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67화 (26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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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으로 돌아가서 마저 공부할래?”

그렇게 말하는 오빠를 바라보는 강서현의 눈에는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

강서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스스로가 오빠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오빠의 제안에 솔깃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쳐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의 시선에 지쳐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그저 스물네 살의 강서현으로 바라봐주지 않았다.

중앙그룹의 총수 강민철 회장의 손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다음 대 중앙그룹을 이끌 강우현 팀장의 여동생,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각오는 했었다. 자신이 그동안 누렸던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막상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자신이 판매대 위에 올려진 상품이나 진배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장이나 친권자가 자신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결혼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지정한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을 정략결혼(政略結婚)이라고 불렀다.

전근대 시대 이전에,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권력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동맹의 증거로 결혼이라는 제도를 도구로 사용했었다.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던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루이 16세와 열네 살의 나이로 결혼을 해야만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문제는 야만적이고, 전근대적인 그 제도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 사회지도층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격에 맞는 혼처를 찾고 싶어 했고, 실제로 그러한 결혼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앙그룹 창업자의 직계이고, 또한 상속자인 강서현에게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상품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강서현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 안에는 상품을 얻기 위해 그들이 지불해야 하는 값을 계산하는 계산식이 서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그들이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겉으로는 교양있는 척, 예의 바른 척, 정말 반가운 척을 하면서도, 그렇게 탐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징그러운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끔찍함을 느꼈다.

처음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했을 때, 자신의 아이와 친구가 되어달라고 말하던 엄마들의 눈에도 그러한 계산식이 쓰여 있었다.

차라리 미국에 있을 때가 좋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저 유학 온 수많은 아시아인 중 한 명이었고, 누구도 그녀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그녀가 물려받을 재산이 얼마인지 몰랐다.

설사 안다 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있어도, 강서현의 경멸스러운 눈빛을 보고는 알아서 물러서고는 했었다.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늘 시선이 따라다녔고,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귓속말로 속삭이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 이들은 백이면 백, 얼굴에 거짓 웃음을 띤 채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기서는 그 누구도 그녀를 강서현이라는 한 사람으로 봐주지 않았다. 강민철의 손녀, 강우현의 여동생, 그리고 중앙그룹의 상속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점점 견디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도 그랬다. 비서실의 일원으로, 할아버지를, 회장님을 보필하러 나간 자리에,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었다.

-어머. 서현이 아니니? 엄마는 잘 계시고?

그렇게 만면에 반갑다는 미소를 띄운 채 다가온 여자, 자신의 아들과 억지로라도 연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미국에서부터 끈질기게 접근해왔던 타 그룹 회장 부인.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마침 잘 됐다. 우리 아들 기억하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시선 끝에는 마치 맞선자리에라도 나온 것처럼 포멀한 정장을 갖춰 입은 한 청년이 웃음을 지은 채 서 있다.

당연히 알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에까지, 사냥감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강서현의 주변에서 맴도는 사람들 중 하나였으니까.

-호호호. 회장님. 제가 잠깐 서현이 좀 빌려 가도 될까요? 딱딱한 이야기는 어른들끼리 나누시고, 애들끼리 편하게 이야기하는 자리 좀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얼굴에는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탐욕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할아버지의 대답은 같았다.

-안 되겠습니다. 지금은 제 손녀가 아닌, 비서실 직원이라서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지켜주는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마 진작에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오빠와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그랬다면 진작에 이 땅을 떠났을 것이다.

“…학위 받고, 그냥 거기서 살아도 괜찮고, 그게 싫으면 괌에 가서 엄마랑 있어도 되고.”

강서현은 그렇게 말해주는 오빠를 바라보았다.

힘들기는 오빠가 더 힘들 것이다. 중앙그룹의 다음 대 총수, 군침을 흘리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오빠는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유일한 동생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괜찮아. 오빠.”

아니라고, 안 괜찮다고, 더 이상 그러한 시선 따위 받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뭐 처음도 아닌데. 그리고, 난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여동생을 강우현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그의 여동생은 달랐다. 마치 자신이 예전의 특권계급이라고 생각하는 듯,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다른 재벌가의 2, 3세들과 여동생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냥, 일반적인 집에서, 일반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그래서 일반적인 삶을 살았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

강우현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알겠어. 언제든지 마음 바뀌면 말해주고.”

하지만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정도밖에 없었다.

“…오빠. 고마워.”

그렇게 체념하는 듯한 미소를 짓는 여동생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

공항에서 돌아온 유지훈은 반쯤은 장난이 섞인 눈빛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오늘 귀국한다는 사실을 가족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고 싶었으니까.

비밀번호를 재빨리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외쳤다!

“아들 왔습니다!”

기대처럼 거실에 있던 엄마와 여동생은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지.

“오빠!”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도, 유학 갔다가 처음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여동생은 이렇게 온몸으로 자신에게 달려와 안겨주었다.

