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5화
“이 팀장. 잠깐 나 좀 볼까?”
회사를 다니는 동안 멀리서 보는 것 빼고는 이렇게 가까이 본 적이 없던 권오준 사장이 지금은 하루가 멀다고 우리 부서를 찾아왔다.
“전화로 부르지 그러셨습니까.”
“하하. 우리 이 팀장 같은 유능한 인재를 내가 전화 따위로 불러서는 안 되지. 가서 맛있는 커피나 한잔하자고. 여기 맛없는 믹스 커피 말고. 내 방에 로스트 기계 있는 거 알지?”
아무렴.
저번에도 실컷 자랑을 했던 걸 아직까지 기억한다.
“오늘 할 중요한 얘기도 있어. 장 오픈하기 30분 정도 남았으니까, 따라와.”
모두의 시선이 꽂힌 채 나는 사장의 뒤를 따라갔다.
대부분 부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고, 박 과장같이 제 목이 잘릴까 두려운 사람들은 애원의 눈동자를 보내기도 했다.
권오준 사장은 진한 블랙 커피를 내 앞에 내놓으며 운을 뗐다.
“요즘 회사 분위기가 좀 흉흉한 거 알지? 뭐, 금융 쪽 회사들 전체가 많이 흉흉하지.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고.”
“예. 아무래도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크으-. 예전이 참 좋았어. 전화로 주문받으면서 개미들 등쳐먹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그런 짓도 못 하고 말이야.”
“그것 때문에 실수도 참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나도 예전에 밑바닥이었을 때, 고객이 전화로 어떤 주식을 매수하라고 했는데, 그걸 다른 종목으로 착각해서 잘못 매수했던 적이 있어.”
예전에 직접 전화를 해서 주식을 사고팔았을 때 저런 실수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 그 직원이 속해 있는 팀은 고객이 손해 본 금액만큼을 지불해야 했다.
“그래서 고객이 많은 손해를 보셨나요?”
“아니. 오히려 나 덕분에 50% 이익 봤지. 그 고객이 아주 호탕하게 웃으면서 나 보너스까지 챙겨 주더라.”
운이 좋았구나.
저런 실수를 했는데도 될 놈은 된다는 뜻이겠지.
길 가다 칼 안 맞은 것만 해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 어제 박 과장한테 얘기는 잘 들었나?”
그 말에 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사장님이 일부러 흘리신 거였네요.”
“흐흐. 눈치채고 있었나 봐? 맞아. 황 부장한테 내가 말을 흘리면서 박 과장한테도 조용히 얘기해 주라고 했지. 그걸 박 과장이 들으면 쪼르르 이 팀장한테 달려가서 모조리 일러바칠 테니까. 그래서, 박 과장이 뭐라고 하디?”
“살려 달랍니다. 자기 목 안 날아가게요.”
“어휴. 그 양반은 이제 철 지났다는 걸 모르나? 투자 방식도 그렇고 너무 올드해. 그러니까 고객들이 빠져나가는 거야. 이 팀장은 그냥 모른 척하고 있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뭐, 저도 사장님이 의도하신 것 같아서 제 밑의 팀장으로 들어오면 받아 줄 의향이 있다고 말하긴 했습니다.”
권오준 사장이 빵 터지면서 날 손으로 가리켰다.
“뭐? 팀장? 하하하-! 이거 아주 나쁜 놈이었네. 예전 상사를 이제 부하로 둬서 부려 먹겠다는 건가? 복수도 하고?”
“복수라뇨. 박 과장님한테 따로 원한 쌓인 건 없습니다. 정말 진심 어린 충고였어요.”
“이러다 내가 마음 바뀌어서 이 팀장을 과장 자리에 안 앉히면?”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제가 과장으로 올라간다고 한들, 바뀌는 게 많이 없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야. 아주 많이 바뀔 거야.”
권오준 사장은 서류 하나를 내 앞에 던져 놓았다.
“이 회장 비서가 새벽부터 나와서 200억 넣어 놓고 갔다. 확인해 봐.”
서류를 확인해 보니, 이 회장이 본인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여 200억을 넣어 놓았다.
그리고 이 돈들은 전부 내가 운용 중인 펀드에 자동 편입이 된 상태였다.
