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7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방 안에서 어느새 음식 냄새는 사라지고 코끝을 찌르는 수정과 향만 남아 있었다.
“권 사장.”
“예, 이사님.”
“잠깐 나가 있어 봐. 내가 우리 이 과장이랑 단둘이 얘기를 나눠 봐야겠네.”
“예. 알겠습니다.”
권 사장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으나, 군말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신 이사는 준비한 카드를 내게 던졌다.
“신화 금융 사장 자리. 일단 그거면 만족하나?”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이건가.
신화 금융 사장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이거였나?
정말 미래 커뮤니티 센터는 내가 이 사기극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거였나?
“지금이라도 내가 권 사장 쫓아내고 그 자리에 앉혀 줄 수 있어. 말만 해.”
최측근에 있는 권 사장을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리고 날 앉히겠다고?
“제가 신화 금융에 들어온 지 2년도 안 됐습니다. 그런데 절 사장 자리에 앉히시겠다고요?”
“근무 연수가 무슨 소용이야. 실력이 있어야지. 서류 보면 알겠지만, 보통 인간은 그런 사모 펀드 운용 못 해. 누구처럼 괴물 같은 분석력으로 수익률을 팡팡 터트리지 않는 이상. 솔직히 말해서, 지금 권 사장은 쓸모가 없어. 이 정도 사이즈의 펀드를 진두지휘할 그릇이 아니거든.”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기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고 봐야 할지.
권 사장이 우리 얘기를 들었다면 뒷목 잡고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사모 펀드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 도대체 이 과장이 무슨 수로 주가를 귀신같이 예측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런 자네의 능력이 필요해. 지금 부회장 자리 앉아 있는 우리 큰형님, 곧 회장님 돌아가시면 장례식 때 상주 자리 앉아서 회장 노릇 하는 꼴을 내가 볼 순 없잖나. 다행히 그 멍청한 형님께서는 로지텍에 관한 정체를 모르고 있어. 나한테는 이것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는 거지.”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신 회장이 불쌍하다고 해야 할까.
자식들이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신화 그룹 벽돌 한 장이라도 더 갖기 위해 총알을 모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신 회장도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강한 자가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죽어 버린 알렉산더처럼 자식들을 전쟁터로 몰아넣다니.
“그러니까 이 사모 펀드, 이 과장이 맡아 줘.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사장 자리 넘겨줄 수 있어. 그리고 일이 잘 끝나면, 알지? 내가 신화 그룹 회장이 되면 이 과장은 개국 공신이 되는 거야. 개국 공신이 되면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는지 굳이 말 안 해도 잘 알겠지?”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개국 공신들은 대부분 말로가 좋지 않았다.
팽당하거나, 솥에 넣어진 사냥개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 권오준 사장처럼 말이다.
“아무튼, 오늘 얘기는 잘 들은 거로 하지. 가능하면 빨리 답을 줬으면 하는데.”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워낙 무시무시한 프로젝트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 오늘 반가웠어.”
신 이사는 나와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나서 방 밖을 나가 버렸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생각에 빠져 있었고, 그 사이 권 사장이 슬쩍 안으로 들어왔다.
“어때? 얘기는 잘 했어?”
내가 사장 자리를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권 사장 얼굴을 보니 양심에 찔린다.
“예, 뭐······.”
“할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안 하면 회사 생활 많이 꼬일 텐데.”
“그럼 그냥 나가야죠.”
내 간결한 대답에 권오준 사장은 날 물끄러미 살펴보았다.
“신 이사님이 무슨 제안을 했는지 대충 알 것도 같네.”
“예?”
“사장 자리 준다고 하셨어? 이 펀드 맡으면.”
뭐지. 우리가 나누는 얘기를 엿들은 건가?
“표정 보니까 맞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직감이지. 너도 알다시피 이 펀드, 보통 일이 아니잖아. 자칫 잘못하면 철창행이기도 하고.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만큼의 대가를 걸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권 사장은 다시 내 앞에 앉아 허심탄회하게 속 이야기를 꺼냈다.
“원래 재벌들이 저래. 필요 없으면 언제든지 아래 사람을 갈아 치워 버리지. 나 때도 그랬어. 내가 평소 존경하던 사장님을 단칼에 쳐 버리고 날 앉히더라고. 더러운 일 해 주는 대가로 말이야.”
예전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재벌들의 습성을 권 사장은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전 사장님 자리 빼앗을 생각 없습니다.”
“나도 알아. 넌 항상 행동이 그랬어. 이깟 회사 언제든지 나가도 괜찮다는 듯이. 솔직히 자리에는 별로 욕심이 없잖아? 그런데 왜 회사에 계속 남아 있는 거지?”
“그건······ 나름 사정이 있습니다.”
“고객들과의 약속 때문이라는 개소리는 안 해서 좋네.”
권 사장은 아주 자연스럽게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원래 식당에서 담배 피우면 안 되는데, 이런 비싼 곳은 실내 흡연이 가능해. 다 환풍기도 설치되어 있고. 아주 좋아.”
그러면서 길게 한 대를 빨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한번 맡아 봐.”
“예?”
“내 자리 가져가고 사모 펀드 한번 만져 보라고.”
“진심이십니까?”
“이미 나 버리기로 결심한 사람 옆에 남아 있을 만큼, 나 그렇게 우스운 새끼 아니야.”
권오준 사장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는 길게 연기를 내뿜으면서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사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원래 어느 곳이든 새로운 인재는 나오기 마련이거든. 그래도 이렇게 예고도 없이 등 뒤에 칼 맞으니까 좀 기분이 더럽긴 하네?”
“사장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 그 자리 원하지 않습니다.”
