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63화 (263/271)

263 : 모든 것의 시작 (6)

***

할아버지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소녀도 그런 할아버지를 마주 바라보고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 작은 등을 떨면서,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감히 고개를 드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소녀가, 이제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소녀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쁘지 않군.

할아버지의 솔직한 감정이었다.

허락해 주신다면 천녀(賤女 : 천한 여자라고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말)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소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온다. 말투는 조심스럽지만,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어떠한 주저함도 담겨 있지 않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소녀를 바라본다.

고작 3년, 소녀가 이 집에 찾아온 지 고작 3년의 세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겠지만, 할아버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찰나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소녀는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정원에 더 많은 꽃을 피웠고, 가내에 더 많은 웃음소리를 들려주었으며, 하나뿐인 손자에게 친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자신에게도.

허락하지 않겠다.

할아버지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온다.

소녀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르신의 의지는 절대적이고, 아니, 애초에 어르신에게 자신의 의견을 내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소녀의 눈동자에 실망의 기운이 옅드는 것은 소녀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불경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애써 실망을 감춘 채 소녀가 말한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듣지 않겠다.

할아버지가 말한다.

뜻밖의 할아버지의 말에, 실망이 깃들었던 소녀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듣지 않으시겠다…?

다시는 너 스스로를 천녀(賤女)라 부르지 말거라.

할아버지의 말이 다시 들려온다.

소녀는 놀란 눈으로 할아버지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조심스럽게 앵두빛 입술을 연다.

허락해 주신다면….

소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주저한다.

그리고는 작게 몸에 힘을 주고는 다시 말을 잇는다.

…손부(孫婦 : 손주며느리)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

기다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스스로를 손주며느리라고 지칭한 소녀의 말이었다.

만약 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면, 작은 어르신의 반려로, 어르신의 손주며느리로 부족해서 내치시는 것이라면, 그러하시다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혹여 그런 것이 아니시라면, 좁고 어리석은 계집의 소견으로 감히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깊은 생각이 있으시다면, 그렇다면 기다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는 소녀를 바라만 보고 있다.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에는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담겨져 있다.

전지적 시점으로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나조차도, 할아버지의 눈빛에 무언가가 담겨 있다는 사실만을 느낄 뿐, 그 무언가가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 시선으로 한참 동안 소녀를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입이 열린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에 질문이 떠오른다.

얼마나 오랜 시간인가요? 5년? 10년? 아니면 그 이상?

그런 질문이 떠올랐다가 금세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자리를 이내 다른 감정이 채운다.

믿음. 자신의 마음에 대한 믿음.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소녀는 시선을 움직인다.

벽 너머, 어디선가 열심히 뛰어놀고 있을 어린아이가 있는 방향으로.

아주 오랜 시간이 될 것이다.

할아버지가 다시 말한다.

소녀의 시선이 다시 할아버지에 향한다.

십 년이든, 백 년이든 이번 삶이 아니라, 다음 삶으로 이어진다 하여도, 그다음 삶으로 이어진다 하여도, 소녀는…, 손부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렇게 단호히 말한다.

***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전각 끝에 서 있는 아이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아이도 아는 것일까? 자신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야 한다는 것을 아이도 알기라도 하는 듯, 차분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세 사람이 바라보고 있다.

할아버지, 소녀, 그리고 아이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소년.

이리 오너라.

할아버지가 아이를 부른다.

아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사람들을 바라본다.

꿈에서 보았던 장면, 의식으로만 남아 있는 나는 꿈에서 보았던, 아니, 내 기억 아주 깊은 곳에 남아 있던 기억들을 다시 지켜보고 있다.

이리 오너라.

할아버지가 다시 말한다.

그제서야 아이는 천천히 할아버지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런 아이를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다.

할아버지 앞에서 멈춘 아이는 할아버지를 올려다본다.

준비가 되었느냐?

네. 할아버지. 소손은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그 입에서 단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어른스러운 말투.

알고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이는 알고 있다.

가까이 오너라.

아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할아버지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소녀를, 마지막으로 소녀의 햇살 같은 미소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꾸욱 누르며.

청이 있습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전각을 따라 흐르는 소녀의 목소리.

