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21화
“와. 미친 클래스네.”
“그치? 많이 미쳤지?”
“우리나라 재벌들이 그렇지 뭐. 솔직히 누구든 안 그러겠어. 어마어마한 돈이 걸린 일인데.”
“너도 나중에 그러는 거 아니냐?”
“난 아버지 회사 안 물려받아도 돼. 너랑 회사 차리면 되니까.”
오. 짜식. 조금 감동인데.
나는 신 이사와 현재 진행 중인 사모 펀드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현식이는 내 서류를 받아 그 내용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2조 원······. 이걸 다 삥땅치려 했단 말이지. 이대로 가면 최소 1조 원은 공중분해 되겠네.”
“1조 원이 훨씬 넘을 수도 있어. 합병이 진행되면 얼마나 더 많은 피해가 생길지 아무도 몰라.”
“넌 이걸 뒤집으려는 거고?”
“맞아.”
“흠-.”
현식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괜한 일에 엮인 건 아닌지 모르겠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어쩌겠어. 이미 안 이상, 못 본 척 넘어갈 순 없잖아.”
“그렇긴 한데, 원래 재벌들 세계라는 곳이 워낙 더러운 게 많아서 말이지. 이래서 네가 나한테 해외 법인을 만들어 달라고 했던 거구나. 이거 네가 뒤집어 버리면 여러모로 칼 가는 사람 많을 거다.”
저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국민연금 공단이 이번 계획에 참여를 했다는 건 정치권에서, 그것도 높으신 양반들이 이 일에 가담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나는 이 나라를 떠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눈 뜨고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너한테 부탁을 하는 거잖아.”
“어떤 걸? 설마, 이번 일에 우리 아버지 끌어들이려고?”
“아니. 네가 나 대신 만나 줄 사람이 있어. 내 방패막이가 되어 줄 사람.”
“그게 누군데?”
“잘 생각해 봐. 내가 이거 뒤집어 주면 누가 가장 좋아하겠냐?”
현식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손뼉을 크게 쳤다.
“신용일?”
“그래. 신 회장 첫째 아들. 그 양반을 탱커로 써야지. 일 다 저지르고 나서 누구 하나는 나 대신 몸빵해 줘야 하지 않겠냐?”
“흐흐. 그러네. 만약 이번 일이 성공하면 신용일 그 양반이 회장 되는 거니까. 신화 그룹 회장의 입김이면 어디든 먹히겠지.”
처음에는 조용히 일을 처리할까 싶었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후폭풍이 감당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하다 떠올린 수가 바로 신용일이었다.
신용권의 야망이 실패하고 나면 신용일은 저절로 차기 회장이 된다. 그리고 그가 날 비호해 준다면 안전하게 회사를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저번에도 말했던 것처럼, 신 이사가 의심이 많아. 그래서 날 감시하는 중이야. 어쩌면 날 미행하고 있을 수도 있어. 아니. 분명히 미행하고 있을 거야.”
“지독한 새끼네.”
“삐끗 잘못 실수만 해도 판이 다 어그러지잖아. 신중을 기하는 거겠지. 그래서 내가 신용일을 단둘이 만날 수가 없어. 네가 대신 만나 줘.”
“뭐, 만나는 거야 어렵지 않지. 그런데 어떻게 만나? 그 높으신 양반이 잘도 신화 금융 과장따리를 만나 주겠다.”
“그건 내가 자리를 마련해 줄게. 사실, 지금 나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야. 검찰청 금융부에 있는 이태호 검사라는 사람이 있어.”
검사까지 관련되어 있다는 말에 현식이가 눈을 크게 떴다.
“검찰에는 또 언제 줄을 연결한 거야?”
“이게 워낙 큰 규모잖아. 나 혼자 감당하기는 솔직히 힘들지. 그리고 신용권을 확실하게 몰아붙이려면 국민들의 분노를 사는 게 중요해. 이걸 언론에 쫙 뿌려서 대서특필한 다음에 검찰 조사까지 이어지도록 만들거야. 아무튼, 이태호 검사가 신용일이랑 네가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줄게.”
“검사 따위가 신화 그룹 부회장을 오라 가라 할 수 있을까?”
