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4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보이는 박 과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장님이 조용히 언질을 주셨어. 곧 부서 안 개편이 있는 모양이야. 이번에 이 팀장이 한라 그룹 회장님에게 200억을 받지 않았는가? 그래서 사장님이 날 쫓아내고 여기다 자네를 앉히려는 것 같아.”
길게 들어보지 않아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게 또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되는 건가.
어제 보았던 미션 창이 문득 떠오른다.
권 사장은 처음 나를 만났을 때 말하지 않았던가.
성과가 좋다면 펀드 매니저 자리를 주겠다고 말이다.
직접적으로 펀드 매니저를 준다는 말은 없었지만, 은근히 그런 뉘앙스를 풍기긴 했다.
하여튼, 권 사장의 행동력은 알아줘야 한다.
한라 그룹 회장의 돈을 아직 받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물갈이를 시작하고 있었다.
“권오준 사장님이 지금 칼을 빼 들었어. 그렇지 않아도 금융 쪽 칼바람이 계속 불고 있지 않나? 이 기회에 싸그리 정리 해고 들어가겠다는 거지.”
점점 발달하는 IT 기술.
인간을 대체해 기계, 혹은 AI가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금융계라고 해서 그 시대의 바람을 피할 순 없다.
이곳도 그 역풍을 세게 맞은 곳 중 하나인데, 예전에는 트레이딩 프로그램이 널리 보급되어 있지 않아 전화로 혹은 직접 방문하여 투자 거래를 해 왔다. 하지만 점점 간편화가 되면서 개인 투자자가 직접 프로그램이나 어플을 이용해 거래가 가능하지 않은가?
그로 인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그 칼바람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은행, 투자 회사 등을 가리지 않고 금융 쪽과 관련된 곳이라면 모두 피바람이 불고 있다.
“나 좀 한번 살려 줘. 이 팀장 요즘 사장님한테 촉망받고 있잖아. 슬쩍 말 몇 마디만 흘려 주면 내 목은 멀쩡할 거야. 우리 한 가족이잖아. 이렇게 내가 나가면 우리 과에 있는 직원들도 많이 동요할 텐데. 그 애들 마음 흔들리면 곤란하잖아.”
박 과장이 이렇게 구차하게 매달리는 건 처음 본다. 거기다 아래 직원들을 챙기는 말까지 하다니. 항상 아래 직원들을 벌레 보듯 보며 인간 취급도 하지 않던 양반이 말이다.
중국 버블 때도 날 자르지 못해 안달이 났던 사람인데, 지금은 내게 허리까지 반듯하게 숙이며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잘리지 않게 도와달라는 말씀이시군요.”
“그, 그래. 바로 그거지. 이 팀장님 조금만 도와줘. 내가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근데 아직 결정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박 과장님 혼자 호들갑을 떠시는 건 아닌지······.”
“아니야. 이미 위에서 진지하게 고려 중인가 봐. 권오준 사장 행동 빠른 거 이 팀장도 알지?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칼 휘두르기 시작할걸?”
그 말은 박 과장을 비롯해 몇몇 직원들도 다 같이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굳이 내가 아니었더라도 권오준 사장은 칼을 한번 빼들긴 했을 터.
이번 중국 버블 사태로 주가가 한 차례 바닥나면서 금융계 안이 흉흉하지 않았던가. 거기다 간편화 시스템이 점점 더 보급이 원활하게 되면서 쓸모없는 인력을 감축하라는 지시도 내려왔을 것이다.
특히 실적이 좋지 않으면 내보내는 것이 지금 회사의 방침.
굳이 내가 미안하다고 마음 쓸 필요는 없는 상황이었다.
도태되면 죽는 것이 이곳 금융계니까.
“정말로 사장님이 박 과장님을 쫓아내고 절 그 자리에 앉힌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죠. 저도 월급 받아먹는 사람인데.”