“알아. 그래도 이 바닥 떠나기 전에 그 정도 규모의 사모 펀드는 한번 만져 봐야지. 무려 조 단위의 펀드야. 너도 눈치챘겠지만, 이거 잘하면 제2의 온스타 게이트 된다. 뭐, 종류가 다르긴 해도 이거 까발려지면 파급력이 엄청날 거야.”
사모 펀드를 활용하여 기업을 강제 합병시켜 지배 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꼼수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죽어 간 개미들 때문에 논란이 많긴 했지만,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다시피 재벌들은 무사하다.
그들은 이 꼼수가 항상 잘 먹힌다는 걸 알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 꼼수로 자신들의 왕국을 지켜 나갈 것이다.
그러나 신 이사가 진행하려 하는 이번 사모 펀드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왕자들 싸움에 국가 기관이 한쪽 편을 들어 개미들의 죽음을 묵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게 외부로 유출된다면 전 국민의 분노를 한 몸에 받을 수도 있다.
“저 빨간 줄 긋고 싶지 않습니다.”
“네가 사모 펀드로 수익만 내면 너한테 돌아갈 불이익은 없어. 일이 터져도 넌 그냥 할 일만 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사모 펀드 구조상으로 보면 내가 빠져나갈 구멍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개미들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나 내일이나 모레에 사표 쓰고 나갈 거야.”
“아니. 사장님. 저 정말 관심 없다니까요?”
“알겠어, 인마. 하든 안 하든 네 자유지. 그래도 찬찬히 생각을 해 봐. 신 이사 그 새끼 위해서 하라는 게 아니야. 이런 거 한 번 만져 보는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데. 앞으로 네 커리어를 위해 말해 주는 거야.”
담배를 다 피운 권오준 사장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말 사표를 쓸 생각인지, 그의 얼굴에는 일체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확 엎어 버리고 싶은데, 내가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서. 그냥 넋 놓고 지켜만 봐야지.”
프로젝트 내용을 안다고 해도, 이것을 까발리는 순간 권오준 사장은 아예 얼굴도 내밀지 못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밀고자를 지켜 주는 법 따위 없으니까.
* * *
“돌아 버리겠네.”
집에 돌아와 서류를 앞에 두고 나는 고민을 이어 갔다.
이걸 해? 말아?
만약 이것을 한다면 나는 다신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것이고, 만약 안 하게 된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
그런데 내가 회사를 그만두게 될 경우, 미래 커뮤니티 센터에서 제안한 미션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어 더 이상 미래의 정보를 가져올 수가 없게 된다.
띠리링-!
항상 반가운 벨 소리가 오늘은 참 착잡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오늘도 미래 커뮤니티 센터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을 위한 새로운 미션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동안 내용을 볼 수 없었던 미션들이 잠금 해제가 된 건가?
나는 잠시 고민을 뒤로 미뤄두고 미션창을 확인해 보았다.
“어······?”
여러 미션들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미래 커뮤니티 센터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이것은 내가 이런 더러운 짓에 연루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피눈물이 나오도록 만드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금융사의 사장이 되는 것 또한 잠깐 밟고 지나가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고민을 훌훌 날려 보내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넌 다 계획이 있구나?”
* * *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나는 출근하기 전에 먼저 신 이사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이진석 과장입니다.”
“아, 그래. 이 과장. 아침부터 전화를 다 하고. 마음의 결정이 선 건가?”
“예. 이사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그 사모 펀드, 제가 맡게 해 주십시오.”
“하하. 빠른 결정 내려줘서 고마워.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평생 보장해 준다는 말 기억하지?”
권 사장에게도 분명 저런 말로 꼬드겼겠지.
하지만 그 최후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나는 회사로 들어가 권오준 사장이 있는 사장실로 향했다.
“이 과장?”
“사장님. 저 결정했습니다.”
권 사장은 내 얼굴만 봐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내일 되기 전에 짐 다 뺄 거니까.”
“아니요. 다 빼진 마세요. 그 자리 어차피 제가 잠깐 앉았다가 다시 돌려 드릴 거니까요.”
“뭐?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저 그 자리 관심 없다고. 그냥 잠깐 좀 빌리겠습니다.”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권 사장을 내버려 두고 나는 내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장이 오픈하기를 기다리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모든 종목을 홀딩합니다. 어떤 것도 매수하거나 매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픈형 펀드 판매도 당분간 중단합니다.”
“예?”
“펀드 판매를 중단하신다고요? 그럼 저흰 무슨 일을 해야 하죠?”
“다들 하고 싶은 거 하세요.”
모든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식이에게 쏠렸다.
과장이란 사람한테 일개 직원이 나서서 꼬치꼬치 캐물을 순 없기 때문이다.
“에휴. 내가 또 총대 메야지.”
현식이는 일어나 나를 데리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뭔 일이야?”
“그런 게 있어. 아마 며칠 동안은 회사가 많이 혼란스러울 거야.”
“뭐?”
“그리고 저번에 말했던 해외 기업 있잖아. 미리 법인 세우자던 거.”
“갑자기 그게 왜?”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있나 해서. 한번 만들어 보자고.”
내 말이 이상하게 들렸는지 현식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회사 그만두냐?”
“아직은.”
“저번에는 국내에 만든다더니?”
“내가 곧 높으신 분들한테 미운털이 박힐 것 같아서. 국내는 조금 위험할 거 같다.”
“이 자식이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아무튼, 그 일은 너한테 맡긴다. 난 김 여사 좀 만나고 올게.”
“야! 어디 가?!”
나는 곧장 회사를 나서 김미영 여사와 잡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회사를 나가기 전까지 당분간은 아주 많이 바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