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26화
신화 그룹 회장과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과연 그 사람이 제대로 말은 할 수 있을지도 염려가 됐다. 혹시 이건 함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병상에서 죽을 날만 받아 놓고 기다리는 신 회장이 도대체 어떻게 날 보고 싶다는 걸······.
“이렇게 와 주니 고맙네.”
내 앞에 나타난 신 회장의 모습은 멀쩡했다.
도저히 병상에 누워 있을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진석이라고 합니다.”
“음-. 뒤에 사장은 안 붙이는 걸 보니, 정말 내 회사를 훌훌 털어 내고 갈 생각인가 보네.”
신 회장은 손짓하며 내게 자리를 건넸다.
나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으면서 슬쩍 물었다.
“몸은 괜찮으신지······.”
“하하. 다 죽어가고 있다는 늙은이가 멀쩡해 보여서 놀랐나?”
예의상 아니라고 대답을 해 줘야 했지만, 워낙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뭐, 기자들이 내가 있는 중환자실까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신화 그룹에서 공식으로 발표를 해 버리면 누구든 내가 당장 내일 죽을 것처럼 생각할 테지. 내 자식들도 깜짝 속았는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안 속았겠나?”
“그 말씀은 병상에 누워 계실 정도로 아프지 않으신다는 겁니까?”
“아예 안 아픈 건 아니야. 나도 나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래도 치매 걸린 노인마냥 사리 분별할 줄 모르는 노인네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단단히 속았다.
이 영감, 진짜 무서운 영감이구나.
일부러 이런 병상 쇼를 해서 과연 누가 어떻게 움직이나 지켜보려 한 것이다.
황제가 멀쩡하게 살아 있을 때는 숨을 죽이고 있던 대신들이 황제가 죽고 나서부터는 품고 있던 칼을 뽑기 마련이니까.
황제는 그들의 행동을 살펴보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어느 날부터 우리 금융사에 어마어마한 친구가 하나 나왔다기에 내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지. 그런데 정말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참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오더군. 그리고 나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자네를 주시한다는 걸 알았지. 그중 하나가 내 둘째 녀석이고.”
“신 이사에 관한 일은······.”
“아니. 괜찮아. 자네를 문책하려고 부른 게 아니야. 그냥 정말 순수한 마음에 자네를 만나보려 한 거지. 이래 봬도 내가 자네 팬이야.”
“예?”
“하하. 이상한가? 원래 자네처럼 실력 있는 젊은이에 대한 성공담을 들을수록 나 같은 사람은 피가 끓기 마련이지. 내가 이렇게 늙었어도 속은 그렇지가 않아요. 젊었을 때랑 똑같아.”
신 회장은 비서가 내어 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말을 이었다.
“내가 이렇게 대국민 쇼를 하게 된 이유는, 이 신화 그룹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고민이 컸기 때문이야.”
“이미 지분을 전부 나눠 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지. 그런데 그 속을 파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위임만 했을 뿐, 정말 물려준 건 아니거든.”
“상속이 아니라 위임이었습니까?”
“그래. 위임이었지. 그래서 언제든 내가 다 회수할 수가 있어.”
처음부터 이 모든 건 시험이었다는 건가?
“내가 거의 죽어 간다고 소문을 흘리면 아들 녀석들이 길길이 날뛸 거라고 생각했지.”
“그중에서 가장 대처를 잘한 사람에게 회사를 넘겨주려 하셨던 겁니까?”
“맞아. 그럴 생각이었지. 그런데 이놈들 중 날 닮은 녀석이 없는 건지, 다들 몸만 사리고 있는 게 아니겠나? 그 기가 막힌 타이밍에 자네가 나타난 거야.”
“제가요?”
“금융계의 신성. 여러 주목을 받는 자네를 우리 둘째 녀석이 놓치지 않은 거지. 그게 제 무덤을 파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고.”
목이 탔는지, 신 회장은 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아주 흥미진진했어. 둘째가 로지텍에 있는 지분을 우연히 찾아내고는 그걸 가지고 국민연금과 결탁할 생각까지 했지. 만약 자네가 나서서 판을 엎지 않았다면 신화 그룹은 정말로 둘째 손에 들어갔을 거야.”
말만 들었을 땐, 꼭 둘째가 신화 그룹의 주인이 되기를 바란 것처럼 들렸다.
“실망이 크십니까?”
“그 기가 막힌 전략으로 회사를 송두리째 뽑아 가겠다는 생각이 참 기특했지. 대부분의 재벌이 그렇듯, 손에 어떻게 더러운 오물 한번 묻히지 않을 수 있겠나.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이 회사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이 있어야 쟁취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하늘은 결국 둘째가 아니라 첫째의 손을 들어 주었지.”
“하늘이요?”
“왜? 난 종교 없을까 봐? 이상하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저 하늘에 계신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게 돼. 원래 돈 버는 놈일수록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운’이야. 첫째에게는 강한 운이 따랐지만, 아쉽게도 우리 둘째에게는 그게 따르지 못했지.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해도 되고.”
하늘의 도우심이라.
피도 눈물도 없을 것만 같은 저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니까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는 신화 금융에 계속 남아 있을 생각 없나? 둘째 녀석이 패배한 이상, 첫째 녀석한테 전부 몰아줄 거야. 자네 덕분에 첫째는 죽다 살아났으니, 어떻게든 보상을 해 주고 싶어 할걸?”
“더는 회사 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신화 그룹 회장이 오른팔로 쓸 텐데도?”
“예.”
신 회장은 미묘한 미소를 띠며 내게 말했다.
“홀로서기를 할 작정인가 보구먼.”
“그럴······ 생각입니다.”
