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47화
입찰 경쟁이 끝났음을 알게 된 이후, 우리는 무작정 기뻐하기보다는 앞으로의 일을 위해 밤새 회의를 이어 나갔다.
그냥 일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2천 명이 넘는 직원들을 이끄는 금융 그룹을 내 손에 넣게 되는 일이다.
LK 금융 그룹.
LK 증권, LK 손해보험, LK 캐피털.
메인으로는 이 3개의 금융사를 금융 지주라는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그 외에도 계열사 6개가 더 있는데, 크게 자리를 차지하는 것들은 아니다.
아무튼, 이것들을 하나로 뭉쳐 놓은 것을 금융 그룹이라 부르는데, 대부분의 증권사들은 전부 지주 회사에 묶여 있어 그룹으로 운영이 된다.
그리고 그 그룹의 지분을 국가 기관이 보통 20% 가까이 보유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지주 회사와 외국인과 개인 투자자들이다.
나는 여기서 지주 회사가 들고 있는 지분을 사들이고 이 그룹의 지배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분을 산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LK 금융이 가지고 있는 부채.
채권단과 은행과도 협상을 해야만 M&A가 끝이 난다.
M&A가 끝난 뒤에도 문제인데, LK 금융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 새로운 방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최대한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게 대응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였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나는 사무실에서 컵라면을 먹는 것이 아니라 고급 일식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야만 했다.
“카메라 빨을 잘 못 받는구먼. TV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인물이 좋아. 응?”
“감사합니다, 회장님.”
나는 무려 KV 그룹의 회장과 독대를 하게 되었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안 것인지, 비엣콤 뱅크가 인수를 포기한다는 소식이 딱 들리자마자 내게 연락을 넣은 것이다. 단둘이 만나 얘기 좀 나눠 보자고 말이다.
갑작스러운 만남이라 마음의 준비고 뭐고 없었다. 통화를 하고 15분 뒤에 오 회장이 보낸 차를 타고 이곳 일식집에 오게 됐다.
오 회장은 풍채가 커서 남을 압도하는 기운을 풍겼다. 그리고 나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눈빛을 보냈다.
“젊은 나이에 참 대단해. 신화 금융 사장도 해 보고, 거기다 지금은 7천억 자본가까지. 자네가 만약 내 새끼였으면 그냥 묻고 따지지도 않고 내 자리부터 넘겨줬을 텐데 말이야.”
오 회장은 입발림하는 말들과 함께 잡다한 이야기로 시간을 축냈다.
나는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듣다 중간에 끊어 버렸다.
“회장님. 이제 그만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응? 뭐를?”
“저와 저녁 식사나 하려고 오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안을 할 것이 있다면 하십시오.”
그 말에 실실 웃고 있던 오 회장의 표정이 달라졌다.
“음. 생각보다 성질이 급한 양반이로구먼.”
“아시다시피 제가 곧 은행이랑 채권단과 한바탕 싸워야 해서 말이죠.”
“하하. 그 깐깐한 새끼들 다루는 게 쉽지가 않지. 그놈들도 제 밥그릇이랑 실적을 챙겨야 하거든. 그래서 내가 팁 하나 줄까?”
“경청하겠습니다.”
“LK 금융을 그렇게 생으로 삼켜 버리면 탈이 나게 되어 있어. LK 그룹이 금융 쪽 한 번 잘못 건드려서 지분이 좀 많이 꼬였거든. 그래서 이런 식으로라도 처분을 하는 것이고.”
“나눠 먹자는 뜻입니까?”
“그래. 어차피 혼자 삼키려 들면 워낙 거기 규모가 크고 이리저리 꼬여 있어서 J&H가 운용하기에는 힘이 많이 들 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
LK 금융은 여러 은행에 지분을 팔고 다른 금융 그룹에도 지분을 넘겨 둔 상태라 여러모로 복잡한 것이 많다. 하지만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LK 금융 인수에 나선 것이다.
