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69화 (269/271)

269 : 에필로그 : 일상 (1)

테이블 위에 올려진 가스버너에는 전골이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전골냄비 주변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밑반찬들이 놓여 있었다.

여느 가정집에 일반적인 저녁 식사 테이블처럼 보였지만, 장소가 서점이라는 점과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 밥공기 대신 소주잔이 놓여 있다는 점이 달랐다.

“이번에는 어르신께서 너무하셨습니다.”

소주병을 든 노인이 맞은 편 노인에게 잔을 따르며 말한다.

술잔을 받는 노인은 무슨 소리냐는 듯한 시선으로 맞은 편 노인을 바라본다.

“이리될 걸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것 아니셨습니까?”

중앙그룹의 강민철 회장이 그렇게 말한다.

“섭섭한가?”

어르신이라고 불린 노인이 되묻는다.

“섭섭하다기보다, 마음을 너무 졸였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강민철 회장이 옆에 앉은 남자, 유주원 교수의 잔을 채우며 그렇게 물어본다.

“어르신께서 다 뜻이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저희 입장에서는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주원 교수도 강민철 회장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그렇게 말을 보탠다.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은 그런 그들을 보고 아직 멀었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다.

“쯧쯧. 자네들은 그 나이를 먹고도 아직 그리 마음이 가벼워서야.”

“어르신이 살아오신 시간만큼 더 살아간다 하더라도 저희는 그리할 것 같습니다.”

유주원 교수의 말에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이 작게 웃는다.

“허튼소리들 말고 어여 잔이나 들게. 무슨 제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노인의 말에 세 사람이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내 세 개의 잔이 비었다.

“그나저나 괜찮을지 걱정입니다.”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르면서 그렇게 새로운 화두를 꺼낸 것은 유주원 교수였다.

“…둘째 도련님 말씀이시군요.”

강 회장의 말에 유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둘째 도련님도 그렇고…. 시우님도 그렇고.”

거기까지 말한 유 교수는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을 바라본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감히 이런 말을 꺼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불경이었으니까. 감히 어르신의 결정에 의문을 품는 것은 불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날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런 강 회장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소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어떠하십니까?”

강 회장의 질문에 유 교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시작했다.

“일단 겉으로 보이기에는 평소 보여주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

“이사님. 죄송합니다. 생각해봤는데, 좀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전화기에 대고 그렇게 말하는 정지수의 얼굴에는 그의 말투처럼 곤란하다는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박사님께서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이해는 하는데요, 이대로 놓치기에 너무 아까운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박사님.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죠. 단순히 연예인들처럼 방송을 잡아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박사님께서 진행하실 학술 활동에 도움을 드리고 싶다, 뭐 그런 마음이 기저에 깔려있다는 것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이름만 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대형 연예기획사의 이사였다. 그가 정지수와의 계약을 위해서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자신이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공부하는 사람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귀사에 도움을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도움이라니요. 도움은 저희가 드리고 싶은 거죠. 박사님의 학술 활동을 통해서 우리나라도 앞으로 계속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국민으로서 이 나라가 발전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것은 당연한 의무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렇게 전화로 말씀드릴 게 아니라,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시간만 정해주시면, 제가 바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상대방은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정지수는 결국 조만간 그와 밥을 같이 먹겠다는 약속을 해주고 나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정지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다른 대학교에서 심리학 교수로 재직 중인 정지수의 두 학번 선배였다.

“사업은 저렇게 해야지. 지수야. 그냥 해줘. 계약금도 많이 준다며?”

“자기 일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깁니까?”

“내 일이었으면 당장 계약했지. 계약금도 준다 하고, 방송도 잡아주고, 출판도 도와주고. 완전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불태워 따땃하게 몸도 녹이고. 너무 좋잖아.”

“그렇게 좋으면 형이 하세요.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만 하면 되지.”

“나는 프린스가 아니잖냐. 내가 니 얼굴이면 난 공부도 안 했어. 아우 진짜 부러운 자식. 그나저나 임용된다고?”

선배가 정지수에게 물었다.

“되어야 되는 거죠.”

“심사 들어갔다며? 그럼 게임 끝이지. 아니, 학부 출신 성골인데, 성골도 그냥 성골이야? 한국대 프린스인데, 그런 널 탈락시킨다고? 교육도 비즈니스야. 대한민국 최고의 콘텐츠 그 자체인 너를 누가 탈락시키겠냐. 그 정도로 눈이 없으면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야지. 아니, 물러나기 전에 끌려 내려오겠다.”

“형. 소리 좀 낮춰요, 쫌. 누가 들을까 무섭네.”

“너는 그게 문제야. 잘났으면, 나 잘났다. 잘생겼으면 잘 생겼다. 그렇게 티도 좀 내고 다녀야 좀 사람 같지, 아주 인간미가 없어요. 인간미가.”

“인간미가 없긴, 내가 얼마나 인간미가 있는데, 먹는 것도 인간미 있게 먹잖아.”

“그 과천 돈까스? 아우. 진짜 야. 너는 그냥 호텔로 가. 가서 칼질해. 그게 너에게 어울려. 상가 분식집 돈까스가 말이 되냐? 그게 더 인간미 없어.”

“그 이야기 했더니 갑자기 먹고 싶네. 형 점심 안 먹었죠? 돈까스나 먹으러 갈까요?”

