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22화
“사장이 됐다고 해서 이제 좀 편해지나 했더니, 주말에도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구나.”
“엄마. 사장이 됐다는 건, 돈 더 줄 테니까 그만큼 더 많이 부려 먹겠다는 뜻이야. 직책은 사장이지만, 내 회사가 아니잖아.”
주말에는 거의 매번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머문다. 그런데 사장이 되고 나서 주말에도 전화를 받으며 일을 해야 하는 처지라 어머니는 날 안쓰럽게 바라보셨다.
“일은 괜찮니? 네가 그 큰 회사의 사장이 됐다는 게 아직도 이 엄마는 믿어지지 않아.”
“저번에도 말했잖아. 잠깐 머물다 가는 거라고. 거기다 지금 당장 일 그만둬도 먹고사는 데에는 지장 없어요.”
“요즘 정말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로또 1등에도 당첨되고, 금융사 사장도 되고. 돌아가신 네 아빠가 도와주는 게 아닐까?”
내가 중학생 때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
삶이 고단하고 우울할 때마다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그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쩌면 어머니 말대로 아버지가 우릴 도와주는 것일 수도.
“이제 이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어. 주말에는 엄마 곁에 꼭 붙어서 있어야지.”
“안 그래도 돼. 제발 병원은 그만 오고 너도 주말에는 밖에서 좀 놀아. 이제 엄마 괜찮아. 의사도 곧 퇴원해도 된다고 하잖아. 넌 여자 친구 없니?”
“그런 게 어디 있어.”
“설마, 너 아직도 유리를 못 잊어서 여자 안 만나는 건 아니지?”
“에이.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벌써 2년이나 지났어.”
“보통 젊은 애들은 헤어지면 일주일도 안 되었다가 새로 또 만난다던데. 너도 이제 제발 엄마 걱정은 그만하고 여자 만나면서 젊음을 즐겨. 너무 일에만 치중하지 말고.”
언제 여자 만나서 결혼하냐는 잔소리가 나올 법한 나이가 됐긴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모든 친척들이 우리와 연을 끊었기 때문에 명절마다 모이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명절마다 듣는 잔소리를 이렇게 매주 병원에서 듣게 됐다.
“아이고, 어머니.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한창 그렇게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듣고 있을 때쯤.
현식이가 또 양손에 뭔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나타났다.
현식이 이놈은 보통 2주에 한 번씩은 이렇게 어머니가 있는 병실로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병실 안에 있는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떠난다.
“현식이 너도 왔어?”
“하하. 우리 어머니, 저 안 보시면 섭섭해하시니까요.”
“괜찮아. 그리고 제발 부탁이니까 우리 진석이 데리고 나가서 여자 좀 소개해 줘라.”
“여자 소개요? 우리 어머니 아직 아들을 잘 모르시는구나.”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흐흐. 진석이한테 관심 있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대시한 여자들도 꽤 될걸요? 그런데 저놈은 무슨 돌부처라도 되는지, 한 번을 안 넘어갑니다, 한 번을.”
그 말을 듣고 어머니의 화끈한 등짝 스매시가 날아왔다.
“이놈의 자식. 내 그럴 줄 알았어!”
“최현식. 넌 또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냐? 그래서 말인데, 너 혹시 여자 말고 다른······.”
“입 닥쳐.”
현식이 덕분에 나는 또 30분 동안 반복되는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병원 밖을 나올 수 있었다.
“내게 너 때문에 못 산다.”
“어머니가 틀린 말씀 하신 것도 아니잖아.”
“됐어. 지금 내가 여자 만나서 뭐 해. 거기다 곧 있으면 제대로 한 건 터트려야 하고.”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이틀 뒤.
다음 주 화요일에 신화 그룹의 새로운 주인이 결정된다.
나는 잠깐 타이밍을 보다 슬쩍 현식이에게 말했다.
“현식아. 우리 법인 회사 있잖아. 아직 이름도 안 정했고, 비율 산정도 안 해 놓았지?”
“어. 아직은.”
“잘됐다. 여기서 결정하자.”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걸고 만드는 법인을 이런 국밥집에서?”
나는 국밥을 뜨던 숟가락을 세게 내려놓았다.
“아니면 언제 정해? 지금 아니면 안 돼. 언제 짬 내서 그걸 하고 있어. 여기서 끝내.”
“뭐, 그래라, 그럼. 회사 이름은 뭐로 할 건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너랑 내 이름 걸면 되잖아. J&H 어때?”
“H&J라고 하면 싫다고 할 거냐?”
“가위바위보 하든가.”
나는 주먹을 냈고, 현식이는 가위를 냈다.