“비엣콤 뱅크가 손을 털고 떠났으니, 이제 저와 새로 거래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하하. 부끄럽지만, 맞아. 그 베트콩 새끼들이 검찰 조사 들어가니까 갑자기 확 쫄아서 발 빼는 거 있지? 투기하러 온 놈들이 배짱이 없어요, 배짱이. 이미 판을 다 깔아 놨는데, 그것들이 그렇게 빼 버리면 나만 닭 쫓던 개 신세 되는 거지.”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말은 죄송하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해 죽겠지? 그 비밀 계약서를 자네가 어떻게 챙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과거의 일이니 다 잊어버리자고. 자꾸 지나간 일 생각하면 잃어버린 돈 때문에 속만 쓰려.”
오 회장은 내게 서류 하나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만든 계약서야. 금융사를 산산조각내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 대신, 여기 있는 계열사들은 우리한테 팔아. 비싼 값을 치러 줄 테니까.”
계약서를 확인해 보니, 비엣콤과 맺었던 계약 내용과 비슷했다.
3개의 계열사를 챙기는 조건으로 일정 금액을 지불한다는 건데, KV 그룹은 그 계열사들을 집어삼켜 몸집을 키운 다음 단숨에 금융권을 장악해 나가려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LK 금융에서 이익이 되는 것을 받아 챙겨야만 한다.
나는 계약서를 대충 보고 나서 내려놓았다.
“결코 나쁜 제안은 아니야. 어차피 자네가 원하는 건 LK 증권이잖아? 증권사랑 카드사만 잘 컨트롤해도 돈을 퍼담게 되어 있어. 국가가 웬만하면 자네를 통제하려 들지도 않을 테고. 거기다 이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내가 2조 원보다 더 싼 값에 LK 금융을 삼킬 수 있게 도와주지. 어때? 아무리 생각해도 이득이지?”
흥미로운 제안이다.
인수 금액도 오 회장이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건가?
“굉장하시네요. 매각 금액을 회장님이 바꾸실 수 있다고요? 전 이미 2조 원을 써서 냈는데요?”
“어렵지 않아. 비엣콤 뱅크가 인수를 포기했잖아. 나머지 기업들도 관심 없고. 이번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사건 때문에 주가가 많이 떨어져서 이미지도 너무 안 좋아. 팔고 싶어도 팔 수가 없다는 거지.”
그렇다는 건 가격을 후려칠 수 있다는 건가?
오 회장이 내게 아주 좋은 힌트를 던져 주었다.
“하지만 내 도움 없이는 가격 후려치기 힘들 거야.”
“그건 모르는 일이죠.”
“뭐?”
“회장님. 저는 회장님이 이런 제안을 하실 거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대답도 미리 생각해 왔다는 거겠지?”
“예. 제 대답은 거절입니다.”
내 대답에 오 회장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해? KV 그룹이 자네 눈에는 우습나 보지?”
“우습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하지만 KV 그룹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급하지도 않고요. 거기다 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될 경우, KV 금융은 순식간에 성장을 해 제 금융사까지 집어삼키려 들겠죠. 뻔히 보이는 미래에 헛짓거리할 생각 없습니다.”
“자네가 인수하려는 금융사를 건드릴 생각은 없어.”
“예. 근데 저희는 철저히 약자 신세가 될 겁니다. 그러다 점점 힘 싸움에 밀려 퇴화하고 사라지겠죠. 전 그럴 생각 없습니다.”
“하! 이거 아주 재밌는 친구구먼.”
오 회장은 회 한 점을 입에다 넣은 뒤 따뜻하게 데워진 사케를 털어 넣었다.
“기자 회견은 봤어. 5년 안에 대한민국 최고의 금융사를 만들겠다? 근데 그게 쉬울 거 같나? 이 나라는 단순히 수익률만 좋다고 높아지는 곳이 아니야.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좆 같은 새끼들과 더럽게 손잡으며 분탕질을 이어 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어. 근데 자네가 그걸 하겠다고?”