“아니, 그게 아니잖아. 지금 돈까스가 문제가 아니라…. 아이고 또 눈 저렇게 치켜뜬다. 야 이 자식아. 너 내가 그 눈 하지 말랬지?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지 말라 그랬지?”

선배는 그렇게 말하다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래. 가자. 아오 진짜.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놈을 후배로 뒀나 몰라.”

“죄는 무슨, 형이 다 전생에 공덕을 쌓아서 나도 만나고 한 거지.”

“시끄러워. 안 갈 거야?”

“제가 존경한다는 말 했었나요?”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는 정지수의 눈동자에는 오랜만에 만난 친한 선배와의 농담이 즐겁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순수한 감정이었다.

***

유 교수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 끝에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미소를 가진 한 청년의 얼굴이 있었다.

“제가 보아왔던…. 알고 있던 정 선생은 천성적으로 학자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었습니다. 내심, 제 아들이 아닌 정 선생에게 저의 업을 물려주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로. 그랬는데, 그날, 그곳에 그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 둘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어르신의 혈육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거기까지 말한 유주원 교수의 얼굴에 미약한 고통스러움이 떠오른다.

배신감, 아끼는 제자가 사실은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배신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는 오랜 시간 동안 외로이 견뎌왔을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소주잔을 비운 유 교수의 시선이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에게로 향한다.

“감히 어르신의 결정을 제가 판단할 자격은 없지만…. 정 선생을 대신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오롯이 그로서, 정지수라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주셔서.”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은 정지수의 기억을 지웠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연기하고 있던 ‘정지수’라는 인격을 제외한 다른 인격을 모두 지워버린 것이다.

지금의 정지수는 유주원 교수가 알던 정지수였다. 600년의 세월을 살아온, 진짜 자신의 모습은 숨긴 채, 다른 누군가를 연기해온 정지수가 아닌, 학문을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모두가 아는 그 정지수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녀의 영혼에는 수없이 반복된 환생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지금의 삶, 끝이 정해진 사람의 삶만이 남아 있었다.

“그 녀석들에게는 지은 죄가 많지. 그 녀석 애비에게도 그렇고.”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은 술병을 들어 직접 유 교수의 잔을 채워주었다.

“참, 기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 교수가 잔을 받으며 그렇게 말한다.

“무엇이 말입니까?”

강 회장이 물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신의 존재가 되신 어르신, 신의 후계로 태어나 사람이 되고자 했던 작은 어르신, 그리고, 사람으로서 신의 자리에 오르려 했던 정 선생. 각자가 추구하는 것은 달랐지만, 결국 그 끝에는 모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유 선생의 말에 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이제 모든 계승은 끝났으니, 저희도 이제 그만 4주 자리에서 물러나서 남은 여생을 즐길까 합니다.”

유 교수의 말에 강 회장도 허락을 구한다는 듯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뒷방 늙은이에 불과한 나에게 묻지 말게.”

“작은 어르신이야 어르신의 말씀이 있으시다면 허락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녀석이 내 말을 듣기나 하겠는가? 이제 제어할 사람도 없으니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일만 남았네.”

“그러실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잘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강 회장이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말한다.

“당분간 자네들이 그 녀석을 좀 돌봐줘야 할 걸세. 그리고 4주도 없앤다고 했으니 업이 이어지는 일은 없을 거네.”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의 말에 강 회장과 유 교수,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인주의 자리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강 회장이 물었다.

인주, 이현웅의 입장은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네 개의 기둥 중에서 정지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유일한 인물이었으니까.

“뭐 현웅이가 개인의 욕심으로 일을 벌인 것도 아니고, 잘못을 따지자면 현웅이보다 그 녀석에게 더 큰 죄를 물어야겠지.”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수가 용서받은 상황에서, 이현웅에게도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더 이상 인주의 자리는 필요 없지 않겠는가?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지금에 와서 권력을 계승한다는 것은 너무 시대착오적인 생각 아니겠는가.”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유 선생이 가장 먼저 지지 의사를 펼쳤다.

“자네들도 마찬가지네. 그냥 자네들 일하게. 이렇게 귀찮게 자꾸 내려오지 말고. 이미 기준이에게도 그렇게 얘기했네. 뭐 이야기한다고 들을 녀석은 아니지만.”

어르신이라는 노인이 자신의 술잔을 들며 그렇게 말했다.

“문주님이야 항상 한결같으시니까요. 그래도 최근에는 승환 군이랑 거리가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아서,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조금 흐뭇하고 그렇습니다. 문주님이야 그렇다고 해도 저희가 모신 시간이 얼마인데. 조금 섭섭합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강 회장은 얼굴에 조금 더 짙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저와 사돈지간이 되실지도 모르는데, 그리 말씀하시면 나중에 조금 민망해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강 회장의 말에 어르신이라 불린 노인은 조금 어이없다는 눈으로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회장님과 사돈이 되실지, 아니면 저와 사돈이 되실지.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유 교수의 말이 바로 이어졌다.

“…지연 양은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궤주님께서는 지금 당장 시집을 보내실 생각이셨습니까?”

유 교수의 말에 강 회장은 침묵을 지켰다. 자신도 사랑하는 손녀를 빨리 시집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에는 즐거움이 묻어있었다.

오랜 시간 곁에서 있어 준 벗들과 오랜만에 즐기는 즐거운 술자리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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