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62화 (262/271)

262 : 모든 것의 시작 (5)

***

아이는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정원 커다란 나무에 반쯤 몸을 숨긴 채, 꽃에 물을 주는 소녀를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소녀는 아름다웠다. 마치, 봄날의 싱그러운 햇살 같은 미소가 얼굴에 걸려 있었다.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마치, 봄 햇살에 피어나는 꽃 같은 웃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아이를 보면서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오랜 시간 동안 잊어버렸던 기억이었다.

큰 집이었다. 할아버지와 나, 둘이 살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집이었다. 물론 밥을 해주거나, 청소를 하는 사용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씩 선물을 든 할아버지의 손님이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이 커다란 집의 거주민은 나와 할아버지 둘뿐이었다.

그게 딱히 나쁘다고 생각 안 했던 것 같다. 혼자서 노는 것은 심심하기는 했지만, 뛰어놀 공간이 많았으니, 내 나름의 놀이를 개발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였으니까.

그랬는데, 지금 꽃에 물을 주고 있는 소녀가 새로운 식구가 되면서, 나는 나를 둘러싼 세상이 모두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연심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알기에 나는 너무나 어렸으니까.

그저 좋았던 것이다. 나를 볼 때마다 맑게 웃어주던 그 얼굴이, 봄 햇살처럼 따스했던 미소가 좋았던 것이다.

꽃의 물을 주던 소녀가 아이를 발견한다. 아이를 발견한 소녀는 아이를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같이 물을 주지 않겠느냐는 의미가 담긴 제스처를 취한다.

나무에 몸을 숨겼던 아이는 마치,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준다는 건방진 표정을 하고서 쭈뼛대며 소녀에게 다가간다.

그런 아이를 보고 소녀는 작게 웃음 짓는다.

소녀의 마음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온다.

처음 이곳에 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소녀의 조부에게 들었을 때, 앞으로 소녀가 거주하게 될 커다란 집을 보았을 때, 처음 어르신을 뵈었을 때 소녀의 마음을 지배한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랬는데,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던 이곳이 마음에 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르신이 걱정했던 것보다 무서운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처음 만난 날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이후 자신에게 무관심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디선가 도도도도 달려와 주전부리를 주고 가는, 같이 놀자고 부르면 싫다는 얼굴로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작은 어르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꽃은 금낭화라고 해요. 주머니 모양의 꽃과 금색의 꽃가루 때문에, 금을 넣는 주머니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이 꽃을 말리면 차로 마실 수 있대요. 작은 어르신은 드셔보신 적 있으세요?

꽃을 설명해주는 소녀의 말에, 무언가 홀린 듯 꽃을 바라보던 아이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저도 마셔 본 적 없어요. 한번 만들어볼까요? 그늘에 말리면 된대요.

소녀의 말에 아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다시 고개를 젓는다.

나중에. 지금은 예쁘니까.

아이의 말에 소녀는 다시 미소 짓는다.

네. 나중에. 지금은 예쁘니까 나중에요. 물 줘보실래요?

아이의 고개가 위아래로 힘차게 움직인다. 그런 아이를 보고 소녀는 쿡 하고 웃고는 손에 들고 있던 조롱박 물국자를 아이 손에 쥐어준다.

***

소녀와 아이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할아버지는 나중에 부부의 연을 맺게 될 두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은 여전히 무감정하다. 아니, 무감정한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평소 어르신의 눈이라고.

하지만 나는, 의식 상태의 나는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무감정해 보이는 그 시선 안에는 감정이 담겨 있다고.

도구, 아이에게 할미꽃을 설명해주는 소녀도, 소녀의 설명을 들으며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꽃을 바라보는 아이도, 할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단지 도구와 다를 바 없었다.

후계를 잇는 도구, 그 도구를 보필하기 위한 또 다른 도구.

하지만 그런 도구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에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모르겠다. 감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 감정이 어떠한 감정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할아버지가 그 두 아이를 보면서, 사람의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니, 애초에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할아버지는 시선을 움직인다. 사람의 안력(眼力)으로는 절대로 닿을 수 없는 먼 곳을 바라본다.

아이, 아니, 이제는 소년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 정도로 자란 아이가 서책을 읽고 있다.

여전히 강렬한 눈빛으로,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듯,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한 시선으로 서책을 읽고 있다.

할아버지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생명, 그럼에도 그 누구보다 할아버지를,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믿었던 당시의 할아버지를 닮은 아이가 서책을 보고 있다.

***

다시 몇 번의 계절이 바뀐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이곳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신기한 눈으로 꽃을 바라보던 아이는 조금 더 자랐고, 소녀에게는 초경이 찾아왔으며, 이 집에 식구가 한 명 더 늘었다.

