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48화
국가 기관의 지분이 크게 섞여 있는 만큼, 이번 입찰은 정부의 주관하에 이루어진다. 또한 부채를 들고 있는 여러 은행과 채권단이 한자리에 모여 입찰 시작을 알렸다.
“입찰 금액을 총 2조 원으로 쓰셨던데, 그에 따른 배분율을 알고 싶군요. 2조 원을 한꺼번에 지불할 계획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예. 현재 저희 J&H에서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은 총 6천억입니다. 나머지 금액은 대출과 채권을 통해 갚아 나갈 생각이고요. 만기일은 1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으음-.”
이들에게는 결코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만기일 10년짜리 대출과 채권으로 빚을 갚아 간다는 건 그동안 이자도 충실히 다 내겠다는 뜻이 되니까. 은행과 채권단으로서는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존 LK 금융이 가지고 있는 3,500억의 부채도 감당하셔야 합니다.”
“그것 역시 인지하고 있습니다.”
3,500억이면 큰 숫자이지만, LK 금융의 규모를 봤을 때 그다지 높은 부채 비율은 아니었다. LK 그룹도 초반에는 LK 금융을 한번 살려 보려고 돈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부채율이 낮아진 건데, 지금은 감당할 수가 없어 매물을 내놓은 거라 볼 수 있었다.
분위기로 보아 별로 어렵지 않게 매찰이 진행될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J&H 말고는 아무도 LK 금융을 품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엣콤 뱅크는 투기 자본 논란으로 게임에서 빠져 버렸으니, 다시 돌아올 수도 없었다.
즉, 누가 여기서 돌을 던지지 않는 한 입찰은 금방 끝이 날 것이다. 저들도 얼른 일을 끝내고 각자 축하연을 열고 싶어 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난 여기서 쉽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저기, 그런데 말입니다.”
내 말에 조용히 회의를 하는 척하던 채권단과 은행 측 임원들이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2조 원은 너무 큰 금액인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LK 금융은 지금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수많은 고객들이 떠나고 있죠. 신뢰도 잃어버렸고요. 그런 곳을 다시 일으키는 데에는 분명히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그런데 당장 1조 4천억··· 아니지. 1조 7,500억의 부채를 감당해야 합니다. 정상적으로 금융사가 돌아갈 거라 생각하십니까? 어떤 조작 세력이 작정하고 대형공매를 쳐서 회사 주가를 흔들어 놓으려고 하면 저희는 주가 방어 때문에 헛돈을 쓰게 될 것이고, 결국 무너지게 될 겁니다.”
대형공매.
조작 세력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공매도라는 것은 주가 하락이 예상되는 주가를 빌려서 팔고 나중에 실제로 주가가 내려가면 다시 싼 값에 사들여 빌린 주식을 갚아 이익을 남기는 투자 기법이다.
이런 방법으로 자본금이 부족한 회사를 흔들어 주가를 폭락시켜 이익을 남기게 되는데, 이게 사태가 커지면 잘 나가던 회사 하나가 고꾸라질 때도 있다.
해외 자본금에 의지를 많이 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 특성상 공매도를 모두 금지해 놓았는데, 2009년에 차입 공매도를 가능하게 다시 법을 바꾼 상태다.
이로 인해 여러 조작 세력들이 대형공매를 통한 주가 폭락으로 돈을 버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LK 금융같이 규모가 큰 지분을 건드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 공매도를 치긴 어렵지만, 정말 큰손들끼리 뭉쳐서 나선다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 그 얘기를 꺼내는 건 좀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다.
“공매도라니요. 다른 곳도 아니고 누가 LK 금융을 대형공매 쳐서 주가를 폭락시키려 들겠습니까? 이미 충분히 폭락했는데요?”
임원들 중 하나가 황당하다는 듯이 반박했다. 그러면서 내가 파 놓은 함정에 알아서 빠져 주었다.
“바로 그겁니다. 직접 말씀을 해 주셨네요. 아시다시피 LK 금융 그룹에 있는 모든 주가가 폭락했습니다. LK 그룹이 서로 싸우느라 금융사가 흔들린 것도 있고,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이 결정타였죠.”
“그것 때문에 3조 원까지 가는 LK 금융을 2조 원이란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매각하려는 겁니다. 그걸 잘 아는 분이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저희 쪽 분석은 다릅니다. LK 금융이 3조 원의 가치까지 간다는 건 옛날 일이죠. 지금은 2조 원보다 더 아래인 1조 7천억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 3천억을 더 깎아 보겠다는······.”
“저희도 괜한 모험을 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저희 내부에서도 괜히 폭탄을 안고 가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작은 규모의 회사들을 인수해서 천천히 키워 보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들이 많더군요.”
임원들은 지금 이 새끼가 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가 싶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 감당 가능한 금액을 산정해 보니, 1조 7천억이었습니다. 이게 안 된다고 하면 저희도 어쩔 수 없네요. 입찰은 없던 거로 하겠습니다.”
아예 입찰 포기 선언까지 하자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이보세요, 이진석 이사님.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여기서 판을 엎자고요? 그럴 거면 왜 2조 원을 써서 내놓은 거예요?”
“죄송합니다. 제가 순간 젊은 혈기를 못 이겨 판단력이 흐려졌었나 봅니다. 막상 현실을 마주해 보니, 도저히 그 많은 부채를 갖고 LK 금융을 이끌 자신이 없네요.”