“이왕 이 길에 들어선 이상, 슬렁슬렁하진 않을 겁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내가 건네는 손 잡아. 어차피 천하 그룹이 이 나라의 절반 이상을 움켜잡고 있잖아. 그런데 우리가 손을 잡으면 그 새끼들 인중에 주먹을 꽂아 넣을 수 있어.”
대한민국이 아니라 천하 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천하 그룹은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천하 그룹의 지원을 받아 판검사가 된 장학생들이 수두룩하며 정치권에서도 그들의 돈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그 정도로 거대한 그룹이 금융권에도 자리를 잡고 있는데, 천하 증권은 당연히 증권사 순위 1위이고 인터넷과 핸드폰 어플을 전문으로 고객을 끌어모아 현재 최고 거래 단위를 보여 주는 KW 증권 또한 천하 그룹의 돈으로 출자된 곳이다.
KV 그룹 회장은 아주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 먹으려 드는 천하 그룹의 폭주를 금융 쪽에서 저지하고 싶은 것이었다.
“회장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래서 대답은?”
“여전히 거절입니다. KV 그룹과 손을 잡지 않고도 충분히 대한민국 1위 금융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오 회장은 박장대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웃음기를 싹 지운 채 굳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후회할 거야. 내가 작정하고 자네 회사를 부숴 버릴 테니까.”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이 후배가 많이 배우겠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날 노려보던 오 회장은 이내 손을 저었다.
“졌다, 졌어. 요즘 젊은것들은 겁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귀한 시간을 내주셨는데···.”
“아니야. 내 미래의 적이 될 놈을 이렇게 봐두는 것만큼 좋은 게 또 없지. 이제 볼 거 다 봤으니까, 가도 좋아. 입찰 때문에 바쁠 텐데 얼른 가 봐.”
“예, 회장님. 그럼, 이만.”
나는 오 회장과 인사를 나누고 일식집을 나섰다.
말은 저렇게 해도 아직 오 회장은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만남이 전혀 실속 없는 건 아니었다.
오 회장 덕분에 난 한 가지 힌트를 얻었으니까.
“가격 후려치기라···.”
2조 원보다 조금 더 싸게 후려쳐 볼까?
* * *
“내가 저 나이 땐 뭘 하고 지냈는지.”
오 회장은 홀로 쓸쓸하게 술잔을 채우며 헛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진석.
솔직히 별로 기대는 안 했다.
젊은 놈이 남들이 모르는 라인을 타고 들어가 운 좋게 돈을 벌었겠거니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내에 있는 모든 정보망을 털어 봐도 이진석이 정부 쪽이나, 그 외에 관계가 있다는 걸 밝혀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KV 그룹의 정보망으로는 찾을 수 없는 라인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정말 아무 라인도 없는 놈이거나. 그리고 오늘 만남으로 확신했다.
“우리나라에 무시무시한 놈이 나타났구먼.”
저놈은 일종의 라인이나 연줄을 통해서 돈을 버는 놈이 아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스스로의 실력에 강한 믿음이 있다. 그런 놈일수록 제 꾀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아주 가끔 그렇지 않은 놈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꼭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괴물 같은 성과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진석은 분명히 후자였다.
LK 금융이 저놈 손에 들어가면 J&H가 얼마나 성장하게 될지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내 새끼들이 저놈 반만 닮았어도 이렇게 걱정하지도 않을 텐데.”
오 회장이 여전히 열심히 뛰는 이유는 단순히 회사를 크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그는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미래를 보는 대기업 회장이지 않던가.
자기 자식들 대에도 KV 그룹이 건재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초석을 튼튼하게 다지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진석을 만나고 나서 한층 더 미래가 불안해졌다.
저 젊은 친구는 과연 어디까지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훗날 J&H가 KV 그룹을 어떤 식으로 위협할지, 또 그 공격을 자식들이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근심이 생기는 오 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