말하거라.

할아버지의 허락.

그제서야 아이는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그런 아이의 시선에 보이는 것은, 평소 보여주던 햇살 같은 미소 대신, 슬픔이 가득한 소녀의 눈동자.

작은 어르신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소녀가 말한다.

그리 하거라.

할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진다.

할아버지에게 깊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소녀가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온다.

그녀를 둘러싼 슬픔이 그녀와 같이 아이에게로 다가온다.

아이에게 다가온 소녀는 두 손으로 치맛단을 여미며 천천히 몸을 굽힌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다.

미소지어준다. 눈물이 일렁이는 눈에 힘주어 웃음을 지어본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해 준다.

“소녀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번 생이 끝나면 그다음 생에, 그다음 생이 끝나면 또 그다음 생에. 언젠가 다시 뵈올 그때까지, 소녀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아이는 잠이 든다.

다시 깨어날 때가 언제일지 모를, 아주 오랜 잠.

할아버지는 잠들어있는 아이를 바라본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업을 이어받을 저 아이에게, 어떠한 업을 넘겨주어야 할지를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으로 백 년을 살았다. 사람의 마음을 버리고, 아니, 버렸다고 생각한 채로 천 년을 살았다.

그렇게 천 년을 살고, 사람의 마음이 없는, 아니, 없을 거라고 생각한 후계자에게 업을 넘겨주려 했다.

하지만 후계자에게는 사람의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이 자신이 버리지 못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 아이에게, 수(水)라는 이름을 붙여 준 저 아이에게 어떠한 업을 넘겨주어야 할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 볼 작정이었다.

***

다시 시간이 흐른다. 그렇게 결정한 할아버지는 이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손을 뗀다.

할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들. 절대로 충족할 수 없는 욕심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들이, 그들만의 힘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고 싶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 차면 기우는 달처럼, 한때 다음 세대의 정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왕조는 다시 내부의 분열과 부패로 점점 전조(前朝)가 앞서갔던 망국(亡國)의 길을 따른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가 벌어지고, 농민은 땅을 잃고, 손에 쟁기 대신 죽창을 집어 든다.

모든 땅이 피로 젖어 드는 외적의 침입에도, 굶주림에 도덕과 인륜을 가장 먼저 소화시켜버리는 기황(饑荒 : 기근)이 찾아와도 할아버지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이들이, 그들에게 닥친 고난을 자신의 도움 없이 어떻게 이겨 내는지를.

***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었다.

청년은 할아버지가 방관하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력의 일부를 물려받았음에도,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계승권을 주장하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자신을 자각한 채로, 민란이 일어나고, 외침을 받고, 기근이 닥친 세상을 바라본다.

아니, 그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소녀, 손위 누이처럼, 언제나 여름 햇살 같은 미소를 보여주던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다. 청년이 바라보는 이는 소녀가 아니다.

여름 햇살 같은 미소를 지어주던 소녀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소녀는 유한(有限)의 길을 걷는 사람이었고, 모든 사람에게는 정해진 끝이 있었다.

소녀는 정해진 끝을 맞이했고,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맹세한 맹약에 따라 다시 태어났다.

같은 영혼으로, 전생의 기억을 모두 가진 채로, 다시 태어나고, 다시 삶을 살고, 다시 죽음을 맞이한다.

청년은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고 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은 시선으로.

***

소녀의 영혼을 담은 노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

늙어 가는 육체는 그저 영혼을 담는 그릇일 뿐, 그 육체가 사라진다 하여도, 지금의 영혼은 다른 그릇에 옮겨 담길 뿐이다.

다행이다. 이번 생은 그리 힘들지 않아서.

노인은, 아니, 소녀는 이번 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한다.

어떠한 생은 그녀에게 끔찍한 기억을 남겼다. 인륜이 무너지고, 도덕이 사라지고,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던 끔찍한 세상을 그녀의 눈으로 바라봐야만 했던 삶도 있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외적의 침입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목숨을, 가족을 잃어야만 했던 사람들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던 삶도 있었다.

쌀 한 줌에 자식을 팔고, 노모를 버리는 끔찍한 일상을 지켜봐야만 했던 삶도 있었다.