“뭐, 요즘 세상이 하도 바뀌어서 예전처럼 직장에 속박당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많지. 특히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홀로서기를 해도 괜찮을 거야. 그런데 자네도 성공해 보면 알 걸세.”
“어떤 것을 말입니까?”
“정의로운 재벌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신 회장의 눈빛이 일순 날카롭게 변했다.
“그래. 정의로운 재벌 좋지. 그런데 그게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쉬울 것 같나. 당장 연말 정산하고 세금 내려고 할 때부터 강한 유혹에 흔들려. 그뿐인가?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똥파리들이 엮이면서 같이 똥통에 빠져들자고 손짓하지. 둘째 녀석의 경우도 그래. 국가 기관의 돈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실현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지만, 알게 모르게 성행하고 있지.”
정치권과 연루되어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경우는 정말 빈번하게 일어난다.
얼마나 부정부패가 심하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매번 그에 대한 비판을 하고 나설까.
“나도 한때는 그런 짓을 하지 않고도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 자신했네. 그런데 점점 몸집이 커지다 보면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적인 조건이 되고 말지. 자네도 홀로서기를 시작하고 부를 쌓으면 쌓을수록 그 순간이 반드시 오게 될 거야.”
검찰청에서 나는 정의로운 재벌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
그걸 듣고 지금 신 회장이 내게 조언을 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적인 조건.
정말 이 나라에서 재벌이 되어 성장하려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건가?
“아. 또 버릇처럼 꼰대 같은 소리를 했네. 그냥 그 젊은 나이가 부럽기도 하고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게 기특하기도 해서 조언 아닌 조언을 해 줬네.”
“아닙니다. 많은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회장님의 말씀, 꼭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런 순간이 오면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하하. 누가 보면 벌써 재계 순위 10위에 들어간 줄 알겠네.”
말하고 보니 또 그렇다.
순간 낯이 부끄러웠으나, 신 회장은 동네 옆집 아저씨처럼 푸근하게 말을 이었다.
“아차. 그런데 자네 혹시 두부는 먹었나?”
* * *
“이거 정말 아쉽네. 내 동생이 더 이상 진석 씨를 해코지할 수도 없을 텐데.”
“제 일은 딱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도 내부 고발이지 않습니까. 회사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제가 나가는 게 맞습니다.”
내부 고발은 정의로운 일이나, 결코 회사로 돌아갈 순 없다.
거기다 신 이사의 해코지도 걱정되진 않는다.
신 회장이 그거 하나만큼은 아무 일도 없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재벌 회장의 약속이니, 더더욱 신뢰가 간다.
“으음. 그럼, 이건 어떤가?”
신 부회장은 내게 계약서 하나를 건네주었다.
“거기 공란 보이지? 거기다 원하는 금액을 쓰게. 내 최대한 연봉을 맞춰 줄 테니까.”
이 공란에 액수를 적는 대로 연봉을 주겠다는 뜻인가.
100억을 준다고 해도 갈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인정을 받는 것 같아 썩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괜찮습니다, 부회장님. 저 말고 권오준 전 사장을 다시 불러오십시오. 능력 있는 분이니까요,”
“음. 권 사장의 능력이야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나저나 우리 진석 씨, 진심인가 보네.”
“예?”
“현식이 그 친구가 그랬거든. 진석 씨는 대기업 회장 못지않게 분명 커질 거라고. 정말 그럴 생각인가?”
“하하. 제 친구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요.”
“아니야. 오히려 지금 나는 최대의 경쟁자를 이대로 놓치는 건 아닌가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으니까.”
신 부회장은 계약서를 거두었다.
“하지만 나한테 신화 그룹을 안겨 준 사람이니까, 그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순 없지.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이진석 씨.”
부회장은 내게 손을 건넸다.
나는 그 손을 맞잡으며 부회장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런 뒤 모든 짐을 가지고 금융사를 나서려 했다.
“사장님!”
그런데 많은 직원들이 도열해 있는 것이 아닌가?
“다들 일 안 하고 여기서 뭐 하세요. 곧 있으면 장 오픈인데.”
“그동안 사장님 덕분에 저희가 보너스도 두둑이 챙기고 실적도 어마어마하게 쌓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그냥 보내 드리면 저희가 뭐가 됩니까!”
“맞아요. 사장님. 작별 인사라도 해 주셔야죠.”
“너무하세요.”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마지막 회사 생활의 모습은 결코 실패하지 않은 듯 보였다.
“혹시라도 회사 다른 곳으로 옮기시면 저희도 그쪽으로 따라가겠습니다!”
“아직 배울 게 너무 많습니다, 사장님.”
“마음 바뀌시면 다시 신화 금융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서로 정을 많이 쌓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떠나려니 속에 울컥한 감정이 느껴진다.
이들의 도움 덕분에 회사 생활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쯧쯧. 그냥 울어라, 인마.”
“아니거든. 그냥 눈에 뭐 들어간 거야.”
나는 직원들과 가벼운 송별회를 마치고 나서 현식이 차에 올라탔다.
현식이는 익살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흐흐. 그럼, 우리도 곧 있으면 장 오픈하는데 얼른 사무실로 가야겠죠, 대표님?”
“잠깐. 사무실? 무슨 사무실?”
해외에 법인을 세워 놓기는 했으나, 우리가 일할 공간을 아직 만들어 두진 않았다. 그런데 사무실이라니?
“이 형님만 딱 믿고 있어. 출발한다.”
이 기특한 놈이 벌써 사무실까지 차려 놓았나.
안 그래도 집에서 노트북 가져다 놓고 일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우리 현식이가 참 많이 달라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