝냈다.
아직 구조조정이 완벽하게 끝난 것이 아니다.
회사가 회복기에 들어서고 있을 때 바싹 긴장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임원이라는 직책이 보통 1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하지 않던가.
나도 우리 회사를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정말 치열하게 경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정글 같은 곳으로 만들 것이다.
* * *
“어후. 살 떨려라.”
“웃는 얼굴로 말씀하시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맞아요. 저희 회장님이 분위기 하나는 끝내주게 잘 잡으신다니까요?”
회의가 끝나고 이진석 회장이 자리를 비우자 임원들은 그제야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아직 구조조정이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생존을 위한 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김 이사는 모가지 날아가는 게 두렵지 않은가 봐. 회장님한테 그런 직설을 다 하고.”
아까 겁도 없이 회장에게 직언을 한 것이 김 이사였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회사가 망하면 자리고 뭐고 없지 않습니까. LK 금융이 나락으로 떨어져서 임원들 절반이 숙청당했잖아요.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죠. 자리 지키려고 회사 망하는 걸 가만두고 보진 않을 겁니다.”
그 말에 다른 이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LK 금융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이들은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이지 않던가.
가장 큰 원인은 LK 그룹 내에서 벌어진 전쟁 때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임원들 중 하나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권오준에게 물었다.
“권 사장님. 이 회장님이 원래 저런 스타일입니까?”
“어떤 거요?”
“제가 아까는 면전에 대고 말씀을 드리진 못했지만, 회장님께서 정확한 데이터를 보기보다는 직감에 따라 투자를 하신다는 것이 좀······.”
“그냥 뒤에서 말할 게 아니라 속 시원하게 앞에서 말씀을 하지 그러셨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어리셔도 엄연히 회장님이시자 않습니까. 감히 앞에다 대놓고 그리 말한다는 건 어렵죠.”
권오준은 힐끗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임원들에게 말했다.
“저희 회장님의 투자 실력이 우리나라에서 따라잡을 자가 없다는 건 다들 알고 계시죠?”
“뭐, 그거야 유명하지 않습니까. 불패의 신화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요.”
“예. 원래 저런 분이십니다. 정확한 데이터 중요하죠. 하지만 전 회장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통찰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정보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것까지 파악하는 통찰력으로 투자를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결과는 매번 좋았고요. 앞으로도 이런 일이 참 많을 겁니다. 그때마다 몸을 사리시기보다는 냉정한 조언과 평가를 해 드리는 것이 여러분의 일입니다.”
권오준은 이진석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성과를 중시하며 쓸데없는 아부보다는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분석하는 것을 좋아한다. 설령 그것이 윗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라도 말이다.
신화 금융에서 말단 사원으로 일할 때도 이진석은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의 소신대로 성과를 만들어 내지 않았던가.
“저 같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사무실로 돌아가 회장님의 분석이 정확한지, 아니면 틀린 건지 알아볼 것 같군요. 너무 안심하고 계시면 안 됩니다. 구조조정은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거든요.”
“······.”
그 말을 듣고 임원들은 더 이상 잡담을 늘어놓지 않고 하나둘 빠르게 회의장 밖을 나서고 있었다. 다들 실력이 없어서 조언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리보전을 못 할까 겁이 나서 능력 발휘를 하지 못했을 뿐.
지금처럼 등을 떠밀어 주면 충분히 밥값은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나도 떨리는데 저 사람들은 어떻겠어?”
티는 내지 않았지만, 권오준도 이번 투자에 여러모로 걱정이 많았다.
이진석의 직감과 그 실력을 믿는다고 자신 있게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저 임원들보다 더 떨고 있는 중이었다.
10일만 투자를 했다가 치고 빠진다는 계획은 좋으나, 만약 10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주가가 상승하여 고점을 찍는다면 J&H에 가입한 고객들에게 많은 원성을 들을 수도 있다.
다른 금융사들은 전부 줄기세포 관련주에 투자를 해서 돈을 크게 벌었는데, 왜 J&H는 그러지 못했느냐는 원성.
이 원성이 쌓이면 실적으로 직결될 것이고, 실적이 나빠지면 빚을 감당할 수가 없어 결국 J&H는 금융권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럼, 이진석이란 금융계 불패의 신화도 함께 없어지게 된다.
“나도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지.”
권오준도 임원들처럼 서둘러 사무실로 달려갔다.
사장이라고 해서 구조조정의 칼이 자신의 목을 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