“흐흐. 그쪽 집안사람들이 워낙 잘나서 그런지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네? 의외로 이태호 검사가 발이 넓더라고. 더 웃긴 건 그 두 사람 형 동생 하는 사이란다.”
“검사랑 신화 그룹 부회장이? 상상이 안 간다.”
“그쪽 집안이 재벌만큼 잘났다고 했잖아.”
현식이와 만나기 전에 나는 이태호 검사와 별도로 연락을 하여 앞으로의 계획을 나누고 신용일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운 좋게도 이태호 검사는 집안 배경 덕분인지 신용일과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던 사이였고, 현식이와 만남을 주선해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답까지 주었다.
워낙 열정 넘치는 검사라서 그 양반이 재벌 못지않게 잘나가는 집안의 아들이라는 걸 종종 잊는다.
“너 진심이구나?”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솔직히 나는 네가 조금 하다 그냥 때려치우고 나올 줄 알았거든. 아무래도 상대가 재벌이잖아? 그런데 끝까지 싸우려 하다니. 나였으면 절대 못 했어.”
“나도 싸우고 싶지 않았어. 근데 신용권 그 새끼가 피땀 흘려 낸 세금을 홀라당 처먹는다는 생각을 하니까 배알이 꼴리잖아.”
“하하! 그래. 정의로운 사명감이 뭐가 필요하냐. 내 배알 꼴리면 들이받고 보는 거지.”
현식이는 서류를 들고 일어나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나만 믿어라, 브라더. 내가 아주 시원하게 다 까발리고 올 테니까.”
“······흥분하지 말고 앉아. 뭔 얘기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잖아.”
“아. 그렇지.”
뭔가 이놈은 똑똑한 거 같으면서도 허당 기가 충만하단 말이지.
나는 현식이를 앉혀 놓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며 어떤 포인트를 전달해 줘야 하는지 집어 주었다.
현식이 정도면 문제없이 신용일에게 내 말을 잘 전달해 줄 것이다.
문제는 과연 신용일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냐다.
* * *
“태호 그놈이 세상이 두 쪽 나도 오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오긴 했습니다만, 대체 무슨 일로 바쁜 사람을 불러낸 것인지 모르겠군요.”
신용일 부회장은 오랜만에 연락이 온 이태호 검사로부터 한 가지 알 수 없는 말을 듣고 선약까지 취소하며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다.
‘형님이 오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안 보면 아마 평생 후회할 겁니다.’
10살도 더 넘게 차이 나는 어린 동생이지만, 저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신경이 쓰여 약속 장소에 나왔다.
“신화 금융의 최현식 과장이라고 합니다.”
최소한 임원급도 아니고 고작 과장? 거기다가 신화 금융이라면 눈엣가시 같은 동생 녀석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다.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음. 그래요. 최 과장님이 왜 절 보자고 하셨을까요?”
그래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고 최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하는 신용일을 보며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든 최현식이었다.
“사실, 이 만남은 제가 주선한 게 아닙니다. 혹시 신화 금융 이진석 사장을 아십니까?”
“오. 알다마다요. 요즘 금융계에서 그 이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례 없는 수익률을 계속 보여 주고 있다던데?”
“예. 이진석 사장이 이 자리를 만들어 준 겁니다. 원래는 이 사장이 여기 나와 부회장님을 직접 뵈려 했는데, 보는 눈이 많아 그렇게 못 했습니다.”
“그렇다는 건 그쪽이 대리로 해서 온 것이다?”
“예. 맞습니다.”
신화 금융 이진석 사장이라.
입사한 지 2년도 안 되어 사장 자리에 오른 것은 물론, 계속해서 놀라운 수익률로 고객들을 마구 끌어오고 있다고 들었다.
금융계에서는 화제의 인물인데, 그 젊은 친구가 오늘 이 자리를 만들었다.
“일단 이거부터 읽어 보시죠.”
[신화 그룹 합병 프로젝트]
“이건 또 뭔가? 신화 그룹 합병 프로젝트라니?”
“읽어 보시면 압니다.”
제목부터가 벌써부터 눈길을 확 끌어당긴다.
신화 그룹 합병이라니.
자신은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설마, 자기도 모르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걸까?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 신 부회장이었다.
그리고 얼른 서류를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이건······.”
20분 정도 흘렀을까.