기자 회견 때만 하더라도 5년 안에 최정상으로 올려놓겠다고 선언했던 놈이 갑자기 와서 태세를 돌변하니 임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을 터.
잠깐 침묵이 흐르고 내 신호에 권오준 대표가 나섰다.
“자자. 이제 여기까지 왔으면 대승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승적인 결단이요?”
“예. LK 금융을 이번에 매각시키지 못하면 LK 그룹도 결정을 내려야 할 겁니다. 어차피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는 애물단지이니 차라리 파산을 시켜 버려서 최대한 이득을 챙기자고 말입니다.”
“파산이 쉬운 줄 압니까? 그랬다가는 LK 그룹 전체가 흔들리게 될 텐데?”
“그렇게 해서라도 이득을 챙기는 게 그룹의 생존 방법이지 않습니까? 다들 전화부터 돌려 보세요. 일단 각 은행장님들의 허락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우리 회사 말고도 입찰 경쟁에 새로 참여할 기업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 자리를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LK 금융은 아무도 사려 하지 않는다.
그 안에 있는 계열사 한두 개라면 모를까, LK 금융 그룹을 통째로 삼키는 건 어느 곳이나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는 저들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이틀 전에 만난 오 회장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저들은 나한테 파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을 것이다. 이대로 놔두다가는 정말 LK 금융이 파산을 해 버려 어마어마한 손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까.
나와 권오준 대표는 일단 회의실을 나와 저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시간을 주었다. 그동안 우리는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들이켜며 새로운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 * *
“LK 금융사 매각 일정이 연기되었습니다. 채권단과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입찰을 취소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인데, 이로 인해 LK 그룹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입찰에 자신감을 드러냈던 J&H는 LK 금융의 경영 악화와 무거운 채무 비율로 입찰을 연기하게 되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우리가 값을 깎아 달라고 하자 저들은 그런 술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듯 아예 입찰을 연기해 버렸다.
“이거 괜히 가격을 후려친 거 아니야?”
현식이부터 회사 직원들도 우려를 드러냈다. 하지만 난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괜찮아. 취소가 아니라 연기잖아. 정부가 구태여 ‘연기’라고 강조한 이유가 뭐겠어? 우리 말고는 LK 금융을 품을 곳이 없으니까 저런 말을 쓴 거야. 무작정 깎아 줄 순 없으니까 밀당해 보자는 거지. 그렇죠, 권 대표님?”
“으음······. 솔직히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생각이 같을 줄 알았던 권오준 대표에게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3천억은 좀 도둑놈 심보이긴 했습니다. 그 정도의 금액을 후려치면 저쪽도 발끈할 수밖에 없죠. 가뜩이나 3조 원이 넘는 가치를 가진 금융사를 2조 원에 파는 것도 화가 나 죽겠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대표님도 이번 입찰이 이대로 끝날 거라 보시나요?”
“저 혼자였다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결정을 내리신 건 이사님이니 입찰 성공에 걸겠습니다.”
리스크는 있지만, 이번 도박은 충분히 걸 만했다.
오 회장도 가격을 후려칠 가능성이 높으니 내게 도와주겠다는 말을 꺼낸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굳이 오 회장의 인맥이 아니더라도 권 대표 정도라면 임원들을 어느 정도 요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제가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려 보긴 했습니다. 조만간 저쪽에서도 결과가 나올 겁니다.”
양념은 다 쳐 놓았고, 이제 결정을 내리는 건 저쪽 양반들의 일이다.
그리고 사실 LK 금융 입찰에 실패한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채권단에게 말했던 것처럼 만약 금융사 입찰을 포기하게 되면 다른 작은 회사들을 인수해 서서히 크기를 늘려 가면 될 일이다.
물론, LK 금융이 꼭 입찰되었으면 한다.
이 정도 규모의 기업을 2조 원도 안 되는 돈에 사들인다는 건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이니까.
* * *
“최종 1조 7천2백억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물리려 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들의 뜻을 잘 헤아려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LK 금융을 잘 키워내도록 하겠습니다.”
임원들은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최종 결정이 난 금액은 1조 7천억에 2백억을 더했다. 처음엔 저들이 1천억을 추가로 불렀는데, 나와 권 대표가 끝까지 버티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2백억까지 깎은 것이다.
아마 날 지독한 새끼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 그러나 저들은 다른 선택 사항이 없었다.
나 말고는 LK 금융을 감당할 만한 곳이 없는 것이다.
다른 금융사들이 미쳤다고 저걸 삼키려 들겠는가.
KV 그룹과 같이 몇몇 계열사를 가져와 소화시키는 것 말고는 LK 금융 전체엔 관심이 없었다.
“이것으로 LK 금융은 J&H의 소속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억지로 박수를 치며 나와 악수를 나누었다.
“J&H 금융 그룹의 발전을 기대하겠습니다.”
“예. 오늘의 선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걸 5년 안에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오늘 계약을 맺은 게 신의 한 수였다는 걸 깨닫게 되실 겁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모두 미소를 지었다.
내가 여기서 판을 엎었다면 이들은 최악의 사태를 겪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으나 결국 LK 금융은 J&H에 인수되었고, 내가 다른 금융사들보다 돈을 벌어들이면 이들도 큰 이익을 보는 것이다.
나는 권 대표와 같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언론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퇴장했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는 체감할 수 있었다.
신화 금융의 말단 신입으로 시작한 나는 LK 금융사까지 삼킨 그룹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스스로 다잡았다.
대한민국 금융사를 모두 뛰어넘는 그날까지 멈출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