“정말 통이 크신 분이네요.”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지. 혹시라도 수익률 좋으면 또 만나 봐. 거기 손녀딸이 이 팀장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에이. 사장님. 재벌들이 결혼을 어떻게 하는지 다 아시면서. 그리고 그분이 저 같은 사람한테 왜 관심을 가지겠어요. 그냥 전 맡은 돈 관리하는 마름이죠.”
금융업 쪽에 있으면 재벌에 관한 소식을 특히 많이 듣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그룹이 어떠한 그룹과 사돈을 맺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것은 곧바로 주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1위 기업 천하 그룹은 외가 친척부터 사돈까지 죄다 재벌 그룹과 엮여 있다. 즉, 이들은 정략결혼을 통해 문어발처럼 영향력을 뻗치고 나아가 대한민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려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략결혼은 절대 없어지질 않아.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재벌들은 자기들끼리 결혼해서 이익 보잖아.”
“저라도 그랬을 거 같긴 하네요.”
“아무튼, 우린 그 새끼들 돈 불려 줘야 하는 월급쟁이들이니까. 우리 이 팀장, 과장 승진 기념으로 펀드 하나 더 해 보는 게 어때?”
“펀드요?”
“그다음 장 넘겨 봐.”
왠지 서류가 두툼하다 싶었는데, 그다음 장을 보니 새로운 펀드에 관련한 포트폴리오가 적혀 있었다.
“이번에 우리 신화 금융에서 주관하는 사모 펀드 하나가 있어. 국가 기관에서도 참여를 할 거고, 여러 금융권도 돈을 투자할 예정이야.”
서류 내용을 확인해 보니, 보통 금액이 아니었다.
임시 산정 금액만 봐도 3,000억을 넘었다.
“아마 모이면 5,000억까지 갈 거야.”
“금액이 상당하네요.”
“그렇지. 보통 그 정도 금액이면 해외 채권을 사서 장기간으로 묵혀 둘 가능성이 커.”
사모 펀드는 국내에도 투자를 하긴 하지만, 해외 쪽에도 활발하게 투자를 한다.
사모 펀드의 종류는 다양한데, 채권과 부동산이 있고 회사 하나를 사서 3~5년 안에 가치를 높여 되파는 차입 매수를 활용할 때도 있다.
차입 매수란, 회사를 사들이는 비용의 약 70%를 은행에서 빌린 다음, 회사의 가치를 높여 그것을 되팔아 은행 빚을 갚고 이익을 보는 구조다. 하지만 이 같은 경우는 경영 실패로 인해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또한 사모 펀드는 시장을 약탈해 먹는 도적들이 되기도 한다. 가끔 막대한 자본을 활용해 시장 상황이 열악한 곳을 공략할 때가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도 여러 번 해외 사모 펀드에 의해 시장 상황이 엉망이었던 적이 있을 정도.
해외 자본에 의지하는 비율이 큰 우리나라 코스피는 앞으로도 그런 상황을 계속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웃긴 건, 우리나라도 똑같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위쪽 분들은 조금 더 많은 수익을 원하시지. 자본에 취약한 해외 시장을 노려 쏠쏠하게 재미를 보려는 것 같아.”
위쪽 분들이라고 하면 대개 정치권과 관련된 곳이다.
“추정 산정 금액은 3,000억인데, 이게 5,000억이 될지 1조 원이 훌쩍 넘어설지는 아무도 몰라. 먼저 프로젝트를 까 봐야 아는 거니까.”
판이 어마어마하게 크다. 거기다 정치권까지 관련이 되어 있다.
“정권 바뀌고 나서 국민 눈치 좀 보다가 이런 돈놀이 한 번씩 해 주잖아. 그 대신 우리도 챙기는 보너스가 두둑하고. 어때? 관심 있어? 어차피 우리가 불법 저지르는 것도 아니잖아.”
그 말대로 불법은 아니다.
단지, 수익을 본 금액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게 문제가 될 뿐이다. 그런 점은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긴 하지만, 가끔 불똥이 튈 때도 있다.
“저 같은 초짜에게 너무 과한 프로젝트를 맡기시는데요. 이런 건 에이스들 중에서 에이스만 뽑아 진행하지 않습니까?”