“와! 씨. 야. 너 살쪘지? 몇 키로야! 겁나 무거워졌어!”

품에 안긴 여동생에게 그렇게 맘에도 없는 짓궂은 인사를 건넨다.

“아니거든!”

여동생이 그렇게 말하며 품에 안긴 자세 그대로 복부에 솜주먹을 날렸다.

유지훈은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어떻게 된 거야, 말도 없이? 오늘 들어온 거야?”

엄마가 그렇게 말하며 오랜만에 보는 아들을 안아준다.

“일부러 비밀로 했지. 놀래켜 줄라고.”

“왜 그랬어? 그러다 집에 아무도 없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럼 더 재미있지. 몰래 숨어 있다가 짠! 하고 나타나면 되니까.”

다시 여동생의 솜주먹이 복부에 꽂혔다. 앞엣것보다 묵직한 한 방이었다.

“아우 씨. 무식하게 힘만 쎄져 가지고. 근데 아빠는?”

“지하철 탔다고 문자 왔으니까, 아마 금방 돌아오시지 않을까? 그나저나 그게 문제가 아니고 찬거리가 없는데…. 아우. 얘는 진짜 귀국할 거면 귀국한다고 미리 이야기를 하던가. 뭐니 이게. 갑자기.”

“에이. 뭘 아들 온다고 차리고 그래요. 그냥 있는 거랑 먹으면 되지. 김치, 김, 잡채, 육전, 게장, 갈비찜 그런 거.”

“명절도 아니고 어느 집의 그냥 있는 반찬이 갈비찜이냐? 으이구. 아무튼. 기다려봐. 얼른 장 봐와야겠다.”

“아니야. 오늘은 그냥 있는 거로 먹어요. 아니다. 나가서 먹을까? 외식할까? 엄마. 나 중국요리 먹고 싶어, 탕수육, 양장피, 깐풍기. 맵고, 짜고, 달고, 그런 거. 자극적인 코리안 차이니즈 푸드.”

“그럴까? 아빠에게 전화해봐야겠다. 어디쯤 오셨는지.”

그렇게 말하며 전화기를 드는 엄마를 바라보고는, 유지훈은 그제야 아직 자신의 품에 안겨서 주먹질을 하고 있는 여동생을 바라본다.

“근데 넌 왜 집에 있냐?”

“응?”

여동생이 물어본다.

“아니, 이제 대학생이 되었는데, 왜 금요일 저녁에 집에 있냐고요. 히키코모리처럼.”

장난스러운 유지훈의 말에 여동생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진다.

젠장. 잘못 말했구나.

유지훈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예쁘다는 칭찬을 끊임없이 들었던 여동생이었다. 그리고 그런 칭찬을 듣게 했던 미모가 아이러니하게도 여동생의 인생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유지훈 자신 또한 어렸음에도, 여동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더러운 욕망이 껴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여동생은 항상 겁먹어 있었다. 자신의 손을 꼭 쥐고서, 잔뜩 겁먹은 시선으로 유지훈의 작은 몸 뒤로 자신을 숨겨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고, 성장할수록 여동생을 바라보는 그런 시선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아니, 더 강해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처럼, 겁먹은 눈빛을 보이지도, 오빠의 뒤에 몸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여동생은 힘겨운 사춘기를 보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유지훈은 알고 있었다.

여동생을 힘겹게 한 것은 남자들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또래 아이들, 보통은 친구가 되었어야 했을 또래 아이들도 여동생을, 지연이를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예뻐서 좋겠다. 너만 편애받는 거 알지?

입으로 그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친구들의 시선은 유지훈도 눈치챌 정도였다.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었다. 그렇게 좋은 성적을 얻었고, 그리고 아버지가 교수로 있는 한국대에 자신만의 실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여동생을 괴롭히던 트라우마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니, 중국요리 말고 치킨 먹으러 갈까? 코리안 스파이시 츀힌.”

유지훈은 말을 돌렸다.

여동생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을 유지훈은 알고 있었다.

“앗! 치킨! 근데 중국요리도 좋은데?”

다시 여동생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엄마. 아빠 어디쯤 오셨대요? 거기 그대로 기다리시라고 해요! 우리 지금 나간다고!”

“아우. 참. 씻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과 같이하는 가족 외식이 싫지는 않은 듯, 미소 짓는다.

“야. 너도 좀 씻어라. 얼굴 번들거리는 거 봐라. 아우. 기름. 아우.”

유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여동생의 매끈한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아니거든? 이게 다 건강하다는 증거거든?”

여동생은 그렇게 말하면서 오빠 품에서 쏙 빠져나온다.

그리고는 ‘오빠는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저래서는 장가 못 갈 텐데.’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는 유지훈의 시선에는 동생에 대한 안쓰러움이 듬뿍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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