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68화 (268/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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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여기는 좀. 부담스러운데요?”

유주원 교수는 그렇게 말하는 아들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2년 만에 귀국한 아들, 내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 아들, 그런 아들에게 좋은 한 끼를 먹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을 찾았다.

호텔 센트럴 남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급 호텔이라는 센트럴 남산의 한식당, 미슐렝 쓰리스타를 자랑하는 고급 한식당이 오늘 가족 외식 장소였다.

단순히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었다. 3주라는 시간 동안 집안의 장남으로, 엄마에게는 든든한 아들로, 딸에게는 믿음직한 오빠가 되어준 아들에게 주는 그만의 선물이기도 했다.

“와…. 아들이 좋기는 좋네. 아빠는 나 이런 데 한 번도 안 데려왔으면서.”

예쁘게 차려입은 막내딸이 유주원 교수의 팔에 매달리면서 응석 부리듯이 그렇게 말한다.

“웃기시네. 아빠가 너 용돈 준 거 다 모으면 이 식당도 살 수 있을 거다.”

장남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여동생을 타박한다.

“오빠 바보야? 산수도 못해? 용돈 받아서 식당을 어떻게 사냐?”

“쓰읍. 유지연, 감히 하늘 같은 오빠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지? 다시 오그리마에서 뺑뺑이 돌려줄까? 강철주괴 할당 내려줘?”

“흥.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아니야. 울면서 자원 채집하던 꼬맹이가 아니라고요.”

유주원 교수는 그렇게 투닥투닥하는 남매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사랑스러운,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그의 보물이었다.

***

유지연은 포크를 들어 자신의 앞에 놓인 접시로 가져갔다.

접시에는 코스의 마지막 디저트로 나온 한과가 놓여 있었다.

그녀가 알던 한과와는 달랐다.

메뉴에는 흑임자에 콩가루와 꿀을 넣고, 차 우려낸 물로 빚었다고 쓰여 있었다. 표면의 문양도 틀이 아닌 직접 손으로 새겨 넣은 것이라고 했다.

유지연은 먹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을 떠나서, 이 아름다운 형상을 자신의 손을 깨트리기 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휴. 아까워서 못 먹겠다.”

옆에 앉은 엄마도 같은 생각인지, 차마 포크를 가져다 대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워도 드세요.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한과를 한 입 베어 문 채 시원한 미소로 그렇게 말한 오빠의 시선이 유지연에게로 향한다.

“왜? 너도 못 먹겠어? 그럼 나주라. 대신 이따 나가서 쪼코파이 사줄게.”

오빠의 말에 유지연은 발끈하면서 포크를 가져갔다. 사실 오빠가 진짜 원한다면 줄 생각도 있었지만,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과장된 동작을 보였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가 함께 해준 3주 동안, 오랜만에 집안에 웃음이 흘렀다.

물론 오빠가 없던 동안 집안 분위기가 처져있다거나 우울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유지연, 그녀가 조금 더 행복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행복에 비례하는 크기의 슬픔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학교와 집을 반복하는 유지연의 일상은 그다지 즐거울 일이 없었다.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없었고,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하지 않았으며,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유쾌하고, 항상 즐겁고 생기발랄한 대학 생활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시절이 다시 반복될 줄은 몰랐다.

입학하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같이 밥을 먹는 동기들도 있었고, 신입생환영회에서 처음으로 술도 마셔보았다.

어쩌면, 예전과는 다른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물거품이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몇 명의 동기와 선배의 고백을 받았고, 거절하자 나쁜 소문이 돌았다. 처음에는 위로해주던 친구들이 어느새 그녀의 험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다시 그녀는 혼자가 되었고, 그리고 학교에서 수업만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이 다시 찾아왔다.

슬프다거나 우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생활에는 이미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빠가, 3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친구가 되어준 오빠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 한동안은 마음에 다시금 어둠이 드리워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행복이 조금 더 슬프게 다가왔다.

그런 생각을 애써 지우려 다시 디저트에 포크를 가져가고 있을 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고, 열린 문으로 식당 입장 때 환영 인사를 건네주었던 식당 지배인이 들어와 아빠에게 귓속말로 무어라 말을 전했다.

귓속말을 전해 들은 아빠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 그런가요? 그러면, 제가 인사를 드리러 가겠습니다.”

아빠가 그렇게 말하자 다시 지배인이 아빠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가족들에게 물어보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빠의 말에 지배인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지배인이 물러난 것을 확인한 아빠가 가족들을 둘러보면서 조금 전 귓속말을 전해 주었다.

누군가 인사하러 오고 싶다 했다고.

***

유지연은 긴장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앙그룹의 강민철 회장, 대한민국을 넘어 글로벌 기업으로 이름 높은 중앙그룹의 총수가 아빠에게, 아니, 우리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유지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한국대학교의 교수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저 자상한 미소를 지어주시는 아빠였을 뿐이다.

그런데 티비에서만 보았던 중앙그룹의 총수가 그런 아빠에게 인사를 하러 오겠다는 이야기가 유지연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지배인이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강민철 회장의 모습이 바로 보였다.

유지연은 재빨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선생님. 이게 얼마 만에 뵙는 겁니까?”

티비에서만 보았던 재벌그룹 총수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서 그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회장님. 건강하셨습니까? 제가 직접 인사드리러 가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인사드리러 와야지요.”