“이거 왜 이래? 우리 신화 금융의 에이스가 그런 말을 하면 섭하지.”
“일단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아직 여유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그리고 이 프로젝트만 잘 성사시키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어. 보너스도 어마어마할 테고.”
보너스라면 항상 땡큐긴 한데, 이번 프로젝트는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을 해야겠다.
솔직히 욕심이 나긴 한다.
내가 언제 저런 거대 규모의 사모 펀드를 운용해 보겠는가.
“아이고. 우리 과장님 오셨습니까!”
사장실 밖을 나오니, 현식이가 두 팔을 활짝 벌려 날 반겼다.
“응? 무슨 소리야?”
“방금 발표 다 났어. 너 오늘부터 과장이라면서. 지금 박 과장 짐 빼는 중이다. 다른 곳으로 좌천 발령 났다던데.”
사무실에 들어오니 직원들은 환호성과 더불어 크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과장님. 축하드립니다.”
“이 과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보너스를 비롯해 어제 회식 때문인지 다들 나에 대하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거기다가 이제 나는 과장이 되었다.
그 뜻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내가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내가 운용하는 펀드를 위해 이들 모두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아아. 다들 축하는 감사합니다. 그런데 곧 개장 시간이니까, 모두 일합시다. 오늘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요.”
나는 내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서 슬쩍 박 과장 사무실을 살펴봤다.
박 과장은 똥 씹은 얼굴로 짐을 싸는 중이었는데, 조금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거면 그냥 오늘 아침에 박 과장을 출근시키지 말고 나중에 다 퇴근하면 그때 짐을 싸게 할 것이지.
하지만 이것도 역시 회사가 직원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그림일 것이다.
성과를 올려라. 그럼 너희도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성과가 없으면 저렇게 쫓겨난다.
회사는 이걸 직원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박 과장님. 제 제안은 아직 유효합니다.”
내가 문을 두드리면서 들어가자 박 과장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꺼져, 이 새끼야.”
어제와는 확연히 180도 다른 모습이다.
“여전히 자존심을 세우시네요. 팀장으로 다시 들어오는 게 그렇게 싫습니까? 사원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팀장이잖아요.”
“웃기지 마. 지금은 네가 웃고 있지만, 조금 시간 지나면 너도 똑같이 이렇게 될 거야. 두고 봐. 내가 역겨워서 이 회사 나가고 만다. 나 찾는 회사가 한둘인 줄 알아?”
“예, 뭐 응원하겠습니다. 그런데 나가시기 전에 인수인계는 해 주셔야죠. 그거 안 하고 나가시면 회사 차원에서 고소 들어갑니다.”
박 과장이 운용 중인 펀드들을 이제 내가 모두 도맡아야 한다. 만약 앙심을 품고 제대로 인수인계를 해 주지 않는다면 고객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박 과장은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다 정리해 놨어.”
신경질적으로 내 앞에 USB를 던져 버린 다음, 박 과장은 그 길로 사무실을 나갔다.
그러자 일제히 직원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누구도 박 과장을 동정하는 시선 하나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아주 고소하다는 듯한 눈빛까지 보인다.
“더러운 새끼들. 어디 한번 잘 먹고 잘살아 보라지. 은혜도 모르는 것들.”
악덕 상사의 깔끔한 마무리라고 해야 할까.
박 과장은 혼자 씩씩거리며 짐을 싸 들고 금융사를 나갔다.
나는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직원들 앞에 섰다.
“모두 바쁜 거 잘 아는데, 잠깐만 들어 주세요.”
직원들은 다시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앞으로 우리 과는 많은 게 바뀔 겁니다. 특히 저는 실적을 위주로 팀을 나눌 생각이니, 부디 다들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구조조정이 있을 겁니다. 이것 또한 역시, 성과에 따라 아주 공평하게 이루어질 예정이니, 긴장을 늦추지 말아 주십시오.”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축하한다며 내게 박수를 쳐 주던 직원들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기까지 했다.
그것을 보고 난 알았다.
이제 저들이 씹고 뜯는 건 박 과장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난 그토록 원하고 욕했던 상사가 되었음을 체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