신용일 부회장은 허탈한 신음을 흘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최현식은 그가 진정할 수 있게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
부회장은 물 한 컵을 들이켠 다음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애지중지 지켜온 회사가 용권이 새끼한테 홀라당 넘어갈 뻔했구먼.”
“예. 설령 지금 아셨다고 해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자세히 보면 아시겠지만, 신화 금융이 작정하고 돈을 풀어 버리면 지배 지분이 전부 신용권 이사한테 들어갈 테고, 합병도 문제없이 진행됩니다. 그렇게 되면 부회장님은 꼼짝없이 회장 자리를 빼앗기시겠죠.”
“······.”
틀린 말도,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었다.
부회장이 지금이라도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려 들면 합병은 어떻게든 막아 낼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같이 머리가 차갑지 않을 때 이런 얘기를 들으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게 뭐요? 내가 알기로 이 사장은 용권이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진석 사장은 이 합병을 막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회장님께 이 사실을 알린 거고요.”
“내가 그걸 믿으라는 건가?”
“믿지 않으시면요? 저희는 이미 들고 있는 패를 다 보여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못 믿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죠. 합병이 진행되도록 가만히 놔두는 수밖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거 막으려면 엄청 골치 아프실 겁니다. 국가 기관이 섞여 들어가 있으니까요. 저희 쪽에서 판을 엎지 않으면 결국 회사는 신 이사에게 넘어갈 거예요.”
알고 있다.
그래서 목구멍까지 욕지거리가 차오른 것이다. 그러나 부회장은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는 대인배 같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우리 이진석 사장이 거래할 줄을 아는구먼. 그래. 뭘 원하지? 만약 이걸 나한테 말하지 않고 진행을 했다면 이 사장은 출셋길이 훤히 열렸을 텐데. 뭔가 나한테 더 큰 걸 원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사람을 보낸 거 아닌가? 신화 그룹 부회장 자리면 만족하나?”
신화 그룹 부회장!
실로 대단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진석도 그렇고, 대리인으로 나온 최현식도 모두가 원하는 그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
“됐습니다. 그런 자리는 줘도 안 받아요.”
“허-. 우리 신화 그룹을 무시하는 건가?”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자리를 노리고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니니까요. 그저 이진석 사장이 원하는 건 부회장님의 보호입니다.”
“응? 보호?”
“예. 눈치채셨겠지만, 이번 합병 프로젝트는 정치권과도 관련이 있어서요. 일 저지르고 나면 이진석 사장을 묻어 버리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겁니다. 그때 부회장님이 나서서 이진석 사장을 도와주십시오. 부회장님이 신화 그룹 회장이 된다면 윗선에다 충분히 손을 대실 수 있지 않습니까?”
최현식의 말에 신 부회장은 눈을 껌뻑였다.
“원하는 건 그게 끝이야?”
“음······. 예. 이게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부회장님께서는 타이밍을 보다가 나서 주시면 됩니다.”
“정말로? 돈을 원하거나, 자리를 원하진 않고?”
“저희는 그런 욕심 없습니다.”
뭔가 큰 대가를 바랄 줄 알았는데, 원하는 게 없다고 하니 더 수상했다.
“자네도 원하는 건 없고? 이번 일이 엎어지면 회사를 나와야 할 텐데. 그때 내가 따로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
“괜찮습니다. 정 할 거 없으면 아버지 일이나 물려받죠, 뭐.”
“아버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데?”
“제일 금융 사장입니다.”
“뭐, 뭣? 어디 사장이라고?”
“아무튼, 전 드릴 얘기 다 드렸습니다. 약속 꼭 지켜 주십시오.”
자기 할 일을 다 마치고 밖을 나가려는 최현식을 신태일이 붙잡았다.
“그럼, 이진석 사장은? 그 친구도 일 그만둘 거 아닌가.”
“예. 그렇겠죠.”
“그 친구한테 말해. 내가 자리 마련해 준다고. 설마, 그 친구도 자네처럼 어느 대기업 회장의 아들인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죠. 그런데 두고 보십시오. 아마 그 친구, 대기업 못지않게 성장할 테니까요.”
황당한 소리를 연달아 들으니 더 이상 대꾸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신태일 부회장은 해맑게 밖을 나서는 최현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당최 속을 모르겠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