“이, 이 팀장! 정말 이럴 거야? 우리가 하루 이틀 보는 사이도 아니고. 내가 그동안 이 팀장에게 신경도 많이 써 줬잖아!”
“그러셨나요? 제가 처음 출근했을 때부터 인간 취급도 안 해 주셨던 분이 많이 아쉬우신가 봅니다.”
“이 팀장!”
“저 귀 안 먹었습니다. 소리 지르지 마세요.”
박 과장은 제 주제를 알고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 그래. 섭섭한 거 당연히 있겠지. 솔직히 회사 생활 하면서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으며 성장하는 거잖아. 그리고 상사 좋아하는 부하 직원이 어디 있겠어? 나는 좋아서 아래 사람한테 싫은 소리 하는 줄 알아? 다 그 사람들 잘되라고 그랬던 거야. 거기다 나 같은 사람이 없어요. 내가 이 자리 버리고 가면 회사에도 큰 손해야.”
“예. 그러시구나. 그럼, 이렇게 하죠.”
“어, 어떻게?”
“정말 사장님이 절 과장으로 올린다면 박 과장님은 제 과로 들어오세요. 팀장 자리 하나 맡으셔서 업무 보시면 되겠네요.”
“뭐, 뭐야?”
난 박 과장이 보이는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싫으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과장인 내가 어떻게 팀장으로 내려가?”
“아까 회사의 손해라고 하셨잖아요. 그걸 증명하시면 됩니다. 팀장으로 내려가셔서 열심히 실적 쌓으면 권오준 사장님이 다시 과장으로 올려 주시지 않겠어요? 박 과장님이 지금 옷을 벗게 되신 건 순전히 실적 때문이잖습니까.”
“투, 투자라는 게 원래 그렇지. 가파르게 오르다가도 팍 고꾸라지는 게 주식 투자 아닌가?”
“예. 그러니까 팀장부터 다시 올라오세요. 우리 신화 금융도 은근 실력주의잖아요. 아직 1년 반밖에 안 된 놈한테 과장 자리를 주려는 걸 보면.”
박 과장은 굳은 얼굴로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 오늘 회식이 있어서 이만 가겠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제게 과장 자리를 맡겨 주신다면 전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거든요.”
“이유?”
“음. 남한테는 말 못 할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튼, 제 뜻은 잘 전달했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난 넋을 놓은 채 멍하니 서 있는 박 과장을 놔두고 사무실 밖을 나섰다.
뭔가 그동안 쌓아 두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풀리는 듯, 후련한 기분이 든다. 그와 더불어 점점 더 의문이 생겼다.
이 미션들은 대체 날 어디로 인도하는 것일까?
* * *
“자. 오늘 마시다 죽자!”
“좋습니다!!”
“건배!!”
어쩌다 보니 회식 인원이 마흔 명까지 늘어났다.
아예 식당 하나를 빌려 다들 열심히 술과 고기를 입에 넣고 있는 중이었다.
웃긴 건 지금 여기가 2차라는 것이다.
“자자. 오늘 우리에게 이런 고기를 주시고 미래의 보너스까지 챙겨 주신 이진석 팀장님을 위해 건배 한 번 올리겠습니다.”
현식이가 운을 떼면서 모든 사원들이 열렬히 내 이름을 외쳤다.
“이진석! 이진석! 이진석!”
“우리 팀장님. 나오셔서 한 말씀 해 주시죠!”
이놈은 부끄럽게 사람을 부르고 있어.
이런 건 익숙지가 않은데.
나는 현식이가 건네는 수저가 든 소주병을 받아 마이크를 대신했다.
“음-. 딱히 드릴 말씀은 없네요. 하지만 이런 회식이 앞으로 자주 열릴 수 있게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분기마다 보너스도 아주 두둑하게 챙겨 갈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잘 도와주십시오.”
“우오오오-!”
“멋있다!”
보너스 싫어하는 직장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특히 이런 금융 쪽은 실적에 따라 보너스가 천차만별이다.