그렇게 회사 이름이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정해졌다.
“제일 중요한 지분율은?”
“음. 이건 각자의 역할을 잘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우리가 정말로 이 회사를 빡세게 운영한다 쳐. 그럼, 넌 투자 결정권을 누구한테 줄 거냐?”
“그야 당연히 진석이 너지. 너 지금 금융계에서 완전 선무당이잖아.”
“그치? 그럼 50 대 50은 불공평한 감이 있겠네?”
그 말에 현식이가 움찔거렸다.
“그, 그렇겠지?”
“내가 더 많이 갖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앞으로 우리 회사가 얼마나 커질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만약 다른 금융사들처럼 덩치가 커진다면 이 지분율이 갖는 힘은 커. 누가 투자 전권을 갖느냐의 뜻이니까. 무슨 말인지 잘 알지?”
현식이는 금방 이해를 해 주었다.
“알아. 별로 불공평하다 생각하지도 않아. 까 놓고 말해서, 우리가 정말 회사 운영하게 되면 나는 해 봐야 네 심부름밖에 없을지도 모르니까. 난 너처럼 그런 기가 막힌 투자 감각을 갖지 못했거든. 그냥 너 혼자 회사 세워서 운영해도 되는 걸, 나 끼워 주는 것만 해도 엎드려 받아야지.”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는데······.”
“아니야. 네 말대로 지분율 7 대 3으로 나눠. 그리고 너무 경영에 스트레스 안 받아도 괜찮아. 돈 다 잃어도 돼. 내가 또 투자해 줄게. 아참. 그땐 지분율 다시 조정해 버릴 거다.”
“아, 예. 그러셔야죠, 물주님.”
종종 까먹는다.
이놈이 돈 무진장 많은 집안 아들이라는 걸.
근데 정말 투자금 다 날리면 또 투자해 주려나?
“안 되겠다. 한잔하자.”
오늘은 술을 안 마시려 했지만, 법인이 설립되었다는 말에 도저히 안 마실 수가 없었다.
우린 가볍게 소주 한 잔씩 따라 잔을 맞췄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 대표님.”
“그래. 내가 대표구나. 그럼 넌 뭔데?”
“응? 난 그냥 대주주.”
“그게 더 높은 거 아니냐?”
“그런가? 흐흐.”
우리는 서로 잔을 부딪치며 J&H의 밝은 미래를 빌었다.
부디 모든 것이 바로 세워지고 내가 무사히 J&H를 이끌 수 있기를.
* * *
예전처럼 새벽 일찍 회사에 출근하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집에서 조금 여유를 부리며 잔업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오늘은 다른 잔업들보다 좀 더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
“넷컴뷰, 최하영 기자님 되십니까?”
“예, 제가 최하영인데요.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저번에 인터뷰를 해 주셨던 이진석 사장입니다.”
스마트폰 너머로 ‘어맛!’ 하며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이진석 사장님이세요?”
“예. 제 목소리 벌써 잊으셨나 보네요.”
“아, 아니요.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지금 세상에서 제일 인터뷰 따기 힘든 분이 이진석 사장님이시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저한테 어쩐 일로······.”
“저번에 주신 명함으로 전화를 드린 겁니다. 제가 어젯밤에 기자님 메일 주소에 파일 몇 개를 보냈습니다. 그걸 좀 확인해 주셨으면 하는데.”
아마추어가 아니라면 내가 보낸 게 보통 파일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을 것이다. 그녀는 잠깐만 기다려 달라며 어디론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정말 사실인가요? 신화 그룹이 합병을 진행하고 있어요?”
“예. 제가 진두지휘를 하고 있는 프로젝트입니다. 잘 보시면 알겠지만, 정치권과도 깊이 관련이 되어 있는 엄청난 사건이죠.”
“이걸 저한테 주신다는 건······.”
“당연히 터트려 달라고 드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일 오후 1시. 그때 딱 터트려 주세요. 넷컴뷰라면 이 사건을 큰 이슈로 만드는 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무, 물론이에요. 지방 신문사라도 이 정도 사건이면 어마어마한 이슈가 될 거예요.”
“그럼, 기자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자, 잠시만요!”
그녀는 전화를 끊으려는 나를 붙잡았다.
“왜 저한테 이걸 주시죠? 저 말고도 더 대형 신문사가 있었을 텐데.”
“음······. 첫째는 넷컴뷰라는 클린한 언론사를 믿었고, 둘째는 최하영 기자님과 처음 인터뷰를 한 인연 때문이랄까요?”