그런 삶에 비한다면, 그래도 이번 삶은 그리 고통스러운 삶은 아니었다고 그렇게 자위하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다. 거짓말이다. 그녀의 마지막 자조는 거짓이라고.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민란도, 전쟁도, 기근도 아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기다림. 그 기다림을 위해 의미 없는 삶을 반복하는 행위가 그녀의 영혼을 마모시키고 있다.

분명 소녀의 영혼이었다. 봄 햇살처럼 따스하고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주던 맑디맑은 소녀의 영혼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에, 반복되는 삶에, 소녀의 영혼을 감싸고 있던 사람의 마음이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

***

다시 시간은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왕이 되어야 할 세자가 뒤주에 갇혀 탈진해 죽었다. 그렇게 죽은 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대륙에서 서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이 들어왔고, 특정 가문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큰 난이 일어났고, 황해도에 이국적인 모양의 선박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다.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 같던 청나라가 서이(西夷)와의 전쟁에서 패했고, 서이(西夷)를 받아들인 왜(倭)가 왜란 이후 처음으로 이 땅에 총칼을 겨누었다. 아비와 아들과 며느리가 왕좌를 두고 다투었고, 청국과 일본, 러시아가 이 땅을 두고 다툼을 이어갔다. 고부에서 군사가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청과 일본이 이 땅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외세가 이 땅을 갈라먹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하는 동안 이 땅의 위정자들은 아무것도 못 한 채, 그저 이 땅이 외세에 잡아먹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가장 먼저 빼앗긴 것은 땅이었다. 땅을 빼앗긴 후, 이름을 빼앗겼다. 말을 빼앗겼고, 글을 빼앗겼다. 결국에는 재물도, 사람도,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패배의식이 이 땅에 자리 잡았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 침입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 이익이라는 생각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이 땅에서, 이 땅 밖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빈손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이 땅의 침입자들이 모두 물러가는 해방의 날이 찾아온다.

해방의 끝에는 전쟁이 있었다. 이념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또다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당연시되는 참상이 이 땅에 벌어진다.

3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인세(人世)의 지옥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 없는 이 땅에 남은 것은 폐허와 끝없는 절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삽을 들어 폐허를 농토로 만들었고, 망치를 들어 고철을 두드렸다. 오늘의 먹을 것을 걱정하면서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고,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목소리를 높여 부당함을 꾸짖었다.

할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개입하지 않았음에도, 그럼에도 자신들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을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 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이 땅의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걱정하지 않을 때,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에 대해 아무런 위협받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오랜 시간 잠들어있던 후계를 바라본다.

***

다섯 살의 아이는 잠에서 깨어난다.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익숙한 고향 집에서, 내 방에서 아이는 잠에서 깨어난다.

마치, 전날 밤 잠들었던 것처럼, 고작 하룻밤의 잠을 잔 것처럼,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여느 다섯 살의 아이처럼, 보호자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두리번거리던 아이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렇게 맺히던 눈물은 방울져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으아앙 하는 울음으로 터져 나온다.

울음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린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온다.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자마자 아이는 두 팔을 벌려 할아버지에게 다가간다.

할아버지는 그런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린다.

울지 말라고, 괜찮다고, 할아버지가 있으니 이제 괜찮다고.

그렇게 속삭이며, 다섯 살 아이를 다독거린다.

짧은 팔로 할아버지의 목을 꼭 껴안고 엉엉 울던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잦아 들어가고, 이내 할아버지 품에 안긴 채로 다시 잠이 들어 버린다.

그런 아이를 잠시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인다.

나에게로, 의식만 존재하는 나를 할아버지가 직시한다.

그리고 나에게 말한다.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네가 가지고 있던, 네가 아끼고 사랑하던 모든 것, 너 자신까지 포함해서. 무로 돌아갈 것이다.”

할아버지의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품 안에 있던 아이의 모습이 흐릿해져 간다.

마치, 고체에서 바로 기체로 승화되는 것처럼, 그렇게 아이의 모습이 흐릿해져 간다.

동시에 내 의식도 흐릿해져 간다.

사라진다. 내가, 내 존재가, 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모두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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