마치 사람 좋은 동네 할아버지 마냥 인자한 미소를 띤 강 회장이 그렇게 말한다.

“제 안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소개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민철입니다. 교수님께는 여러모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유지연은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이런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는 듯,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아들입니다.”

“아. 그 미국에서 공부한다던?”

“그렇습니다. 인사드려라. 강 회장님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지훈입니다.”

오빠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표정으로 강 회장님의 손을 잡는다.

나만 어색한가?

유지연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였으니까.

“반갑습니다. 아버님께는 제가 항상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지연입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고개를 드는 유지연의 시선에 한 사람이 보였다.

강 회장 뒤에 서 있는 젊은 여자, 저렇게 예쁜 사람이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바라보는 유지연의 눈이 커졌다.

마찬가지로 여자도 유지연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는 제 곁에서 일을 도와주는 제 손녀입니다. 서현아. 인사드리거라. 한국대의 유주원 교수님이시다.”

강 회장이 그렇게 말했지만, 강서현은 마치 안 들린다는 듯, 유지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서현아.”

강 회장의 재촉을 듣고서야 강서현은 정신을 차렸다는 듯, 유주원 교수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실례했습니다. 강서현입니다.”

“괜찮습니다. 유주원입니다. 그런데, 저희 딸하고는 아시는 사이였던 가요?”

유주원 교수가 그렇게 묻는다.

그의 딸이 중앙그룹 회장의 손녀와 아는 사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 네. 그때. 어디선가….”

강서현이 유지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한다.

“네. 그때…. 거기서…. 거기서….”

유지연도 강서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강서현이라는 이름도, 저 아름다운 얼굴도, 분명히 유지연의 기억 속에 있었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에서 만났었는지, 누구랑 만났었는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 서 있는 것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강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그…. 대학 축제에서….”

그 말에 유지연은 머릿속에 안개가 조금 걷히는 느낌을 받았다.

“맞아요! 그때 뵈었어요. 축제할…때?”

축제? 5월에 열렸던 대학 축제?

그녀는 축제에 참가하지 않았다. 축제가 열리는 기간 동안 모든 수업이 휴강이었고, 그래서 집에만 있었다.

그런데 축제라고? 축제 때 만났었다고?

하지만 그런 의문과는 달리 유지연의 입에서는 계속 말이 이어졌다.

“그때, 손…님으로. 한…수 오빠 손님으로….”

“아. 맞아요. 한수 씨 초대로….”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두 사람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

나는 어느 어두운 방에 앉아 있다. 아니, 방이 아니다. 공간이다. 아니,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러한 공간, 빛도, 공기도 없는, 그저 허무만이 가득한 그런 공간에 나는 앉아 있다.

의식이 아니다. 내 몸을 가진 채로, 육신이 존재한 채로 나는 그곳에 앉아 있다.

사라졌는데? 분명히 내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라졌는데, 그런데 나는 어째서 이 공간에 앉아 있는 것일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본 순간, 나는 어렴풋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불려왔다. 누군가의 의지로 다시 이곳으로 불려온 것이다.

“너의 의지가 아니다.”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 그리운 목소리.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바라본다.

할아버지, 그곳에는 할아버지가 서 있다.

“나의 의지도 아니다.”

할아버지가 말한다.

그렇게 말한 할아버지는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온다. 그리고 몇 발자국 앞에서 멈추고는 천천히 가부좌를 틀고 그 자리에 앉는다.

“누구의 의지입니까?”

내가 묻는다.

“알지 않느냐?”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안다. 알고 있다.

누가 나를 다시 이곳으로 불러냈는지, 사라졌어야 하는 존재임에도 다시 이곳으로 불려왔는지.

그 녀석들. 친구들과 기훈이, 그리고 서현 씨와 지연이.

나를 기억해준, 내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나를 기억해준 사람들. 그들의 의지로.

“나 또한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말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다. 할아버지의 시간을 모두 지켜보았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할아버지에게 능력을 준 것은 할아버지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신앙이 삼라만상과 천지 만물을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으로 할아버지에게 깃들었다.

그리고 지금 내 존재는 친구들이, 기훈이가, 서현 씨와 지연이가 나를 기억해냄으로써 되돌린 것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겠구나. 아직도.”

할아버지가 말한다.

“사람이라서 그런 겁니다.”

내가 말한다.

할아버지는 날 바라만 보고 있다.

“할아버지도 사람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에 그런 겁니다.”

할아버지는 작게 웃는다.

“그런 것 같구나.”

나는 그런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어쩌실 겁니까?”

내가 물었다.

“사람이라면 정해진 끝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느냐.”

할아버지가 말한다.

“아쉽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묻는다.

“가업을 이어받을 네가 있는데 무엇이 아쉽겠느냐?”

할아버지가 말한다.

나는 잠시 말없이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내 대에서 끝낼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사주도 더 이상 유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 아이를 낳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정해진 끝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리 하도록 하여라.”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고 안 괜찮고 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모두 다 정해진 끝이거늘.”

그런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뭔지 모르게 후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면서, 언제나 내가 마음속에 품어왔던 말을 꺼낸다.

“급히 떠나시지는 말아주세요.”

할아버지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증손자는 보셔야 하니까.”

그런 내 말에 할아버지는 작게 미소 짓는다.

내가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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