“그러셨구나······. 제가 엄청난 빚을 진 거 같네요. 이거 터지면 사장님도 타격이 심하실 텐데요? 괜찮으시겠어요?”
“전 괜찮습니다.”
“그, 그럼 다음에 한번 꼭 만나 뵐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제가 바, 밥이라도 사 드릴게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니요. 제가 꼭 신세 지은 걸 갚아야겠어요!”
밥을 사 준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기삿거리를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예. 다음에 꼭 사 주세요.”
물론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을진 모르겠다.
나는 기자와 통화를 종료하고 회사가 있는 여의도가 아니라 온갖 재벌들이 모여 산다는 한남동으로 향했다.
“언제 한번 차를 사긴 해야겠네.”
로또 1등에 당첨이 되었지만, 이제까지 그 돈을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차 한 대를 사지도 않았다.
시간이 없기도 했고, 아직까지 차를 꼭 사야겠다는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좀 사긴 해야겠다.
“허허. 내가 오늘 아침에 약속이 있었는데, 아주 귀한 손님이 오신다기에 그 약속도 전부 취소했지 뭔가.”
오늘 내가 찾아온 곳은 다름 아닌 한라 그룹 이강철 회장이 살고 있는 저택이었다. 그것도 일반 저택이 아닌, 대저택이라 문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일찍 찾아와 드렸어야 했는데.”
“아닐세. 그건 그렇고, 사장으로 취임한 거 축하하네.”
“화환까지 보내셨잖아요. 감사히 받았습니다.
이강철 회장은 내가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화환을 보내 축하 인사를 전했었다.
“어머. 팀장님! 아니지. 이제 사장님이시죠?”
“안녕하세요, 한별 씨.”
“오늘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이한별이 내게 밝게 인사를 건네며 나타나자 이강철 회장이 짧게 웃으며 말했다.
“이 녀석이 자네가 온다는 얘기를 듣고 여기서 쭉 기다린 거 아나?”
“하, 할아버지!”
얼굴이 빨갛게 변한 이한별을 뒤로하고 이 회장이 내게 물었다.
“허허. 그래. 우리 이 사장같이 여의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이 늙은이를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
나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고개부터 숙였다.
“회장님에게 사과를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으응? 사과라니?”
“화환까지 보내 주셨는데, 아무래도 더는 신화 금융의 사장직을 수행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이 맡겨 주신 돈도 이제 그만 돌려드릴까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마 내일이면 크게 사건이 터질 겁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가 운영하던 펀드들도 전부 처분할 생각입니다. 원래는 꼭 3배로 만들어 드리려 했는데, 더 이상 그 펀드를 운영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 말에 회장과 이한별 둘 다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이 사장. 바쁜 건 알지만, 자세히 설명을 해 줄 수 있겠나?”
나는 이 회장에게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현재 신화 그룹이 어떤 상황으로 치달았는지를 알게 된 이강철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한별의 반응은 달랐다.
“와. 그 사람들 진짜 더럽네. 건드릴 게 따로 있지 어떻게 국가 기관의 돈을······.”
화가 잔뜩 나 있는 이한별과는 다르게 이 회장은 매우 침착해 보였다.
“신화 그룹에 조만간 일이 터질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네. 그런데 자네가 거기에 연관되어 있는지는 몰랐군.”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래도 내 돈을 무려 2배나 넘게 불려 주었잖나? 그것도 매우 짧은 기간에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투자를 많이 해 봤지만, 그렇게 빨리 내 돈 불려 준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지. 허허.”
이 회장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이지. 그래. 혹시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나?”
“아닙니다. 제 싸움이니, 제가 끝낼 생각입니다.”
“쯧쯧. 신용권 그 친구, 잘못 걸렸구먼. 이렇게 무시무시한 젊은 친구에게 분노를 샀으니. 그래도 분명히 내 도움이 필요할 거야. 언제든 연락하게. 나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나 찾아볼 테니.”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리고 한별 씨도 죄송합니다. 펀드는 곧 이번 주 내로 해지가 될 겁니다.”
이한별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동안 할아버지랑 절 위해 열심히 투자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덕분에 저도 돈 많이 벌었는걸요.”
이것으로 마음의 짐을 덜었다.
이들 말고도 더 만날 사람들이 있다.
나를 믿고 투자해 준 사람들.
그들에게도 전부 연락을 돌려 조만간 펀드를 해지할 거라는 소식을 알려 줄 것이다.
회사를 떠나기 전 모든 걸 다 정리해야 마음이 편할 게 아닌가.
“신 이사님. 이진석 사장입니다.”
나는 회사로 돌아와 곧바로 신 이사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이제 내일이면 모든 게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