잘 풀린 금융인은 보너스만 몇억을 챙겨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대충 상황을 살펴보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팀장님. 어디 가세요?”
방금 전까지 맥주와 소주를 열심히 말던 화영 씨가 그런 날 붙잡았다.
“아. 전 이만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카드는 현식이한테 맡길 테니까, 다들 4차까지 가도 돼요.”
“이렇게 가신다고요? 아직 시간이 오후 11시밖에 안 됐는데?”
“미안해요. 내일 또 일해야 하잖아요. 미리 공부할 것도 있고.”
“아니. 진짜 우리 팀장님 진짜 너무 열심히 하신다니깐.”
화영 씨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고 가려는 걸 이번에는 현식이가 막아 세웠다.
“어딜 가?”
“내일 돈 안 벌 거야? 가서 조사할 게 있어.”
“네가 검사야? 무슨 조사.”
“시장 조사, 인마.”
“으휴. 놀고먹는 거 좋아하던 놈이 어떻게 이리 변했을꼬?”
“먹고살려면 변해야지. 그리고 이거 챙겨 놔. 오늘 팀원들 잘 챙겨 주고. 이 카드로 다 긁어.”
“오. 이게 김 여사 카드인가? 나야 좋지. 얼른 가.”
현식이가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일 김 여사가 카드값 보고 화들짝 놀라 전화라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분위기 망치지 않게 최대한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솔직히 나도 더 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얼른 집에 들어가 씻고 정신을 차린 뒤 12시가 되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띠리리링-!
후다닥 집으로 들어와 샤워를 하고 나오니, 정확히 12시에 벨 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이진석 고객님. 오늘도 미래 커뮤니티 센터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감사드리죠.”
[사용 시간은 총 60분. 잠금 해제를 하시면 120분이 추가됩니다.]
기본 알림창이 뜨고 나서 나는 바로 미션창부터 들어갔다.
그곳에는 내가 받은 미션 목록들이 있었다.
[투자금 300억 모으기 (+300,000포인트)]
[과장으로 승진하기 (+300,000포인트)]
두 개의 미션.
어제 이 미션들을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보상이 너무 짠 게 아닌가 싶었다. 거기다 투자금 300억 모으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고, 과장으로 승진하는 것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고작 하루 만에 미션 2개를 거의 성공시켰다.
내일 아침이 되고 이 회장으로부터 투자금을 받으면 첫 번째 미션은 성공. 그다음으로 오늘 박 과장에게 들었던 것처럼 권오준 사장이 날 과장으로 승진시키면 두 번째 미션도 성공하게 된다.
“조금 소름 돋는데.”
이건 마치 미래 커뮤니티 센터가 미션을 깰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한 건 딱히 없다.
내가 이 회장을 설득해 투자금을 뜯어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날 만나지 않았어도 손녀딸 말에 따라 내게 200억을 던져 줬을 사람이다.
“초심자 등급······.”
이 어플을 통해 내 정보를 볼 수가 있었는데, 간단한 인적 사항과 더불어 내 등급이 적혀 있었다.
“미션도 등급에 따라 난이도가 결정된다고 했지.”
그렇다는 건 내 등급이 초심자라서 미션도 쉽게 깰 수 있게 만들어 준 건가?
“미래 커뮤니티 센터는 정말 미래를 볼 수 있으니까. 내가 과장이 되고 200억을 이 회장한테 받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을 거야.”
그래서 이런 미션을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미션이 클리어되도록 말이다.
“문제는 이건데.”
미션은 딱 2개씩만 받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다음 미션으로 이어지는데, 그다음 미션들은 회색 글씨로 쭉 나열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것들은 내가 볼 수 없게 잠금이 되어 있었고, 몇몇 개는 내가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신화 금융 사장으로 승진하기. (+1,000,000포인트, 초심자 등급에서 중수 등급으로 승급됩니다.)]
미래 커뮤니티 센터는 내가 신화 금융의 사장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