강렬한 눈빛으로 서책을 보던 소년이 이 집의 새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정자에서 한참 동안 책을 읽어 내려가던 소년의 귀에, 점점 가까워져 가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손에 무언가를 든 소녀가 소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소녀를 확인한 소년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소녀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녀를 향해 깊게 허리 굽혀 예를 표한다.

그래야 했다. 감히 할아버지라고 부를 자격도 얻지 못한 소년보다, 작은 어르신의 반려가 될 예정인 소녀의 지위가 높았으니까.

하지만 소녀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마치, 남동생을 바라보는 손위 누이처럼, 언제나 여름 햇살 같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마치 지금처럼.

목을 축일만 한 것을 가져왔어요.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그릇을 내려놓는다. 그릇에는 오미자즙에 콩즙과 꿀을 넣어 달인 오미탕이 담겨 있다.

감사합니다.

소년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소녀는 그런 소년에게 다시 여름 햇살 같은 미소를 보여주고는 몸을 돌린다.

소년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멀어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기운이 담긴 시선으로.

***

할아버지가 응접실로 사용하는 공간에 네 명의 노인이 앉아 있다.

할아버지를 보필하는 네 개의 기둥, 사주들이었다.

잠시 감정 없는 눈으로 그들을 둘러본 할아버지가 말한다.

그대들에게 할 말이 있네.

할아버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네 명의 노인은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귀를 열고 생각을 닫는다. 어르신의 결정이 내려지면 그들은 따른다. 그것이 정해진 규칙이었다.

할아버지의 시선이 문주(文柱)에게로, 사랑하는 손녀를 내어준 이에게로 향한다.

시우를 데려가도록 하게.

할아버지의 말에 일순간 문주의 몸이 크게 떨린다. 무형의 충격이 노구(老軀)를 관통한다.

손녀를 데려가라는 말은, 거(去)하라는 명령, 더 이상 손녀가 작은 어르신의 반려가 아니라는 의미와 같았다.

문주는 감히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용서받을 수 없는 불경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런 불경을 범하고 만다.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의문이 가득 들어차 있다.

어찌하여 데려가라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묻고 있다. 할아버지의 결정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그런 문주의 시선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작게 웃음 짓는다.

예전이었다면, 사람의 마음을 모두 버렸다고 믿고 있던 시기였다면, 그랬다면 문주의 저 시선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도구일 뿐이다. 도구는 용처에 맞게 사용될 뿐이지, 스스로가 어떻게 사용될지를 생각하거나, 사용됨에 있어서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문주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에는 어떠한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가 저지르는 불경이, 단지 가문의 안위를 걱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할아버지는 알 수 있었으니까, 본능적으로 손녀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부족하여 내치려 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될 것이기에, 그렇기에 놓아주려고 하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말에 네 노인의 눈에 다시 의문이 떠오른다.

자신들이 들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래 기다려야 한다?

처음으로 정해진 짝이라는 의미로 시우(始偶)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문주의 손녀가 불림을 받았을 때, 사주는 그들 나름대로 어르신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고심했었다.

전대 작은 어르신은 사람의 나이로 약관이 지날 때까지 계승을 받지 못했고, 그 결과 전대 작은 어르신이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택하였던 선례가 있었다.

그 끝이 좋지 않았기에, 그렇기에, 지금의 작은 어르신에게 빨리 짝을 지어주시려 하시는 것이라고, 아무리 늦어도 지학(志學 : 15세) 이전에 혼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오래 기다릴 것이기에 놓아준다는 할아버지의 말은 당장의 혼례도, 계승 의식도 없다는 의미와 같았다.

계승도 미룰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의문을 할아버지가 직접 해소해준다.

결정이 나오면 그들은 따른다. 그것이 규칙이다.

하지만 규칙과 상관없이 그들의 마음속에 피어나는 의문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들 마음속의 의문을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시선이 인주(印柱)에게 향한다.

그 녀석에게 기회를 주려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인주가 다시 깊게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벌을 청합니다.

태상왕,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금의 왕조의 기틀을 닦은 인물, 아들에게 보위를 물려주었지만, 태상왕(太上王)의 자리에서 여전히 이 땅에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이 마음속으로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는 불경에 대한 벌을 청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벌을 내리는 대신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인주, 그가 서책에 집중하던 소년, 둘째 도련님이라고 불리우는 소년을 이궁(離宮)에서 직접 보살피던 당사자였기에, 그러하기에 소년을 아끼는 그의 마음을 할아버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더 알고 싶은 것이 있느냐?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사주의 머리가 복잡해진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다.

결정하면 따를 뿐, 오늘처럼 마음을 헤아려 주신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언제쯤으로 알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궤주가 대표로 묻는다.

미뤄진 혼례와 계승 의식이 언제 다시 재개될 것인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재개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 할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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